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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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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1호 - 연중 제24주일 / 26-9-13
입력일 : 2026.09.11 18:24:19
작성자 : 성물방 File : 26-9-02.jpg 조회 : 61
제1111호 · 연중 제24주일
2026년 9월 13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상처를 잊는 일이 아닙니다.

미움과 원망에 붙잡힌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서로에게 다시 다가갈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랑의 결단입니다.

이번 한 주도
우리가 받은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가족과 이웃의 허물을
너그럽게 품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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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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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13일 (일) [녹]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집회 27,30-28,7/제2독서 로마 14,7-9/복음 마태 18,21-35

“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

예전 신학생 때 만난 한 아이 생각이 납니다. 이 아이는 마치 껌딱지처럼 부모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 나중에 결혼하면 부모 곁을 떠나야 할 텐데 괜찮아?”라고 묻자, 자기는 절대 결혼하지 않고 부모와 영원히 함께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지금 어떨까요?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까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배우자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키도 크고 잘생긴 배우자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무엇보다 너무 친절하고 늘 배려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시댁 식구들도 자기를 한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주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가 전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런 현실을 만납니다. 이미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사랑 가득하신 분입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떨까요? 당연히 행복한 삶의 완성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함께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충만함과 완전함의 숫자 ‘7’을 쓴 것을 보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고 말씀하십니다. 77번까지 용서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예 계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18,23)고 말씀하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 앞에 끌려옵니다. 한 탈렌트를 약 6000데나리온으로 계산한다면, 만 탈렌트는 6000만 데나리온이 됩니다. 일일 노동자가 자그마치 16만 년 이상 일해야 벌어들일 수 있는 돈입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은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마태 18,26)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저 같으면 “그래, 꼭 갚아라”라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유예도 아니고, 깎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탕감해 줍니다.

이렇게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종은 문을 나서자마자 모든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으라고 하지요. 그의 동료가 똑같이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마태 18,29)라고 말했지만, 그는 매몰차게 감옥에 가둡니다. 같은 종의 입장이지만, 이 사람은 갑자기 임금, 심판관의 모습을 취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정반대로 계산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비를 청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정의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어. 저 사람에게는 기회를 줄 수 없어.”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느님께 얼마나 용서받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계속 계산하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는 자비를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미 받은 자비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첫 번째 종은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그가 망하게 된 것은 용서받은 뒤의 태도입니다. 결국 심각하게 경고를 받은 사람은 단순히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라고 고백하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끝까지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잡고 있는 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주님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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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간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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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026년 9월 14일 월요일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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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 십자가 경배가 널리 전파되어, 여러 날짜에 축일을 지내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9월 14일로 고정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미사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심이 담긴 고백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가 과연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저 커다란 십자 나무의 무게만을 견뎌 내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고통과 공포, 사람들의 모욕까지도 견뎌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면 결코 영광의 십자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죽음을 무릅쓴 사랑의 상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십자가는 기쁨이고 영광이며 자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실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얼마나 자주 묵상합니까? 십자가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기도하며 바라보는 저 십자가가, 기도하며 긋는 나의 십자가가 마음 깊이 자랑스럽게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심 어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화요일】 2026년 9월 15일 화요일 [백]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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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일찍이 시메온은 성모님의 고통을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다.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이 기념일을 옮기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결하여 기억하게 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어제 우리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며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가톨릭 교회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을 지내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습니다(요한 19,25 참조).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음의 언덕인 골고타를 오르신 예수님 곁에 성모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까지 성모님께서는 그 곁을 지키셨습니다.

군사들에게 붙잡혀 매질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을 받는 아드님을 바라보시며 어머니께서는 마음이 찢어지는 괴로운 시간을 견디셔야 하였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시는 아드님을 바라보시며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셔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모든 고통을 예수님 곁에서 견디어 내십니다.

