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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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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8호 -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 21-11-7
입력일 : 2021.11.08 17:32:34
작성자 : 성물방 File : 21-11-01.jpg 조회 : 276
용문성당 성모상

2021년 11월 7일 일요일, 제858호 소식지입니다.



요즘 길가의 가로수들이 여러가지 색상으로 물들고

바람에 따라 흩날리고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올 한해를 정리할 준비를 해야 겠습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1월 7(일) [녹]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제1독서(1열왕 17,10-16) 제2독서(히브 9,24-28) 복음(마르 12,38-44)
가난한 과부의 아낌없는 마음

부자들이 헌금하는 ‘큰돈’보다는 어려운 이들의 정성이 더욱 소중
교만과 위선의 행실을 떨쳐버리고 주님의 은총 깨닫고 자선 베풀길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한 주 앞둔 연중 제32주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와 성사를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가난한 과부의 진실한 믿음과 아낌없는 사랑을 봅니다. 우리의 자발적 희생과 봉사하는 삶이 성령의 도움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기원전 9세기)는 바알(Baal) 신을 섬겨 하느님을 거스른 아합왕에게 극심한 가뭄을 예언합니다. 그는 요르단강 동쪽 크릿 냇가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까마귀가 날라주는 빵과 고기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1열왕 17,1-7). 냇물이 마르자 주님 말씀대로 사렙타(시돈의 남쪽)로 가서 땔감을 줍고 있는 한 과부에게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제1독서)

가뭄으로 기근이 들어 굶주린 과부는 단지에 남은 밀가루 한 줌과 병에 조금 남은 기름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 했다가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진 것을 모두 바칩니다. 엘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간절한 기도는 밀가루 단지가 비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신뢰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십자가 희생제물로 바치신 뒤, 말씀대로 부활하시어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제2독서) 사람은 누구나 단 한 번 죽음을 맞습니다. 지상 여정의 끝인 죽음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소명을 다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자비를 누리는 시간의 끝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합니다.

영원한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참 사제가 된 신부는 축성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신자를 사목하며, 성사를 집전하고 주님의 신비를 베푸는 사제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신자의 예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에 결합해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하느님께 감사 제사를 올립니다.

평신도는 사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삶으로 주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은총과 성령의 친교 속에 가난한 마음으로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들은 기도와 성사로 주님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사도직을 수행하며 성덕의 길로 나아갑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학자들은 모세율법의 전문가로 산헤드린의 구성원이고, 하느님 말씀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가르치기에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학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마르 12,38)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긴 겉옷을 입고,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모임 때 윗자리를 차지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는 그들의 교만과 위선의 행실을 따르면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보십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습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화폐가 유통되던 당시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으로 노동자 하루 임금의 백분지 일에 불과합니다. 부자들이 넣는 큰돈은 여분의 돈이지만 과부의 것은 생활비 전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율법학자들은 성전헌금이 가난한 이들에게 재분배된다고 가르칩니다. 눈에 띄는 그들의 긴 겉옷과 연회를 보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모습입니다.”(마르 12,40) 풍족한 데서 얼마씩 기부하는 부자나 율법학자에게 동전 두 닢은 보잘것없지만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주님께 바치는 모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이 과부보다 더 봉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성 아우구스티노)

생계의 바탕인 남편을 잃은 과부는 가난하고 무력합니다. 상속에서도 제외되어 있기에 아들이 없으면 친정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레위 22,13; 룻기 1,8)입니다. 매일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그녀가 소유한 전부를 바치고 빈손으로 살아가는 과부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빛입니다.

가난한 과부와는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내놓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아낌없는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소중히 간직한 것을 정성껏 봉헌하면서 ‘가난의 찬미가’를 불러보면 어떨까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은 사랑입니다. 그들을 돌봐주는 자선은 주님께 베푼 것이기에 교회의 변함없는 전통입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오?” 성령의 감도인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을 가꾸어 나가는 그리스도인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등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자비하신 주님, 저희의 행실이 율법학자들의 모습으로 보일 때, 그것은 제자의 길이 아님을 일러주소서. 저희가 사랑 없이 가진 것을 봉헌하기보다 사랑을 체험하고 감사하는 비움의 은총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1년 11월 8일 (월) [녹]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7,1-6

많은 이의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내 선택과 결정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내 아집과 욕심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 오만인 줄은 압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책임자인 사제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이 있겠지만, 그 ‘옳음’ 때문에 공동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 옳음은 아마도 ‘그른 것’일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사제는 공동체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생각은 “비뚤어진 생각”이며 “미련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공동체가 분열하여 그 구성원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거나 서로 미워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제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청원이 바로 저의 청원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에서 비롯된 굴레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하여 한 발짝 물러서는 용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자매를 걸고 바다로 내던져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9일 (화) [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낸다.

