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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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3호 -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 23-11-12
입력일 : 2023.11.10 10:13:2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11-02.jpg 조회 : 38
경기도 용인소재 천주교 용인 공원 묘원 성직자 묘지.


2023년 11월 12일 일요일, 제963호 소식지입니다.




11월도 중순에 접어 듭니다.

추위의 시작과 더불어 준비를 하게 됩니다.

김장, 두터운 옷, 난방 기구 등

겨울을 나기위해 준비하듯이

위령성월에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나와 먼저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1월 12일 (일) [녹]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제1독서 지혜 6,12-16 / 제2독서 1테살 4,13-18 / 복음 마태 25,1-3

땅과 하늘, 똑같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교만과 자기 성취감 젖어든 삶 대신
오직 하느님 뜻 살아낸 예수님처럼
믿음과 사랑으로 천국 은총 누리길

평신도 주일, 사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합니다. 그동안 제 삶을 채웠던 교만과 허세와 자만을 꺼내어 보여드립니다. 내면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진득이 묻어있는 모든 불순물을 주님께 깡그리 봉헌합니다.

지금 저는 현대의학이 해석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하며 알쏭달쏭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처음 수술을 받고,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주님께로 더욱 의탁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 생각과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순간 몸을 혹사했던 많은 날과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제 몸의 온갖 장기와 세포들이 힘들게 힘들게, 저를 지탱시켜주기 위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버티어줬다는 걸 느꼈습니다.

스스로 힘을 자신했던, 자신의 건강을 뽐냈던 갖은 행위들이야말로 스스로의 약함을 숨기려는 오만, 주님께서 주신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마구 부려댄 교만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 몸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습니다. 사제의 체면보다 사제의 권위보다 훨씬 무거운 인간의 무지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열했습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이 미련함에 오래 울었습니다. 아직 병명조차 아리송한 병과의 싸움이 진행 중이지만 매일 몸에게 사과를 건네며 지냅니다. ‘미안타’, ‘애썼다’라고 용서를 청합니다. 아니, 몸을 선물해주신 주님께 사죄드리며 몸을 아끼고 사랑하겠다 다짐합니다.

무릇 삶은 완만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삶에는 모든 것을 뒤엎는 소용돌이가 존재합니다. 그 요란한 소용돌이 앞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권태롭고 단순하여, 시시하게 느껴지는 그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비로소 실감하게 됩니다. 바로 지금, 제 모습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때문에 늘 다른 삶을 꿈꾸고 추구하려 합니다. 지금보다 나은, 현재보다 우월한 자신의 모습을 위해서 지금을 낭비합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성녀 카타리나는 “시간을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랑도 지금, 즉시 실천해야 하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용서해야 하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열심한 신앙생활을 성경 공부나 신학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분을 봅니다. 물론 틀리지 않고 그릇된 생각도 아닙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온통 자신의 것을 비우고 주님의 것으로 채우는 작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지식’에 불과합니다. 거룩한 삶과는 동떨어져, 허무를 향할 위험이 큽니다. 더해서 거룩한 하느님의 것을 이용하고 소유하려는 유혹에 걸려들 소지도 다분합니다. 심지어 신앙과 기도조차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도구로 오용할 위험이 따릅니다. 지금 제 몸은 깊이 앓으며 우리 영혼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으로도 결코 채울 수 없으며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오직 거룩한 하느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진리를 몸부림치며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스스로의 한계에 주저앉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비록 약하고 모자랄지언정, 주님 안에 머물며 당신의 평화를 누리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그림자에 영혼이 젖어, 자기만족과 자기성취와 자신의 영예를 위해서 쉼 없이 달리고 또 달립니다. 마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주님을 향한 최선인 양, 힘을 소진하는 것이 주님의 기쁨인 줄 오해합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때로 으스댑니다. 이 죄인이 그랬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정열적으로 주님의 뜻을 살아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은 그분께 거룩한 것이었고, 아버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삶에는 지루함도 분주함도 없었고 신경과민도 없었습니다. 자기과시를 위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자화자찬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값지게 살았습니다. 온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삶에서 본받아야 할 모범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오늘 복음으로 선포되는 말씀, 즉 사랑의 도움을 받고 사랑을 나누는 것에도 모두 때가 있다는 진리를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제서야 그분의 멋진 성심을 본받아서 그분의 복음을 살아낼 꿈을 꾸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크신 그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만 제가 가진 힘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야 겨우….

설사 누군가에게 “기름을 나누어다오”라는 어이없는 청을 듣더라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라고 차갑게 대하지 않는 찐 사랑을 살게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용당할 줄 알면서도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예수님처럼, 느닷없이 뒤통수를 맞을지라도 맞서지 않는 아량을 지녀 살 수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삶이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온전히 살아내는 단 하나의 방법이기에, 딴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 합니다.

