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물방 소식지
제1110호 - 연중 제23주일 / 2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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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 2026.09.04 19: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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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6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진정한 충고는 상대를 판단하거나 이기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잃어버린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번 한 주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쉽게 드러내기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주고, 진실한 대화와 용서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고 또한 우리 가정과 공동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모으며 사랑과 화해를 이루는 평화로운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금주의 말씀묵상] ====================================================================== 2026년 9월 6일 (일) [녹]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에제 33,7-9 / 제2독서 로마 13,8-10 / 복음 마태 18,15-20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우리가 실천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형제적 교정’입니다. 오늘날은 충고나 조언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형제를 사랑으로 바로잡는 일은 더욱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형제의 잘못 앞에서 쉽게 두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난하고 험담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의 길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를 단죄하기보다 그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바라십니다. 사람을 포기하기는 의외로 쉽습니다. 많은 경우 ‘괜히 말했다가 관계만 더 나빠질 텐데’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침묵하거나, ‘어쩔 수 없어’ 하며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때로 침묵이 사랑이라고 여기지만, 기다림에서 비롯된 침묵은 사랑일 수 있어도 두려움과 무관심에서 나온 침묵은 포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면 형제를 잃고 맙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악한 길을 가는 이에게 그 잘못을 일러 주어 생명의 길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합니다. 형제를 바로잡는 일도 바로 이러한 사랑의 책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때로 충고하고 권고할 용기를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과 함께 만나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며,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를 망신 주거나 처벌하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그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심지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도 그를 단죄하고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이방인 가나안 여인과 세리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때 우리는 그 형제를 하느님의 손에 맡기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목적은 형제를 잃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얻는 것”(마태 18,15 참조)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것 못지않게 듣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바로 ‘듣는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들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는 악인이 경고의 말을 들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화답송은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말라”(시편 95,7-8 참조)고 노래합니다. 사랑은 무딘 마음에서 자라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형제를 향한 사랑도 싹틉니다. 복음에서 ‘듣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형제를 바로잡는 일이 일방적인 판단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고 마음을 여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사랑은 형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지 않으시는(마태 18,14 참조) 사랑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허물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비로소 잘못한 형제를 품을 수 있습니다. 형제를 얻으려는 사랑은 먼저 우리를 품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무뎌지면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포기하게 되지만,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때 우리는 다시 잘못한 형제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기다려 주셨듯이, 우리도 잘못한 형제를 포기하지 않고 그의 회개와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봉순 그레고리아 수녀(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 가톨릭신문 ====================================================================== [한주간 전례] ====================================================================== 【월요일】 2026년 9월 7일 월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 [복음묵상] 루카 6,6-1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면 보통 부정적인 뜻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융통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인데도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융통성’ 있게 굳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는 앞에서 고쳐 주시지 않고 따로 불러내어 그들이 없는 곳에서 고쳐 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지켜보던(루카 6,7 참조) 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을 공격하려던 사람들에게서 안전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융통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융통성 때문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책임감과 정의에 대하여 분명히 알려 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필요한 조언이긴 합니다. 그러나 융통성을 마치 “제 논에 물 대기”라는 속담처럼 모든 일을 나에게 편하고 유리한 상황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이 당연하다거나 합리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신앙생활에는 쉽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먼저 헤아리고 그에 따르는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화요일】 2026년 9월 8일 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성모 신심이 초대 교회 때부터 계속 이어지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오늘날 성 안나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하고, 7세기부터 기념해 오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1-16.18-23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족보가 아닌 예수님의 족보를 전해 줍니다. 아마도 당시 사회의 가부장적 특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부계 혈통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한 것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남성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는 이 족보에서 다섯 여인의 이름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 다섯 여인의 마지막으로 성모님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예수님의 탄생에 성모님의 순종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순종과 헌신은 예수님과 세상의 만남을 이어 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세상 구원은 예수님 이후의 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시간과 모든 세상에 대한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그 안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의 존재는 구원의 방향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시기 전의 시간과 세상, 오류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큰 기쁨과 영광으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모님의 탄생 축일인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탄생과 더불어 그분의 순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심을 경축하며 기뻐합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수요일】 2026년 9월 9일 수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 [복음묵상]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참행복’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듣다 보면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앞으로 행복하게 될 것이니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이 과연 위로가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희망이 곧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하여라.”