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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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4호 - 연중 제23주일 / 23-9-10
입력일 : 2023.09.08 19:09:29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9-02.jpg 조회 : 39
충북 진천소재 베티성지내 최양업 신부님 동상



2023년 9월 10일 일요일, 제954호 소식지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요즘

이 시기에 맞추어 많은 분들이 성지순례를 다니고 있습니다.

단장된 성지를 보며

우리의 흐트러진 마음가짐을

다시금 고쳐 잡습니다.

순교성인들의 전구를 청해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9월 10일 (일) [녹]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에제 33,7-9 / 제2독서 로마 13,8-10 / 복음 마태 18,15-20

인내와 기도로 사랑하는 이웃을 바르게 이끕시다

공동체의 진정한 성장·쇄신 위해
정체성 잃고 방황하는 이웃에게
사랑으로 ‘형제적 교정’ 실천해야

이웃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표현, 형제적 교정!

돌아보니 수도공동체에 몸담은 지가 40여 년이 다 되어갑니다. 수련기 때 계획으로는 지금쯤 공동체 생활의 달인이자 친교의 전문가가 되고도 남을 순간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아직도 공동체 생활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아직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보다 공동체가 내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요즘도 이런저런 수도회 회의에 참석하면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가 있습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입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 말은 쉬운데, 정말이지 요원한 과제처럼 느껴집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저희는 또 다시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합니다.

공동체 성장과 쇄신을 위해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따뜻한 형제애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책임자들의 부성애, 그리고 흘러넘치는 일상적 친절과 배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책임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우선적인 역할은 공동체 안에 사랑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늘 예의주시하고 고무하는 역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들을 춤추게 하고 살맛나게 하는 칭찬과 격려도 필요합니다. 끝없는 용서, 한없는 인내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더 가치 있고, 꼭 필요하고, 차원이 다른 사랑의 실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형제적 교정’입니다. 그러나 형제적 교정은 말은 쉬운데, 결코 만만하거나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고도의 조심성과 극도의 예민함, 숙련된 기술과 강도 높은 기도가 전제돼야 합니다.

한 형제가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한 형제의 눈이 뭔가에 잔뜩 씌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본래의 정체성과 사명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래서 증거의 삶은 사라지고 반대 표양이나 손가락질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를 가장 사랑하는 형제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형제라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기를 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아프겠지만, 정확하고 예리한 형제적 교정 작업을 실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척 어려운 작업이기에 적당히 해서는 낭패를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우선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겠지요. 그리고 문제의 핵심과 정확한 현실을 파악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정 작업을 위한 로드맵을 세워야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실효성 있는 교정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형제적 교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인 절차입니다.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평정심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진정한 회개를 비는 마음, 그가 이번 기회에 더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까지 예의와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또한 형제적 교정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단둘’이 만나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에 그의 잘못을 떠벌리고 다니며 소문 다 낸 뒤, 그런 작업은 하나마나입니다. 기도 안에서 조용히 단둘이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 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사회 공동체 안에 아무리 막가는 사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손 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 권고해서 안 된다고 해서 단칼에 그를 매장시키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써보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써보고, 최선을 다한 후에 안 되면 그때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특히 부족한 이웃들 앞에서, 그들의 교정과 성장을 위한 조언의 과정에서, 인내와 겸손, 신중함과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내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혹시라도 형제적 교정이 필요하시다면, 일련의 절차와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팩트 체크가 필요합니다. 괜히 헛소문 듣고 잘못도 아닌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밀어붙인다면, 그것보다 더 큰 낭패가 다시 또 없습니다.

아직도 정말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의 잘못이 확실시되면, 일단 그를 위해 기도를 시작해야겠습니다. 개인적인 기도도 필요하지만, 공동체적인 기도도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 그 효과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금 새롭게 각인시켜주셨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9월 11일 (월)[녹]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6-1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회당 한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여기서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것’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는 행위를 가리키고,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것’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이라서 그를 고쳐 주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해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들에도 좋은 일을 하는데, 거룩한 안식일에는 더더욱 그러한 일, 곧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사람의 안식, 휴식을 위한 날로 제정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지나친 노동에 시달릴 수 있는 이들의 딱한 처지를 고려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휴식할 수 있는 날을 따로 마련하여 주신 것입니다(탈출 20,10-11 참조). 엄격한 규정으로 사람들이 정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하거나,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하는 것이 안식일 법의 본디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한 일이나 생명을 구할 기회가 생기면, 그것을 하는 것이 오히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십니다. “손을 뻗어라.”

