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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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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7호 - 연중 제31주일 / 21-10-31
입력일 : 2021.10.29 20:29:30
작성자 : 성물방 File : 21-10-05.jpg 조회 : 531
용문성당 언덕위의 십자가


2021년 10월 31일 일요일, 제857호 소식지입니다.




점차 나뭇잎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침 저녁의 쌀쌀함이 가을인 듯 하지만

한 낮의 더위는 아직 여름이 입니다.

11월을 맞이는 오늘

위령의 달에 그동안의 삶을 뒤돌아 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31(일) [녹]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신명 6,2-6) 제2독서(히브 7,23-28) 복음(마르 12,28ㄱㄷ-34)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 최종 목표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는 하느님 사랑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
나를 돌아보고 이웃 위해 살아가길

그 모든 것이 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수도자로 양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몇 가지 작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적자서전’입니다. 지금까지의 내 삶 안에서 펼쳐져왔던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것입니다. 영적자서전을 다 쓰고 난 한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돌아보니 굽이굽이 어느 한곳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오로지 그분 사랑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 형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저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내 인생은 오로지 나의 역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인생은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느님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철저하게도 부족한 나, 정말 보잘 것 없는 나, 쥐뿔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 너무도 부당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신 하느님 사랑의 역사가 제 지난 삶이었습니다. 그분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그분 연민의 눈길이 아니었더라면, 그분 사랑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단 한 순간도 서있을 수 없었던 날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일생일대의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우리를 향한 그분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해보는 일입니다. 그분을 좀 더 알고 이해한 만큼 우리는 그분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정체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더 한층 깊어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을 파악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사랑이 용광로보다 더 뜨겁고 강렬합니다. 때로 너무나 절절합니다. 때로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때로 필요한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차가운 사랑, 냉정한 사랑도 보내십니다. 때로 우리가 교만의 늪에 빠져있을 때, 때로 우리가 착각 속에 기고만장해있을 때, 때로 우리가 나태해져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고통이라는 사랑의 매를 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다양한 순간들이 우리 삶을 스쳐지나갑니다. 성공의 순간, 기쁨의 순간, 환희의 순간…. 그러나 때로 실패의 순간,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했었습니다. 그 모든 국면들은 다 하느님 사랑의 발로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결국 사랑이 전부입니다.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야 사랑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사랑은 이팔청춘 때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서른 안팎까지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것은 너무나도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아무리 인생의 막장 앞에 설지라도, 그럴수록 사랑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랑은 목숨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것이더군요. 이 세상에 사랑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만사가 잘 풀릴 때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꼬이고 꼬인 인생길을 걸어갈 때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랑은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지긋지긋한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랑하면 만사가 ‘OK’인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늘 기쁨과 감미로움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면 향기로운 장미꽃 길만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됐습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고통의 길을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희생을 각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12,29-31)

결국 사랑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 인생의 전부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생문제의 해답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최종 기착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시절입니다. 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라도 내 그릇된 언행, 부족한 사고, 빈약한 가치관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좀 더 사랑스런 존재,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로 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1년 11월 1일 (월) [백]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별도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기리는 날이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된 이 축일은 609년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5월 13일에 지내던 이 축일을 9세기 중엽 11월 1일로 변경하였다.
교회는 이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지상의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깨우쳐 준다.

