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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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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1호 - 연중 제6주일 / 26-2-15
입력일 : 2026.02.12 18:50:32
작성자 : 성물방 File : 26-2-03.jpg 조회 : 129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루살렘


제1081호 · 연중 제6주일
2026년 2월 15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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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규칙의 준수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의로움과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말과 행동,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의 삶이 어떤 뜻에 달려 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내 마음과 삶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며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음을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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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말씀묵상]

2026년 2월 15일 (일) [녹]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집회 15,15-20 / 제2독서 1코린2,6-10 / 복음 마태 5,17-37

“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호주의 간병인 브로니 웨어의 책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에는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나 자신에게 솔직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남을 의식하며 살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일만 열심히 했다).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많은 것을 억누르며 살았다).

친구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다(그때의 친구가 보고 싶다).

행복은 결국 내 선택이었다(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큰 집에 살거나,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과연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게 될까요? 그보다
생각, 말과 행동 그리고 관계 맺는 방식 전체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될 때
후회 많은 삶이 아닌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조문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유다교 랍비
전통에서 정리한 관습적인 조문의 수는 모두 613개(긍정 명령 248개, 금지
명령 365개)입니다. 이를 실천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깜짝 놀라고,
어쩌면 불가능한 말로 비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살인의 뿌리가 되는 성내고(내적
감정), 바보라고 부르며(언어 폭력), 멍청이라고 하는(인격 모독) 행위까지
살인의 범주에 포함하십니다. 가장 거룩한 행위인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와의 화해에 있다는 것도 이야기하십니다.

간음 역시 물리적 행위 이전에, 마음속의 욕망에서 시작된다고 하시지요.
그러면서 여자를 소유의 대상이나 욕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죄라고 지적하십니다.

모세 율법은 이혼장을 써주도록 허락했지만, 배우자를 버리면 그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근원적 가르침을 전달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은 아예 맹세 자체가 필요 없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맹세가 필요하다는 것은 평소의 말에 거짓이라는 악이
섞여 있다는 증거이기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만 잘 지키고 죄라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죄를 만드는 뿌리인 분노, 음욕, 거짓 마음 등을 마음에서 지우는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높은 기준을 우리 힘만으로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코린 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짐을 지우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억압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의 자유인이 되라고 지금 초대하십니다. 그래도 지키기
힘든 주님의 계명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집회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자기 삶의 시야를 넓히고, 마음을
회복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행만 하시지 않습니다. 방랑벽이 있어서 오랫동안 많이
돌아다닐 수는 있겠지만, 어떤 여행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 끝은
출발지인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여행 중인 우리는 이 여행을 마치면
출발지인 고향으로, 즉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과연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여행 중인 지금 삶에서 계속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하고,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인천교구 성 김대건본당 주임, 인천가톨릭대학교
카펠라관장),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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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간 전례]

[월] 2026년 2월 16일 월요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8,11-13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계시다면, 저희한테 직접 보여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시고
탄식하시며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들의 태도는 ‘하느님이시기에
믿겠다.’가 아니라, ‘내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믿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기적이 먼저, 믿음은 나중’이라는 잘못된 순서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표징을 본 뒤에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기 때문에 삶
안에서 표징을 발견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믿음의 길에 지혜를 더합니다.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3).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십니다]”(1,5).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그저 고난을 피하는 요령이나 세상의 지식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련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께 믿음을 두며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의 눈을
가리킵니다. 온갖 균과 바이러스가 가득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균을 없앤 무균실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면역력을
키워서 이겨 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 우리가
신앙으로 받는 은총은 후자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악과 시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그것들을 이겨
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으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 자비 저에게 이르게 하소서.
제가 살리이다.”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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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6년 2월 17일 화요일
[백] 설

오늘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조상을 기억하며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눕니다.
그렇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이날에도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복음묵상]
루카 12,35-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로 우리는 벌써 새해를 세 번째로 맞이합니다. 교회 전례력의
새해, 양력 1월 1일, 그리고 오늘 설까지, 올해만도 여러 번 새로운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런데 다들 새해를 맞이하며 세운 계획들은 잘 지키고 계신가요? 아마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작심삼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듯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해 보면, 결국은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에
대한 답을 오늘 전례 안에서 찾아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야고 4,14-15).

그렇습니다. 어떤 계획이든 우리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이룰 수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계획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계획일수록, 더욱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새해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먼저 주님께 청하는 다짐으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종도 대단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을 의식하며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계획보다 먼저 주님을 기억하고 따르는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청하고 부를 그분께서는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대로, 우리에게 힘을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니 올 한 해에는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이고 죽겠네.”가 아닌, “아이고, 주님”을 먼저
부르는 삶. 그 고백 하나가 우리의 걸음을 분명히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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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6년 2월 18일 수요일
[자] 재의 수요일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함께 지킨다.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Ecce homo.”(에체 호모) 매를 맞으시고 초라해지신 예수님을 빌라도가
군중 앞에 내보이며 던진 이 말은, ‘이 사람을 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것이 사람이다.’로 옮깁니다. 라틴 말 ‘ecce’가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라 존재의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문법이 아니라, 이 말이 가리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입니다.