우리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 안에도 그 나름의 규정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규를 잘 지키려는 의지와 태도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한 규정의 취지나 목적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그 규정을 올바로 지키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였던 율법 학자들처럼, 단순히 규칙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모습, 또는 규칙이니 무조건 따르라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모습은 경계하여야 합니다. 혹시 맹목적인 ‘율법주의’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12일 (화) [녹]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6,12-19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따로 뽑으시는 장면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뽑으시기 전에 그분께서 보여 주신 행동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당신의 최측근이 될 사람들을 뽑으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조명합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셨고, 그때 성령께서 내리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3,21-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쁜 일정 중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습니다(5,16; 11,1 참조).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의 배경에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9,18 참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도 그분께서는 기도하고 계셨습니다(9,28-29 참조). 수난을 앞두고 올리브산에 가셔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는 중에도(“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23,34]), 심지어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기도하실 필요가 없어 보이는 그 전능하신 분께서 그토록 많은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특히 중대한 일을 앞두시고서는 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도,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도, 붙잡히시기 전에도, 그리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나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하여야 하겠습니까?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중요한 결정을 하여야 할 때,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아버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13일 (수) [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349년 무렵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수덕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며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386년 사제품을 받고, 주로 안티오키아에서 사목하며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개혁하는 데 힘써 좋은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황궁에서 증오를 품고 시기하는 자들에게 밀려나 한두 차례 유배 생활을 하다가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튀르키예)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교리를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 때문에, ‘크리소스토모’(금구, 金口: 황금의 입)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복음묵상]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아홉 가지 행복 선언을 전하는데(5,3-12 참조), 루카 복음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에 이어서 네 가지 불행 선언을 함께 나열합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 선언들 각각은 서로 대칭을 이룹니다. 곧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첫째 선언), 지금 굶주리는 이들과 지금 배부른 이들(둘째 선언), 지금 우는 이들과 지금 웃는 이들(셋째 선언), 그리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들과 환대를 받는 이들(넷째 선언)이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자의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암울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밝은 미래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며 울지만 하느님 나라가 올 때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후자의 사람들을 두고는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누리는 것과 정반대의 암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르며 웃는 사람들은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은 것이며, 하느님 나라가 오면 오히려 굶주리고 슬퍼하며 울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여 모은 재산으로 여유롭게 사는 것, 먹고 싶은 것을 사 먹고 좋아하는 취미나 여가 활동을 즐기면서 그 나름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소소한 행복도 느끼면서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달콤함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곧 지금의 삶에 만족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이 말씀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에게 경고합니다. 이와 비슷한 경고의 말씀도 귀담아들읍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5.16). 현실이 주는 위로가 크면 클수록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위로가 설 자리는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참행복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현세에서 누리는 달콤함과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14일 (목) [홍]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이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이 9월 14일로 고정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제1독서는 민수기의 구리 뱀 이야기를 전합니다.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합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불 뱀들을 보내시어 불평한 자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그러자 백성은 죄를 뉘우치고 구원을 간청합니다. 주님께서는 곧바로 모세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자, 뱀에 물린 사람이 그것을 쳐다보고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구리 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예표였다는 사실이 오늘 복음에서 드러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모세가 들어 올린 구리 뱀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 구리 뱀을 달아 놓은 기둥은 예수님께서 매달리신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구리 뱀이 들어 올려진 것처럼 당신 자신도 그렇게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들어 올려진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쳐다본 사람도 누구나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두 사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뱀은 모세가 구리로 만든 조형물에 지나지 않으나, 골고타에서의 ‘뱀’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셨습니다. 왜 그토록 아끼시는 외아드님을 ‘뱀’으로 내주셔야 하셨을까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십자가는 결국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표지입니다. 그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도록 높이 들어 올려졌습니다. 세상 한가운데 우뚝 솟아 그것을 바라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도 구원의 표징이 매달리신 그 기둥을 바라보며 경배드립시다. 바로 거기에 하느님 사랑이 가득하고, 바로 그곳에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성금요일, ‘십자가를 보여 주는 예식’ 중에서).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15일 (금) [백]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이날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일찍이 시메온은 성모님의 고통을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다.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이 기념일을 옮기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결하여 기억하게 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그 누구보다 깊이 동참하셨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러 성전에 오신 성모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예언에 성모님께서는 어리둥절하셨을 것입니다. ‘분명 가브리엘 천사는 이 아기가 큰 인물이 되고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릴 분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불리리라 말하였는데(1,31-35 참조), 이 사람은 어째서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시메온의 예언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셨고, 그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보셔야 하였던 성모님께서는 마치 ‘칼에 꿰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으셔야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시며 그 고통에 깊이 동참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길에서 넘어지실 때마다 비통하게 우셨고, 그분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는 마치 자신의 몸에 못이 박히듯 아파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하염없이 울고 계시는 성모님, 애간장이 다 녹아내린 그 어머니에게 아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곁에 있던 제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께서 제자들의 어머니, 곧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순간입니다. 아드님의 수난 여정에 동참하신 성모님께서 이제 그분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북돋아 주시는 그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여정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는 여정입니다(9,23 참조).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그 여정에 늘 함께하십니다.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오늘, 당신께서 직접 보고 느끼신 아드님의 상처를 우리 제자들 마음속에도 깊이 새겨 주십사 성모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11절).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16일 (토) [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에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 이단에 맞섰고,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면서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253년 6월 치비타베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갈리스토 묘지에 묻혔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210년 무렵 카르타고의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46년 무렵 체칠리아노 사제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품을 받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모범적인 덕행과 저술로써 교회를 훌륭히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유배당하고, 신임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재판받다가,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6,43-49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평지 설교(6,17-49 참조)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합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부유한 이들의 불행을 선언하셨고(6,20-26 참조), 원수를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하셨으며(6,27-36 참조),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6,37-42 참조). 그리고 설교를 마무리하시는 오늘, 이 모든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시려고 비유를 하나 들어 설명하십니다.