우리의 고통에 예수님께서 함께해 주신 것이 큰 사랑이고 자비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모습도 성모님처럼 진실과 성실이 담겨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고백일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수요일】 2026년 9월 16일 수요일 [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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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에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 이단에 맞서 투쟁하였고,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면서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253년 6월 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갈리스토 카타콤에 묻혔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210년 무렵 카르타고(현재 튀니지 일대)의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46년 무렵 체칠리아노 사제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품을 받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모범적인 덕행과 저술로써 교회를 훌륭히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유배당하고, 신임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재판받다가,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복음 말씀을 묵상할 때 하느님이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올바른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놓인 상황이나 최근에 가지게 된 고민들에 복음 말씀을 꿰맞추어 내가 듣고 싶은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닌 한계나 잘못, 그리고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분까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볼 때 복음 말씀이 전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루카 7,33-34).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찾고 성경을 읽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주장에 하느님께서 동의해 주시기를 바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칭찬받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느끼려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같은 복음 말씀을 묵상하더라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 알맞은 하느님의 다양한 가르침을 얻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마다 솔직하고 겸손하게 성경 말씀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목요일】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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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7,36-50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집으로 손님을 초대하였을 때에는 먼저 문 밖으로 나가서 손님을 환영하는 뜻으로 손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평화를 비는 의미로 볼에 입을 맞추는 것이 예절이었습니다. 그리고 물과 수건을 준비해서 손님이 발에 묻은 흙과 먼지를 씻을 수 있게 한 다음, 향료를 피우거나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손님이 머무는 동안 그 향이 은은하게 퍼지도록 해 주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이러한 예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인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 발을 씻어 드리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다음, 가지고 있던 향유를 예수님 발에 발라 드렸습니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것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랑과 만족을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바리사이와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려 하거나, 내가 바라는 대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이 보여 준 모습처럼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한없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지은 죄와 잘못을 뉘우치며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애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금요일】 2026년 9월 18일 금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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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8,1-3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여인들은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없었고, 남성들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자기 재산을 써서 예수님을 시중드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하였습니다. 자기 재산으로 하는 일인데도 인정받거나 찬사를 듣기보다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러한 행동을 한 까닭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든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보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깊은 애정과 희생으로 예수님을 따른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 신앙의 본보기가 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가진 몫을 내어놓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가진 것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러한 희생과 나눔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사랑은 손해 보거나 희생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더 힘차게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토요일】 2026년 9월 19일 토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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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루카 8,4-15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삶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판단하고 고민할 때 그 한가운데에 하느님 말씀이 있는 사람은 삶의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뜻깊으면서도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때로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때도 있고,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 말씀이 떠오르면 이내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이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그 말씀이 내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좋은 땅의 조건에 ‘인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하느님의 인내와 우리의 인내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인내는 더욱 값진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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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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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목(寶木)을 다 모으면 배 한 척 분량이 된다?

‘보목(寶木)’이라는 단어 들어보셨나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실 때 사용됐다고 전해지는 십자가 나무를 일컫는 말로 ‘성 십자가’라고도 합니다. 보목은 세계 여러 성당에 안치돼있는데요. 세계 각지의 보목을 다 모으면 커다란 배 한 척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나무가 모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짜 보목이 많다는 말인데요. 정말일까요?

전설에 따르면 보목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발견했다고 합니다. 성인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골고타 언덕에서 여러 십자가를 발견했는데, 그중 한 십자가에서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 십자가가 보목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보목은 조각으로 나뉘어 분배됐는데요. 그러다 보니 보목 조각을 안치하고 있는 성당의 수가 점차 많아졌습니다. 이 점을 들어 장 칼뱅은 「성유물에 관한 논고」에서 보목 조각을 다 모으면 배 한 척 분량이 나올 것이라 주장합니다. 성유물 공경을 비판하면서 그 양을 볼 때 상당수가 가짜일 것이라는 것이지요. 칼뱅만이 아니라 당시 개신교 신학자나 계몽주의자들이 보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주장에 반대되는 연구가 발표됐습니다. 1870년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샤를 로제 드 플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도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는데요. 그는 당시 알려진 보목 조각들의 목록을 작성하면서 그 부피를 계산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크기를 가정해 계산한 결과, 확인된 보목 조각들의 부피를 모두 합쳐도 십자가 전체의 약 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연구가 보목의 진위까지 밝히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양이 넘쳐서 가짜가 많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교회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거룩하신 당신 수난으로 우리에게 의로움을 얻어 주셨다”고 가르칩니다.(트리엔트 공의회 「의화에 관한 교령」)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한 희생 제사를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는 하나뿐”이고 “십자가 이외에 하늘에 오르는 다른 사다리는 없다”고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18항)

우리가 보목을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목을 바라보지만, 실은 그를 통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목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광주대교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대성전(교황 직속)과 인천교구 갑곶순교성지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일은 꼭 보목 앞이 아니더라도 가능합니다. 9월 14일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 성당이나 집에 걸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중)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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