과연 무엇이 사람이라는 것일까요? 상처투성이가 되신 예수님, 아무
힘도 없이 조롱당하시는 그분을 두고 “이것이 사람이다.”라고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결코 자신의 힘만으로는
완전에 이를 수 없지만, 완전을 꿈꾼다는 점에서 더욱 좌절할 수도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넘어집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안
돼.”라며 자책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그렇게 넘어질지라도 우리가 당신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기를 바라십니다. 넘어지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cce homo.”(이것이 사람이다)

자신이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 존재인지 절실히 깨닫는 그 순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는 하느님의 물음에 비로소 진심으로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넘어지는
사람으로서, 처절히 자신을 마주한 사람으로서 맞이해야 합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머리에 재를 얹으며 듣는 주님의 말씀에
깊이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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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6년 2월 19일 목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9,22-25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순 시기를 떠올릴 때면 우리는 십자가와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자연스럽게 절제와 고행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시기에 절제와 고행의 삶을 봉헌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이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사순 시기에 절제하고 고행하는 까닭은, 먼저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이 동참이 다만 그분을 따라 고통을 겪어 보는 데 그친다면,
그것이 신앙인의 의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자신의 고통을 자녀가 똑같이 겪기를 바라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는 ‘제
십자가’, 곧 자기 몫의 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머리로는 생명의 길을
알면서도, 몸은 여전히 죽음의 길에 머무르려는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이런 긴장과 모순이 우리가 지는 십자가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화답송처럼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그 어떤
고통도 우리를 그렇게까지 무겁게 짓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는 십자가의 무거움은 결단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순 시기의 핵심은 고행의 강도가 아닌 주님과 함께하려는 결단의
진정성에 있지 않을까요?

2026년 사순 시기를 맞아 역설적인 꿈을 꾸어 봅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은 정말 ‘편안한’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기를. 곧 주님을
향한 결단이 두려움 없이 이루어지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음의 기도가 더 절실해집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영성체송).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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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6년 2월 20일 금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오늘 화답송은 참된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실 회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뜻밖에도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 죄송해서 고해성사조차 볼 수 없다.”라는 말
속에는, 참된 뉘우침보다는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녀가 죄책감과
당혹감에 휩싸여 집을 뛰쳐나갔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돌아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부모님이 나를 받아 주실 리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가로막지만, 정작 부모는 마음이
상하였을지언정 자녀를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사랑하고
기다립니다.

이런 끝없는 자책이 과연 부모에 대한 참된 미안함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자책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으로
상황을 통제하려는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책을 속죄로 착각하지만, 사랑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해명이나 보상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전하는 단식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단식은 그저 ‘보여 주기 위한’ 행위도 아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이 정도 뉘우치면 되겠지.” 하는 식의 거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단식하여 남겨 둔 것을 기꺼이 필요한 이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랑의 실천, 곧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여러 결심에 앞서, 오늘 복음 환호송을 마음에 깊이 새겨
봅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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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6년 2월 21일 토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5,27ㄴ-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 시기를 맞아, 많은 이가 ‘회개’를 결심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잘못을 고치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앙이 전하는 회개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앙에서 말하는 회개의 핵심은 마음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회심’이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얼핏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고친다’와 ‘돌린다’는 분명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잘못을
고친다.’는 뜻의 회개는 잘못을 없애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은 다릅니다.

오히려 잘못을 계기로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회심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결국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나는 바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우리의 잘못과 죄는 어떻게 되느냐?”
하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고치지 않아도 그저
하느님만 찾으면 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의 개념입니다. 계명을 어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는
것도 죄이지만, 더 근본적인 죄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면서, 동시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삶을 이어 갈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현실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고자 하면서도 되풀이하게
되는 잘못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약함일 뿐이며, 처벌이 아니라
하느님께 힘과 자비를 청할 이유가 됩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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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기도 끝에 꼭 ‘아멘’을 해야 할까?

우리는 기도를 “아멘”으로 끝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 끝에 아멘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기도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아멘이
뭐길래 이렇게 자주 말하는 걸까요?

실은 아멘에는 여러 가지 용법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기도 끝에 하는 아멘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어 아멘은 ‘믿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와 ‘견고함, 신뢰성,
성실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확실하고 유효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때 쓰는 표현으로, 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은
“그렇습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아멘은 성경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확인할 때, 하느님의 심판이나 저주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표현할 때, 하느님을 찬양할 때 그리고 시편의 찬미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주로 기도와 찬미의 끝에 아멘을 사용합니다. 서간을 보면
기도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끝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 바오로 사도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초심자가
어떻게 그대의 감사 기도에 “아멘” 하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1코린
14,16)라며 신령한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기도 하는데요.

초대교회에서도 오늘날 우리처럼 교회 공동체가 모여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으로 아멘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멘은 예수님도 자주 사용하신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멘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에서 “진실로”로 번역된 부분의
원문이 사실 아멘입니다. 얼마나 많은가 하면, 마태오복음에서 30번,
마르코복음에서 13번, 루카복음에서 6번, 요한복음에서 25번 말씀하십니다.

특히 아멘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고 아멘을 두 번씩 반복해서
사용하시는데요.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진리에 바탕을 둔
권위가 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아멘의 하느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신실하신 하느님”(이사 65,16)으로 번역됐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아멘’이시다”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5항)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그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2코린 1,20)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 아멘이십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아멘을 받아서 완성해
주십니다.

기도 마지막에 반드시 아멘을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아멘만큼
훌륭하게 기도를 마무리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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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

※ 설 연휴 배송 안내 ※
2월 19일(목)부터 정상 출고됩니다.

※ 지난 호는 성물방 메인페이지 하단 "성물방소식지" 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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