[복음묵상] 마태오 5,1-12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때도, 좌절과 실패를 맛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그때의 일들을 다시 생각해 보니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기에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것 아닐까요? 당시에는 사랑보다 아픔과 고통이 더 크게 보여 실망하고 슬퍼하였지만, 시간이 지나 사랑만이 자리한 그 흔적은 아름다움과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것에 전전긍긍하며 아등바등 살아갈까요? 어째서 내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도 없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는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가득한 자신만을 보며 살아갈까요? 시간이 지나면 그때 그 일들이 바로 사랑했던 순간이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행복 선언을 통해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 갚아 주신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아픔을 겪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임을, 아픔보다는 사랑으로 행복해짐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위한 사랑과 희생으로,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고 행복해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외로움의 순간에도, 고통과 아픔, 희생의 순간에도, 그 순간순간이 모두 사랑의 때임을,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순간임을 느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여러분도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 성인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2일 (화)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5,1-12ㄴ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에서 ‘과거의 오늘’이라고 하여 몇 년 전에 찍었던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웃는 얼굴들 사이에서 갑자기 하느님의 곁으로 가신 분이 보였습니다. 함께 만날 수도,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도 없는 지금이 왠지 미안해졌습니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내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외면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감사했습니다. 그런 저를 사제로, 동료로, 동행자로, 그리고 친구로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안타까움과 미안함과 감사함에 그분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의 가난했던 마음을, 그의 슬픔과 아픔을, 그의 부드럽고 따뜻했던 마음을, 그의 간절했던 호소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를 위하여 많은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였지만, 그래서 나보다 더 눈물 흘리고 아파하였지만, 그럼에도 행복해하였음을 깨닫고 감사해하며 미안해하는 것이 그리움입니다. 저는 지금 그 사람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런 그리움을 더욱 많이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의 삶에서, 나의 지난 시간 속에서 그 그리운 모습들을 추억합니다.

또한 오늘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그들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더라도, 그들이 나를 외면하고 멀리하여도 그들에게 그리움이 되어 주고자 더욱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들의 그리움이 될 수 있어 지금 행복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3일 (수) [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4,25-33

우리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니다. 때로는 그 여정이 힘들어 쓰러지고 넘어지지만, 다시 일어나 우뚝 섭니다. 너무 힘이 들 때는 잠시 길에서 벗어나 쉬어 가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목표가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처음 가졌던 확실한 목표가 보이지 않고, 곧게 뻗어 있는 것만 같았던 길은 구불구불한 오르막입니다. 갈림길이 나오면, 후회할지 모를 선택을 해야만 하기도 합니다.

많은 군중 또한 길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목표를 바라보며 그분을 따라온 것이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가족을 미워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입니다. 설레고 감동받았던 처음의 마음은 의심과 불신으로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희망의 길이었던 그 여정이, 이제 두려움과 아픔의 여정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할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걸어가는 좀 더 편해 보이는 길을 가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잠시 쉬라고 하십니다. 갈림길 앞에서 “먼저 앉아서” 우리가 걸어온 그 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여정 안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예수님께 집중하였는지, 혹시 다른 것에 눈을 돌리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그런 나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함께 들어 주셨는지, 그리고 내 욕심을 채우고자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그런 고민들은 보이지 않던 희망을 점차 뚜렷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길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시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4일 (목)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1538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오 4세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5,1-10

오늘의 묵상 크게 기뻐하고 웃어 본 때가 언제인가요? 화를 내고 짜증을 부렸던 순간은 기억나지만 기뻐하고 크게 웃었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복잡하게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기쁨과 행복에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마음보다, 나한테는 왜 그런 기회와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지 비교하게 됩니다. 때로는 식탁에서 ‘아재 개그’를 하는 선배 신부님의 천진함이 부럽기도 합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웃으며,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기뻐하셨을까요?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바라보시며 기뻐하셨을까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며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잃었던 양 한 마리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기쁨을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잃었던 양과 은전은 바로 우리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우리, 자신의 고집과 욕심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우리,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않고 잊고 살았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가 되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 안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예수님의 꿈 안으로 회개하여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온 우리를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의 회개와 용서에 어떻게 반응하였나요? 시기와 질투로,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지는 않았나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또한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에 우리도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쁨을 맞이하기를 빕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5일 (금) [녹]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8

