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물방 소식지
제1072호 -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 25-12-14 |
|---|
|
입력일 : 2025.12.13 09:27:00
|
제1072호 · 대림 제3주일 2025년 12월 14일 일요일 성물방 주간 소식지입니다. ━━━━━━━━━━━━━━━━━━━━ 대림 제3주일은 자선주일로, 기다림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도록 초대받는 주일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말보다 행동으로, 기도와 함께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질 때 더 깊어집니다. 이 한 주간, 작은 나눔과 따뜻한 마음이 우리 삶 안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금주의 말씀묵상] 2025년 12월 14일 (일)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제1독서 이사 35,1-6ㄴ.10 / 제2독서 야고 5,7-10 / 복음 마태 11,2-11 “ 메시아 콤플렉스 ” 구약과 신약을 잇는 중간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염원했던 바는 난세에 등판하는 시대의 영웅과 같은 메시아(그리스도)의 출현이었으며, 이를 ‘메시아 대망 사상’이라 일컫는다. 메시아 신원을 확보한 인물은 당대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 구약 성경에서 전개되듯 이스라엘 민족은 위기의 순간마다 특정 인물의 활약으로 이를 극복하였으며, 하느님께서 이 인물을 파견하셨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신약 시대 초기의 세례자 요한은 독특한 생활 양식과 구약 예언자들의 명맥을 계승하는 설교로 ‘오실 분’(메시아)으로 추앙될 만한 충분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언급은 요한이 주도하는 특정 조직의 형성과 확장을 추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요한은 메시아 신원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오실 분’을 찾았다. 복음서는 요한의 발언을 통해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을 지목하면서 요한의 위치를 ‘오실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이’로 격하한다.(루카 3,16 참조)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자렛 예수를 메시아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메시아 신원과 관련해 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공통분모가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피력하지 않았다. 요한이 메시아임을 스스로 거부하면서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강조하였다면, 예수님은 함구하면서 ‘자기 앞에 있는 분’(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파견받았음을 역설하였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메시아 호칭은 해석상 ‘초월적·절대적 능력 혹은 권한’을 함의한다. 이는 ‘메시아 콤플렉스’란 심리학적 용어에 접목할 수 있다. 자기애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이 문제 해결의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에게 나타나는 심리 현상이다. ‘내가 아니면 안 돼!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야! 나만큼 고민한 사람은 없기에 내 결정은 옳아!’ 메시아 콤플렉스의 성향을 보이는 이들은 자기 판단과 실행을 절대적인(최고·최선) 진리로 규정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척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앞에서 길을 닦는 이’로 평가한다. 요한은 ‘앞에 있는 자신’(먼저 태어남, 먼저 활동함)을 내세워 주인공 행세를 하거나 주도권을 점유하려 하지 않으면서 ‘뒤에 오실 분’을 배려하는 조연의 소임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곧 메시아 대우를 받을 만한 잠재적 가능성이 컸던 요한은 메시아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웠다. 또 ‘이 세상에서의 큰 인물, 요한’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저 세상에서의 요한보다 더 큰 인물’(마태 11,11)을 상정하였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다. 극소수는 특정 인물의 지휘로 해결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들이다. 인생의 복잡한 문제는 ‘해결하는’(푸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권한과 책임을 지닌 이들에게 문제 해결형, 권력 집중형의 ‘메시아 리더십’보다 문제 관리형, 권력 분산형의 ‘큰 인물 리더십’이 요청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처럼 시간적 선후 관계의 이상적인 형태는 자녀를 위해 부모가 있고, 학생을 위해 선생이, 후임자를 위해 전임자가 있으며, 미래 세대를 위해 현 세대가 있는 관계다. 이 관계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타인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는 태도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김일두 신부(목포 가톨릭대학교 교수), 평화신문 ━━━━━━━━━━━━━━━━━━━━ [한주간 전례]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자] 대림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21,23-27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오늘 복음의 바로 앞부분은(마태 21,18-22 참조) 예수님께서 성안으로 들어가시다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어 말라 버리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시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분께 시비를 겁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백성에게만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에도 절대적 권위를 지니신 예수님께 질투를 느끼고 화가 난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시 잘 알려진 토론 방식으로 대응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1,24-25)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진리나 올바른 대답에는 관심이 없으며,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기들의 권력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모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영리하게 대답한다고 생각하였겠지만, 사실은 예수님과 한 토론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참된 하느님을 만날 기회를 잃고 맙니다. 만일 나에게 작은 권한이라도 주어지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씁니까? 