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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2호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26-9-20
입력일 : 2026.09.18 17:43:49
작성자 : 성물방 File : 26-9-03.jpg 조회 : 61
제1112호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26년 9월 20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십자가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어려움과 책임, 참고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바로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걸어 주십니다.

추석 명절을 맞아
가족과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서로의 수고를
따뜻하게 격려하고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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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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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0일 (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 / 제2독서 로마 8,31ㄴ-39 / 복음 루카 9,23-26

“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순교자들이 피로 증거한 신앙의 모범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특별히 더 결심하는 날이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자신의 목숨마저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순교자들의 고귀한 정신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에서 ‘버리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그리스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거절하다’, ‘거부하다’ 또는 ‘부정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지요.

“믿음으로써,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파라오 딸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를 거부하였습니다”(히브 11,24)라는 구절에 사용됩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마태 26,70)라고 할 때도 쓰이지요.

모두 어떤 주장이나 사실에 대해 동의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 없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수용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여기서 ‘버리다(아르네오마이)’는 물건이나 쓰레기 따위를 내다 ‘버린다’고 할 때처럼 물질적 차원에서 소유를 포기하는 버림이 아니라, 내적인 차원에서 결코 내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결연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르네오마이는 단지 부정이나 거부 의사만 표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예 관계의 단절까지도 나아갑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만들어 완전히 인연을 끊어 버리는 거지요. 이때는 그냥 버리다가 아닌 ‘저버리다’라고 번역합니다.

“그는 믿음을 저버린 자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쁩니다.”(1티모 5,8),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묵시 2,13)
이 ‘저버림’은 존재론적으로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그와 맺어왔던 관계 자체를 끊어 버리는 겁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가 표현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 나라는 존재 자체에서 아예 ‘벗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즉, 옛것을 ‘버리고’ 옛 악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자신을 버린다는 건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는 존재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따르려면,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와 회심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많은 소유 중에서 어느 정도만 덜어내는 ‘선택적 버림’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적당히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지요. 온전히 비워내지 못하는 건 양다리를 걸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1열왕 18,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버림’이란, 그냥 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끊어 버림’입니다. 남김없이 비워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완전하게 끊어 버림은 단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버리고, 또 버려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버리는 일은 결코 일생에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공관복음 중에서 루카복음에만 유일하게 삽입된 단어가 있으니, 바로 “날마다”(루카 9,23)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날마다’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게 노력해야 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만 내 고집을 꺾는다거나 이런 조건에서만 내 뜻을 접는다거나 하는 것으로는 진정으로 자신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든 ‘날마다’ 그래야 합니다. 어제 버린 나를 오늘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내일도 버릴 수 있어야 하지요.

자신을 버리는 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자신을 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을 처음 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마지막으로 버리는 것처럼 그분을 따르십시오.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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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간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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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026년 9월 21일 월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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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태오 사도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사도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9,9-13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쳤습니다. 로마 제국은 세금을 수월하게 거두고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돈을 받고 세금을 걷는 권한을 넘겨주었습니다. 세리들은 지정된 세금을 로마 제국에 바치고 나머지 돈은 자기 몫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민족 사람들에게 혹독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결국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로 그러한 세리 출신이었습니다. 돈이 많아서 편안하게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하루하루를 외롭게 살았으리라 봅니다. 그런 마태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의 마음속에 있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보셨습니다. 그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시면서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였던 마태오를 제자로 받아 주셨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 맺은 특별하고 소중한 관계가 어떻게 사람을 뿌리 깊이 변화시킬 수 있는지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인물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삶에서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우며 살고 있나요? 그리고 그 자리를 채워 주시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마음에 드시는 모습으로 변화와 성장을 이루고 있나요?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왕태언 요셉 신부)



【화요일】 2026년 9월 22일 화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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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8,19-2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조금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러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말씀하신 것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시기에 어머니와 형제들을 따뜻한 모습으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기대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 구원의 은총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가까이, 친근하게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사람들에게 큰 힘과 용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과 자비가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치우쳐 있다고 느꼈다면, 군중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믿고 따르지 못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왔던 성모님과 형제들이 그분께 홀대받았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이루는 복된 친교가 모든 이에게 열리게 되었다는 큰 기쁨과 희망의 소식이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나 내가 잘해 주고 싶은 사람들만 골라서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수요일】 2026년 9월 23일 수요일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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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풀리아의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에서 사목적 열정으로 봉사 직무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의 영성을 지도하고 참회자를 화해시켰으며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섬겼다.