하여 하루가 저무는 저녁,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가슴을 치며 불순종의 허물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더 자주 그분을 닮으려 애쓴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쫓아, 성인들을 본받아 믿음과 사랑을 살아보니, 정말 좋고 너무 기뻤다는 고백을 올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의 은총에 매료되시어,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1월 13일 (월) [녹]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7,1-6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를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상대적으로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서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4일 (화) [녹]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7,7-10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봉사와 희생을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내리누르며 무시하는 것이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신분 제도가 있던 시대와 달리 종과 주인이 구분되지 않지만, 오히려 돈과 권력과 지위 같은 가치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갑과 을을 나눕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나보다 약한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여도 상관없고, 자신의 욕구 불만이나 짓눌린 감정을 아무런 관련이 없는 힘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분출하거나 화풀이하여도 괜찮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참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승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서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곧 겸손하게 섬기는 종의 자세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5일 (수) [녹]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 시대에 유다 지역에 살던 이들과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 기준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기보다 다른 민족과 섞여 우상 숭배를 일삼는 불경한 이들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사상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 섞여 ‘혼혈’로 살며 이방인들의 종교를 받아들인 사마리아인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나병 환자 가운데 돌아와 하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 이는 사마리아인뿐입니다. 그래서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시듯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데는 출신이나 이해관계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마리아 사람’으로 단정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각자가 만들어 놓은 편협한 기준에 따라, 때때로 집단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 혐오와 경멸과 증오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일상 속 작은 은총에도 감사드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6일 (목)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7,20-25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다룹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 말씀에서 “가운데에”라고 옮긴 그리스 말은 ‘- 안에’, ‘- 속에’, ‘누군가의 깊은 곳에’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풀어 보면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너희 속에, 너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다.’가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내일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점집을 찾고 사주를 보거나, 사적 계시에 집착하거나, 사이비 또는 유사 종교에 빠지는 것은 실제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거짓 위로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격이자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믿음과 신앙은 정확하게 계량하거나 측정할 수 없어, 이를 향한 여정도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 표징이나 확실한 ‘계시’ 또는 강렬한 은사에 목말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목마름을 악용하면서 인류 역사 안에서 이단과 사이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믿음과 희망을 두어야 할 곳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다고 명확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세례성사 때 우리 안에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지금 이 순간도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씨앗은 어느새 싹을 틔우고 훌쩍 자라 있을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7일 (금) [백]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는 남편이 전쟁에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병원을 세워 직접 병자들을 돌보았다. 1231년 스물네 살에 선종한 그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7,26-37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의 표징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시간과 구체적인 장소에 관하여 궁금해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날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므로 일상생활 가운데 종말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종말에 대한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지들을 바라지만,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하십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서(이사 18,6; 34,15-16; 예레 7,33; 12,9; 15,3; 에제 39,17 참조)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하느님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루카 복음서 17장 37절에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는 말씀은 그 누구도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사람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오실지를 예견하느라 일상생활에서 동조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종말을 준비하는 가장 현명하고 슬기로운 방식 가운데 하나는, 오늘 기념하는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의 모습을 본받는 것입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신음하며 아파하는 이웃과 공감하여 주는 것, 그들을 위하여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고 봉사하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 곧 종말을 준비하는 합당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종말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8일 (토)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1-8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요점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청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성경 전통에 따르면, 과부는 사회적 약자를 대표합니다. 한편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마지못하여 들어줍니다. 그는 과부가 자신을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이기심에서 청을 들어줍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이러한데, 하물며 정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시겠는가 하는 것이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바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내가 바라는 때에 이루어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하느님께서는 내가 미리 정하여 놓은 답을 들어주시면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하는 모습도 신앙생활에서 중요하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청원이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맞는지, 내 기도가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수단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성 없이 열심히만 기도하는 것이 최고라고 판단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잘못된 방향과 건강하지 못한 지향으로 무조건 많이 기도할 경우, 정상적인 길에서 더 빨리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 두 가지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첫 번째로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는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정진만 안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주님의 기도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777~2802항)

자신을 알게 하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데이브 아스프리’는 26세에 실리콘 밸리의 한 대기업 전략계획 이사로 선임되어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다 30세 무렵에 그는 몸무게가 140㎏까지 늘어 죽음 직전의 만성피로로 2년 만에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40세 무렵 그는 재기하여 성공한 사업가이자 인기도서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과 자타공인 성공한 인물 450명을 인터뷰하고 쓴 책 「최강의 인생」 서문에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좇는 탐욕, 쾌락, 지배욕 등이 바로 미토콘드리아의 명령에 따라 집착하게 되는 가치라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줄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이 본능을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본능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삼구’(三仇)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삼구는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입니다.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관능적 쾌락, 반이성적 자기주장입니다.(377 참조) 탐욕-성욕-지배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욕구는 ‘에고’(ego), 곧 ‘자아’에서 나옵니다.

자아는 왜 삼구로 우리 발목을 잡을까요? 모든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이 태어나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불안’입니다. 불안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서 옵니다. 자기를 보호해줄 주인이나 어미, 부모를 찾았다면 불안함이 사라집니다. 부모를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참 부모를 찾지 못했다면 자기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소유욕과 식욕(성욕), 권력욕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아가 커집니다. 사실 소유욕은 스스로 주(인)님이 되려는 마음이고, 성욕은 창조자가 되려는 마음이며, 교만은 심판관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망이 삼구인 것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뱀의 “가져라, 먹어라, 하느님처럼 되어라!”라고 하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자기 부모인 하느님을 찾았어야 합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믿었다면 자기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망에 빠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1요한 3,2-3)

우리는 주님의 기도 첫 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통해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2799)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과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2798)되었음을 되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헛된 욕망에서 우리를 씻어줍니다.

부모는 자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가 자라나 자신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뜻을 받아들인 자녀는 부모처럼 되는 것 외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통해 우리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다 아버지 안에서 형제임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이 짧은 기도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면 어린이처럼 순결하고 두려움 없이 되어 형제들과 함께 꾸준히 아버지를 닮아가게 됩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 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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