(루카 6,24-25)로 후반부의 가르침을 시작하시며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의 행복에 취해 있는 사람들, 그래서 과거에 대한 감사함을 잊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불행해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본다면 우리가 모든 순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행복하였는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하느냐며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너무나 행복한 나머지 앞으로 행복해지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하며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을 하느님의 선물로 알고 감사하며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모든 순간은 행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목요일】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복음묵상] 루카 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오늘 복음은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은 단순히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나의 모습’과 ‘너의 모습’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 공동체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도 아니고, 반대로 너에게만 맞추어 주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나의 모습과 너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지는 그러한 공동체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 헌신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굳건한 ‘내’가 있을 때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며,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뿐만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아끼시고 사랑하심을 깨달을 때, 참된 용서와 화해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또 용서하면서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금요일】 2026년 9월 11일 금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복음묵상] 루카 6,39-42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오늘 복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이나 행동을 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해 줍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루카 6,39) 이는 남을 평가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그릇된 방향으로 묵상하는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하면서 ‘눈먼 사람이 또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하려고 애쓰고 있구나. 참으로 한심하네.’ 하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교만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말이나 행동을 하려 할 때는, 나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고 상대방의 마음도 헤아려야 합니다. 아울러 그 말과 행동을 하는 내 마음의 중심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을 자랑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만나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그 안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토요일】 2026년 9월 12일 토요일 [녹]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 [복음묵상] 루카 6,43-49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물론 그 복음이 나에게 어떤 뜻으로 다가왔으며, 나는 이 복음을 통해서 어떤 삶의 변화를 체험하였는지까지 함께 나눌 때 다른 이들에게 더욱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우리 스스로 복음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시는지 충분히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복음을 묵상하거나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는]”(루카 6,46)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묵상하고 성찰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당신 품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께 “네.” 하며 다가가는 걸음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나무가 되고, 나 자신의 곳간을 선한 것으로 채워 나가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복음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좋은 열매를 내어놓는다면, 또 마음의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어놓는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풍요로운 삶인지 다른 이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왕태언 요셉 신부) ======================================================================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 시복시성에 가경자 단계는 없다? 영웅적 성덕이나 순교 공식 인정돼야만 칭호 부여 교회사에 관심을 둔 분이라면 ‘가경자(可敬者)’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부르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시복시성 절차에는 ‘가경자가 되는 별도의 단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가경자는 ‘공경할 만한 (사람)’이라는 뜻의 라틴어 베네라빌리스(venerabili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과거에는 시복 안건이 교황청에 접수된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었지만, 이는 현재의 공식 절차와는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시복 안건이 교황청에 올라갔다고 해서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도,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132위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도 교황청 시성부에 시복 안건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경자 호칭의 사용이 변화한 것은 1913년 성 비오 10세 교황이 가경자 칭호 사용에 관한 규정을 변경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에는 가경자라고 부르는 관행 때문에 신자들이 마치 교회가 그 하느님의 종의 성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경을 허락한 것처럼 오해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성 비오 10세 교황은 가경자 칭호에 관한 교령을 통해 “사도좌가 영웅적 성덕 또는 순교에 관한 교령을 발표한 이후가 아니면 하느님의 종들에게 가경자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즉, 하느님의 종이 교황청에 시복 안건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가경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웅적 성덕이나 순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뒤에야 가경자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83년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을 통해 시복시성 절차를 전면 개편했습니다. 이때 과거처럼 ‘가경자가 되는 절차’는 사라지고, 영웅적 성덕 또는 순교를 인정하는 교령 발표 여부가 가경자 칭호 사용의 기준이 됐습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의 경우 순교 사실이 인정되면 시복되기 때문에 가경자라고 불릴 별도의 과정 없이 바로 복자가 됩니다. 다만 순교하지 않고 영웅적 성덕으로 시복 절차를 밟는 ‘증거자’의 경우에는 여전히 가경자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영웅적 성덕이 인정되면 그때부터 하느님의 종을 가경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님도 2016년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교령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하느님의 종으로 불렸습니다. 시복재판을 통해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가경자는 기적 심사를 통해 복자로 선포됩니다. 가경자의 전구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의학적·신학적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인정되면 시복이 이뤄집니다. 올해 3월 26일 교황청 시성부 의학자문위원회 심사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전구로 이뤄진 치유 사례가 기적적 치유임이 인정됐습니다. 이는 기적 심사의 첫 단계를 통과한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성인과 복자들은 모두 순교자였기 때문에 한국교회 시복시성 역사에서 교황청의 기적 심사 통과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은 심사들도 무사히 통과돼 최양업 신부님을 ‘복자’로 부를 수 있는 날이 빨리 다가오길 기도해 봅니다.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 [성물방 소식] ====================================================================== 지난 2월 이태리에 주문한 성물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지난주 입고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많은 물량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성물들이 수입되었습니다. 새롭게 입고된 성물들을 빠르게 만나보실 수 있도록 부지런히 준비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지난 호는 성물방 메인페이지 하단 "성물방소식지" 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상호명:임마누엘 / 대표 송철영 라파엘, 사업자등록번호 : 206-17-24777, 통신판매업번호 : 하남 제0378호 [12902]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 135 미사강변 스카이폴리스 나동 415호 ☎ 02-447-7396, 010-3161-4511 Copyright ⓒ 성물방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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