다른 이를 섬기는 데 씁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통제하고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씁니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모습은 어쩌면 마음을 되돌리고 변화하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 신념과 욕구, 닫힌 마음과 굳어진 습관들에 갇힌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내적 자유와 진리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자기 신념과 욕구를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자] 대림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28-3 <요한이 왔을 때, 죄인들은 그를 믿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께 그리 호감을 느끼는 청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그분께 시비를 걸기가 일쑤였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도 깨우쳐 주시고자 두 아들의 비유로 그들의 가면을 벗겨 주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이 이야기 속의 두 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두 부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길을 잃었지만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바꾸어”(21,29)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곧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둘째 아들은, 말로는 신앙을 과시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21,32)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요한 사도의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물론 “예.”라고 말하고 실천도 하면 가장 좋겠지요. 그런데 늘 그러지는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는 일상에서 때때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기도할 때, 맡은 일을 할 때, 남을 위하여 양보하거나 희생해야 할 때 ‘아니오.’와 ‘예.’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전환점은 “생각을 바꾸어”(마태 21,29)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의 거절이 아니라 마지막 선택을 보십니다. ‘아니오.’에 끌릴 때 생각을 바꾸어 봅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자] 12월 17일 [복음묵상] 마태오 1,1-17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오늘부터 시작하는 대림 시기 둘째 부분(12월 17-24일)의 복음은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사건들을 들려줍니다. 첫날인 오늘 복음은 지루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르하브암’이나 ‘스알티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이름의 목록이 아닙니다. 유다인인 마태오 복음사가는 셈족 문화에 속하는 이런 가계 소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사실을 유다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는 ‘구원자’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를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밝고 어두운 면을 다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계에는 특별하고 훌륭한 사람들만 있지 않고, 간음한 자, 창녀, 이방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구체적 삶 속에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면서 황제나 영웅의 역사가 아니라, 작고 약한 한 민족의 역사 안으로, 나자렛 시골 마을 가난한 젊은 부부의 삶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작고, 심지어 보잘것없어 보이는 우리의 역사,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오늘 그 사실을 기억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자] 12월 18일 [복음묵상] 마태오 1,18-2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약혼녀에 대하여 슬픈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있습니다. 약혼녀인 마리아가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잉태하였음을 알게 된 요셉입니다. 그에게는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충격적이고 슬픈 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고발하지 않기로 합니다. 고발은 곧 그녀의 죽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던 그는 마리아의 명예, 존엄성, 생명을 보호하고자 남모르게 헤어지기로 합니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의 비밀을 요셉에게 공유하면서 그를 하느님의 계획에 참여하도록 초대합니다. 그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 성모님을 제자에게 맡기시듯이, 지금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요셉에게 맡기십니다. 천사는 태어날 분에게 이름을 붙이는 영예를 요셉에게 줌으로써 아버지의 자격과 임무를 부여합니다. 요셉은 묻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천사가 명령한 대로”(1,24) 합니다. 의심도 두려움도 없이 망설임 없는 순종만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생각을 버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요셉 성인을 “순종하는 아버지”요 “수용하는 아버지”(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늘, 특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만나면 하느님을 향한 요셉의 순종과 받아들임을 떠올려 되새기도록 합시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12월 19일 금요일 [자] 12월 19일 [복음묵상] 루카 1,5-25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생명의 선물을 알리시는 이야기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내용입니다. 삼손의 잉태 소식은 어머니에게, 요한의 잉태 소식은 아버지에게 전해집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들에게서 생명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이들의 삶에 개입하시어 사막에서 꽃을 피워 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자연의 원리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자기의 인간적 한계를 말하는 즈카르야의 이러한 반응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에서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심을 더 명확히 드러내 줍니다. 교회 역사에서 인간이 노력하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시고 성덕을 이루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 은총에 응답하여 삶 안에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여 일상생활에서 가꾸며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겠지요. ‘주님, 저는 할 수 없지만 당신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사막이지만 당신께서는 거기서 꽃을 피우실 수 있습니다. 