강가에 집을 짓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서 반석을 찾고 그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을 짓습니다. 홍수로 불어난 강물이 들이닥치더라도 단단한 기초 덕분에 그 집은 끄떡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런 기초 공사 없이 맨땅에 집을 짓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여기서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듣지만 행동에 옮기지 않는 자를, 단단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행동에 옮기는 이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듣는 일은 모든 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물과 같은 말씀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남이 나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하여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땅을 깊이 파서 반석을 찾고 그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을 짓는 일은, 사실 대단히 번거롭고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맨땅에 지은 집과도 겉보기에 큰 차이가 없어서 우리는 이 기초 작업을 건너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듭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기초 없는 집이 속절없이 무너지듯, 우리가 듣기만 한 말씀도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바위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을 기억합시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8,13).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기도의 길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673~2682항)

예수님의 가장 큰 약점인 성모 마리아

제목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에게 약점이란 바로 자신에게 큰 은혜를 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은혜를 갚을 줄 압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약점이라는 말은 성모님께서도 예수님께 이미 많은 것을 드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먼저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주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바로 시온의 딸이요, 계약 궤이며,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거처’(묵시 21,3)입니다.”(2676) 이 지상에 하느님이 머무실 깨끗한 땅이 하나도 없었는데 오직 성모님만이 성자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묵을 곳이 아무 데도 없었는데 깨끗한 잠자리를 내어주었다면 누가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당신 인성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신성만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 신성이 인성을 취해야 온전한 인간이 되어 인간이 지은 죄를 대신 보속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오염되지 않은 인성을 지닌 인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성을 내어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그 인성을 나누어줄 때 자녀의 운명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가 아프면 부모도 아픕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도 하느님께 빚이 있지만, 하느님도 성모님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구원 사업에 협조자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자신 있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청하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이제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 안에서 마치 신부(新婦)처럼 취하신 그 인성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675)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 첫 번째 기적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며 거부 의사를 밝히십니다. 성모님은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하고 명령하십니다. 마치 아버지가 말을 듣지 않는 자녀들에게 용돈을 못 주겠다고 하는데 엄마가 “얘들아, 이리 와라. 아빠가 용돈 주신다고 하신다!”라며 아이들을 부른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성모님의 믿음이 드러납니다. 당신은 그러한 청을 할 자격이 있고 또한 예수님은 그러한 당신의 청을 들어주실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 그러한 상황에서 끝까지 청하여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요구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존재는 오직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성모 마리아께서 최고의 약점이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성모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께 청하면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은, 마리아 덕분에, 하느님의 복 그 자체이신 분을 받아 모십니다.”(2676)

담보가 없는 상황에서 큰돈을 빌리려면 보증인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보증인은 은행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러한 보증인이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이러한 분이 우리 어머니로 계시는데 그분을 통하여 주님께 청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마리아께 기도할 수 있고”, “마리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2679) 성모님은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게 하는 가장 완전한 길이십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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