[복음묵상] 요한 2,13-22

유학 시절, 이웃 나라인 이탈리아의 로마를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신학생으로서 로마의 4대 대성전은 방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혼자서 로마를 돌아다녔습니다. 먼저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라테라노 대성전도 방문하였는데, 대성전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던 조그만 성당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대성전 주변에 있는 ‘성 계단 성당’(Scala Sancta)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오르셨던 총독 관저의 대리석 계단이 있습니다. 나무 덮개로 씌워진 계단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한 계단, 한 계단 무릎으로 오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덮어 씌운 나무판자는 움푹 파이고 낡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계단을 올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판자 위에 무릎을 꿇고 이 계단을 오르셨던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그려 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쏟아졌던 모욕과 조롱,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야유와 배신,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며 도망친 비겁함과 침묵, 채찍 자국이 그대로 남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몸 ……. 스물여덟 층의 계단에는 그렇게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묻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성전을 단순한 건축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희생되신 당신의 몸이며 못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당신의 손이며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당신을 내어 주신 희생과 나눔이 바로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위하여 스스로 죽어 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욕심을 버리고 희생하고 나누며 살아갈 때, 바로 그곳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 됩니다.

영성체를 통하여 그 사랑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는, 나를 통해서 다른 이들 또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성전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한 계단씩 오르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오늘 누군가의 성전이 되어 주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0일 (수) [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7,11-19

하느님께 정말 간절히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하고 갖은 노력을 다하여 보지만 일은 점점 더 꼬여 가고,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러한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을 바라며 하루하루 가슴을 졸입니다. 어떤 이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적을 체험하였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 또다시 기적을 바라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저주받은 이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사람들의 만류에도 목청 높여 예수님을 부릅니다. 가엾은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기뻤을 것입니다. 행복하고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분 주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 환자는 또 다른 기적을 바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는 기적을 일으켜 주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의 순간은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의지하고 떠나지 않을 때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그 간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그 응답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절망의 순간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께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여 주십니다. 그것을 믿는 순간, 하느님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1일 (목) [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성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7,20-25

불교에서 선승들이 주고받는 문답을 ‘선문답’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깨친 스승에게 제자가 질문을 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대화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두 사람 각자의 혼잣말 같기도 합니다. 질문을 통하여 진리를 깨치지 못한 이를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선문답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시기를 여쭈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기가 아니라 그 “모습”에 대하여 답을 하십니다. “여기”, “저기”, “우리 가운데”라고 공간을 이야기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의 아들”의 날에 대하여 설명하시며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 안에서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면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데, 과연 어디에 있는가?’

혼자서는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을 되뇌어 봅니다. 그리고 고민해 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는 누구를 말하고 있을까요? 나는 어떤 사람들을 ‘우리’라고 말하고 있나요? 너무 쉽게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 하느님, 우리 성당, 우리 공동체, 우리 가족, 우리 부모님, 우리 친구 ……. ‘나’를 포함한 ‘우리’이기는 하지만, ‘나’라는 말을 대신하여 ‘우리’라는 말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요? 어째서 일까요? 어쩌면 나와 너,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되는 순간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때가 아닐까요! 나만을 생각하던 그 삶의 공간이 ‘우리’를 먼저 생각하여 행동하는 공간으로 바뀔 때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가 아닐까요!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2일 (금) [홍]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성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7,26-37

얼마 전 ‘섬뜩한 오늘?’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글에서는 하느님께서 ‘오늘’이라는 일상의 삶 안에 찾아오실 때마다, 인간은 엇갈리게 행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일지 모릅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현재는 지나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이라는 시간은 해가 뜨고 지고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발생하는 변화의 측정 단위로서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으로, 순간의 선택을 통하여 삶의 방향이 바뀌는 기회의 때이며 결단의 때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해는 중천에 떠 있고 달력은 아직 넘어가지 않은 오늘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일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롯 시대에 소돔이 멸망하던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인 오늘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롯만이 ‘오늘’이라는 일상이 아닌 ‘오늘’이라는 마지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물리적 시간인 ‘오늘’이 아닌 변화와 결단의 때인 ‘오늘’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섬뜩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또한 내가 변화하고 회개한 때의 시작점인 것처럼 일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13일 (토) [녹]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1-8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서로 논의해서 역할을 나누고 같은 목표를 보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팀(team)이며 공동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각자의 목표보다는 전체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신뢰, 그 목표를 향하여 각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자신을 이용해서 다른 이의 목표와 욕심을 채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마련이며, 그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믿지 못하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습니다. 어른은 잔소리나 하는 꼰대이며 아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일 뿐입니다. 국민은 정치인을 믿지 못합니다.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법은 나에게만 불평등합니다. 서로 의심하는 사회, 모두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공동체, 상대를 누르지 못하면 패배하고 낙오된다는 시대의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과 신뢰, 신앙은 어디 있을까요?