그는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몸에 지니고 고통을 느꼈다.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ㅣ

[복음묵상]

루카 9,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루카 9,6 참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자리에 편하게 앉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녀야 하였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제자들은 저마다 집에서 편하게 전화나 인터넷으로 예수님의 소식을 여기저기, 또 멀리까지 쉽게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발품을 팔고 몸으로 부딪쳐 가며 복음을 선포해야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과연 얼마나 성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지를 반성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새기는 것이 먼저일 텐데, 이 편리한 시대에 얼마나 자주 그리고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찾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의 일부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기도 쉬워졌고 들고 다니기도 간편해졌지만, 그 말씀과 가르침까지 가벼워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편리함과 간편함이 십자가의 무게까지 외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목요일】 2026년 9월 24일 목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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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9,7-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한 사람이 불안하고 불편해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그의 양심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 양심은 분명 뒤늦게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할 때 이미 말을 걸어왔을 것이고, 그 행동을 막으려고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양심의 소리를 외면해 버리면서 결국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래도 양심은 말을 거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고, 양심의 소리를 거슬러 저지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고 나서도 눈앞의 걸림돌이 치워졌다고 만족하며 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심으신 양심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래서 헤로데가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양심은 인간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악한 자가 스스로를 벌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양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양심이 우리를 지켜 준다면 우리는 회개하여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 양심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면 결국 그 양심은 우리가 스스로 벌하게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양심의 움직임과 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이며 살고 있는지요.

나의 양심이 살아 있음을 느끼며 그 힘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금요일】 2026년 9월 25일 금요일 [백] 한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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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12,15-21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하여 만족하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소출이라 생각하였고, 자신의 힘으로 이룬 성공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기만족’은 있었지만 ‘감사’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자기만족을 위하여 더 큰 곳간을 짓는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자기 몫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몫을 더 많이 가져갈수록 하느님을 위하여 내어놓을 몫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 꼭 무엇인가를 드려야 하나?’ 하는 위험하고 어리석은 물음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날들을 누리면서 하루하루 성실히 마지막 때를 준비하도록 가르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기억하게 합니다.

한가위는 생명의 주인이시며 죽음의 주인이신 주님 안에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날임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봉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토요일】 2026년 9월 26일 토요일 [녹]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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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9,43ㄴ-45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45).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수난을 당하고 사람들의 반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께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신다면, 자신들의 삶도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달았고, 더 큰 믿음으로 그들의 삶을 예수님 뜻을 전하는 데 바쳤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이미 알고 있기에 우리 앞에는 더 유리한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한 순간만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 어둠 속에서 우리와 함께 머물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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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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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아닌데도 ‘한국’ 순교 성인이다?

103위 순교 성인 중 10명은 외국인…국적 달라도 목숨 다해 이 땅을 사랑한 ‘한국 순교자’


한국교회의 순교 성인은 몇 명일까요? 신자에게는 상식일 듯합니다. 103명이죠. 그렇다면 이 중 외국인은 몇 명일까요?

어쩌면 ‘한국의 순교 성인인데 외국인이 있다고?’라고 여기거나, ‘외국인 선교사가 계신 건 아는데... 몇 분이셨지?’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답을 말씀드리자면 프랑스 출신 선교사 열 명입니다. 주교님 세 분과 신부님 일곱 분이지요.

한국 순교 성인이라는 말에서 ‘한국’은 국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에게 한국은 태어난 장소가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장소에 해당합니다.

시복시성 절차에 따르면 교구 조사의 관할은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종이 사망한 지역의 주교가 담당합니다. 교황청 시성부는 1983년 공포한 「성인 안건에서 주교들이 시행하는 조사에서 지켜야 할 규범」에서 ‘관할 주교는 원칙적으로 하느님의 종이 최후의 날을 맞은 지역의 주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열 분의 성인 말고도 외국 출신 ‘한국 순교자’는 많습니다. 일단 124위 복자 중 중국인인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님이 있습니다. 또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와 베네딕도회 덕원의 순교자 38위에는 프랑스·아일랜드·미국·독일 출신 선교사와 수도자가 48명입니다.

이분들은 그저 ‘외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말을 익히고, 우리 풍습과 문화를 배우며 우리나라 신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범세형(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장경일(베르뇌 시메온 주교)처럼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지요. 목자로서 신자들과 함께하다 마지막에는 이 땅에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순교자는 아니지만 한국교회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외국인 성직자도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종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님입니다. 주교님은 반대에도 굽히지 않고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선교를 자청하셨고 초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됐습니다.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긴 여정을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1835년 중국 만주 지역에서 선종했습니다.

앞서 시복시성은 선종한 지역의 교회가 진행한다는 원칙을 말씀드렸는데요. 여기에는 ‘시성부가 승인한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달리 정할 수 있다’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교구는 시성부로부터 시복 재판 관할권 이전 승인을 받아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시복재판을 진행했습니다.

끝내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예수님과 조선의 신자들을 사랑한 증거자이자 한국교회의 첫 교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자신들 때문에 신자들이 더 큰 피해를 당할 것을 염려해 스스로 박해자들 앞에 나가 순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하셨지요. 이번 순교자 성월은 비록 국적은 달랐지만, 목숨을 다해 한국을, 한국 신자들을 크게 사랑했던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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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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