제 안에 당신 생명을 키워 주십시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자] 12월 20일 [복음묵상] 루카 1,26-38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임신한 지 여섯 달째인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을 전합니다. 사제인 즈카르야에게는 성전에서 천사가 나타났는데 마리아에게는 그의 집에서 나타납니다. 천사는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나자렛에서, 성전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집에서, 사제가 아니라 평범한 시골 처녀에게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마리아가 기뻐할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기뻐할 이유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1,30)라는 말에 이어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을 통하여 다윗에게 약속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리라는 위대한 약속을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게 될 중요한 사명을 깨닫지만,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단순하게 궁금하여 묻습니다. 불신이 아니라 믿기 위한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성령께서 오실 것임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곧 겸손하게 받아들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평범한 일상에서 사소한 일들과 친근한 사람들 안에서 찾아오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잘 알아뵙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오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이렇게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언어의 본질은 지시가 아닌 ‘의미의 드러남’ 자연 안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현상학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본질적 특성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 오래된 그리스 말 중에 ‘초온 로곤 에콘(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이 있다. 이 말은 보통 ‘이성을 가진 동물’로 번역되는데, 사실 여기서 이성에 해당하는 ‘로고스(λόγος)’는 ‘말’을 뜻하며, 말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의 생각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한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발화 사건이 말이라면, 이런 생각과 말을 기호로 기록한 형태가 문자다. 언어는 존재와 삶의 풍부한 의미의 담지자로서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자기와 세계를 이해할 뿐 아니라 타인과 대화하고 소통한다.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진술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첫째, 언어가 존재 현상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는 것이며, 둘째, 언어는 진리가 드러나는 장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는 ‘비은폐성’(발견되어 있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진리는 단순한 명제의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존재는 보통 은폐된 채로 있으며, 그 은폐성에서 끄집어내 오는 것이 진리인데, 이때 언어는 진리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언어로 말함으로써 존재 의미가 비로소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며, 이때 언어는 이 지향성을 매개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작용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식 대상을 외부 세계와 연결하며,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후설(1859~1938)에 의하면 언어는 ‘지시’와 ‘표현’의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 언어의 지시 기능이 경험적 사물을 향해 있다면, 언어의 표현 기능은 ‘의미’를 향해 있다. 후설에 의하면 의미는 사물처럼 지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표현될 뿐인데,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대상의 지시가 아닌 바로 의미의 표현에 있다. 이렇게 의식의 지향성이 근본적으로 물리적 대상을 넘어 의미 구조를 형성하는 만큼, 언어로 표현된 의미 세계는 그 다양한 맥락과 의도와 해석에 따라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때 언어가 담고 있는 ‘이념성’은 소통과 긴장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이자 인식 그 자체다. 자연과 다르게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로 매개된 세계이며, 그 세계는 또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할 ‘매개된 직접성’으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이 언어로 매개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이해할 뿐 아니라 자기를 실현한다. 그런 만큼 우리가 평소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한 발화 사건이 아니라 존재 진리에 참여함이자 자기 존재를 실현하는 것과 직결된다. 가다머(1900~2002)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역사를 통해 전통적으로 전승된 언어다. 인간의 이해가 언어로 전승된 과거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이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시간적 간격을 메우는 새로운 해석의 작업이다. 시간적 간격에서 비롯된 이해의 갈등과 그로 인한 상처 역시 이런 해석의 작업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박병준 신부, 예수회 서강대 신학대학원 명예교수, 평화신문 ━━━━━━━━━━━━━━━━━━━━ [성물방 소식] 이번 주 성물방에는 새롭게 입고된 성탄용품들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성탄을 준비하시는 분들께 주문해 주신 성물이 최대한 빠르게 전달될 수 있도록 출고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성탄, 기도와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데 성물방이 작은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지난 호는 성물방 메인페이지 하단 "성물방소식지" 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상호명:임마누엘 / 대표 송철영 라파엘, 사업자등록번호 : 206-17-24777, 통신판매업번호 : 하남 제0378호 [12902]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 135 미사강변 스카이폴리스 나동 415호 ☎ 02-447-7396, 010-3161-4511 Copyright ⓒ 성물방 All Rights Reserved. Since 2004 성물방은 "www.smb.kr" 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