믿는 사람,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까? 하느님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하느님의 법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습니까?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청을 드립니까? 하느님의 가치는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기도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기도이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기도이며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기도는 아닙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가치로 하느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고해성사 ⑨

고해성사는 ‘공동 고백’보다 ‘개별 고백’을 지향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80~1498항
개별 고해가 일반적인 방식
죄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통해 용서의 은총 깊게 느낄 수 있어

고해성사의 형식은 크게 ‘개별 고백’과 ‘공동 고백’이 있습니다. 공동 고백은 “중대한 필요가 있을 때 일괄적으로 고백하고 일괄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는”(1483) 형식입니다. ‘중대한 필요’란 곧 전투에 나가야 하는 군인들, 바이러스 범유행처럼 대면 고해가 어려운 상황, 고백자의 수보다 사제의 수가 턱없이 부족할 경우 등입니다.

하지만 공동 고해가 일반화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공동 고해를 할 때도 “사죄가 유효하려면 신자들이 적절한 때에 자신들의 대죄를 고백하겠다는 의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1483) 물론, 공동 고해는 교회의 공적 전례 행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고해성사 형식은 “하느님과 교회와 화해하는 유일한 일반적 방식”(1484)인 ‘개별 고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1484) 곧, 용서의 대상은 “너희”가 아니라 개별적인 “너”입니다.

하와가 죄를 짓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죄책감을 분산시킬 대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그 벌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 아담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공범을 만들면 죄의 무게가 경감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개별적으로 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죄를 지었을 때 한꺼번에 와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것보다는 개별적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더 기쁘지 않겠습니까? 또 그런 개별적인 고백이 본인을 위해서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성체도 한꺼번에 여러 명에게 분배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처럼 궁극적인 관계의 기본은 1:1입니다.

‘임종몽’이란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내과 전문의 크리스토퍼 커는 1400명이 넘는 환자와 10년 동안의 인터뷰를 정리해 「누구나 죽기 전에 꿈을 꾼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커는 호스피스 병동 전문의를 하며 임종 직전의 환자 대부분이 꿈이나 환시를 체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마지막 꿈으로 개별적인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대부분 꿈은 그 사람이 알았던 사람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런 꿈은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보통은 처음에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는 마치 “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했느냐? 그리고 내세에서 만날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69세의 전직 경찰관 에디도 임종몽을 꾸었습니다. 처음엔 에디에게 먼저 죽은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에디는 자신이 아내를 만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아내도 자신을 만나기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에디는 사실 생전의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했었습니다.

그 다음은 경찰직을 수행할 때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의 기억들이 나타났습니다. 때리고 고문하고 부정한 돈을 받아가며 방탕하게 살았던 잊고 싶은 기억들이 잔인하게 꿈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디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에디는 사제를 불러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어차피 혼자 가야 하는 길입니다. 사실 에디가 그런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어렸을 때 삼촌에게 성추행을 당한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몇 번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주님은 변화될 기회를 주십니다. 에디는 이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에디가 모든 부끄러운 죄를 다 고해한 뒤, 딸에게 “그래, 이제 마음이 편안하다. 아빠가 천국에 바로 갈 수는 없을지라도 연옥에는 갈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아빠를 기다리고 있대”라며 새로운 꿈을 꾸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개별 고백은 하느님에 대한 화해와 교회에 대한 화해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형식”(1484)입니다. 형제가 밥을 먹는다고 내 배가 부르지 않고, 아들이 포도를 먹었다고 아버지의 입에서 신맛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죄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몫이고 개인의 책임입니다. 물론 개별 고해는 공동 고해보다 부담스럽고 힘들지만, 분명 죄에 대한 온전한 책임을 지려 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보장합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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