“무엇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한동안 제가 가졌던 묵상거리입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나누며 하루를 살아가자고 다짐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고, 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열정, 시간, 미소, 마음, 그리고 사랑 ……. 물론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정기적으로 후원을 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며 다른 이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성경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위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감해 주며 대화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성체 앞에 앉아 반성할 때면, 사제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그들을 만났고 내 명예를 높이고자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나눔에 대한 다짐은 언제나 저의 부족함을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기적인 의도와 욕심으로 하루를 살아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선행이나 봉사, 나눔이라 하더라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비뚤어진 의도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약은 집사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인심을 얻고자 문서를 조작하고 주인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주인의 반응이 더욱 놀랍습니다. 주인은 어떤 생각으로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을까요?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손해 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주인에게는 자신의 손해보다는, 빚을 진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은 풍족해지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불의한 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는 어쩌면 주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이 타인에게 나눔의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의도와 욕심은 분명 잘못이지만, 더 나쁜 것은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일입니다. 좋은 의도와 자비의 마음으로 나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보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나누며 살았습니까?
(최종훈 토마스 신부)


2021년 11월 6일 (토) [녹]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6,9ㄴ-15

신학교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공부’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수업이나 시험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시험은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교수 신부님께서 칠판에 몇 자 되지 않는 문제를 적고 강의실을 나가시면, 그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이해한 것을 논리적으로 풀어 쓰는 논술 시험입니다. 이러한 시험을 한 번도 치러 본 적이 없었던 저로서는 우리가 주로 쓰는 ‘A4’ 용지의 두 배나 되는 ‘A3’ 크기의 광활한 답안지를 보며 한숨만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받아 본 성적표에 등수가 적혀 있지 않은 것 또한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등수만 보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배웠는지, 배운 것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정답을 얼마나 더 많이 맞추었는지가 더욱 중요하였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몸으로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교와 경쟁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내가 살아남으려면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때로는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 어디서든 그것을 성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성공을 통하여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쌓아 더 누리고 더 지배하며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교와 경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감’을 이야기하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누군가를 이기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는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나누어 친구를 만들라고 하십니다.

경쟁과 비교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 가운데에서도, 친구를 만들어 가며 살아야 합니다. 짓밟고 일어서기보다 넘어진 이를 일으켜 주는 삶, 빼앗기보다는 빼앗긴 아픔에 함께해 주는 삶, 남기고 쌓아 놓은 것에 기뻐하기보다는 나누고 함께 배부름에 기뻐하는 삶이 더 많은 친구를 만들어 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고해성사 ⑧

잠벌(暫罰)은 보복이 아닌 하느님 자비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71~1479항
고해성사 해도 받아야 할 ‘잠벌’ 죄의 용서와 별도로 벌은 남아
죄의 고통 깨달아 참회 이끌고 새로 태어나게 돕는 은총의 도구

하느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죄에 합당한 벌도 반드시 주십니다. 이 때문에 고해성사 때 ‘보속’(補贖)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자칫 잠벌에 대한 보속 때문에 하느님을 계산적이고 자비롭지 못한 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있다면 벌을 주는 것도 자비의 방법이 됩니다.

다윗이 한번은 병적 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골리앗을 이기게 해주신 분이 하느님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군인이 몇 명이 되는지 계산해보겠다는 말은 이제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겠다는 교만의 죄가 됩니다.

다윗은 이 죄를 뉘우치고 병적 조사를 한 것을 후회합니다.(2사무 24장 참조) 하지만 하느님은 죄는 용서하시지만, 벌은 거두지 않으십니다. 벌을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삼 년의 기근, 원수에게 석 달 동안 쫓기는 것,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도는 것 중에 선택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짧은 것을 선택했고 그 전염병으로 장정 7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도 ‘그제야’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그전의 잘못을 뉘우친 것과 분명 다릅니다. 그는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2사무 24,17)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일이 조금은 지나치다 여겼는지 자신은 아들에게 더욱 자비로운 자세를 취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동생 타마르를 능욕한 배다른 형제 암논을 살해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벌은 조금만 주고 자비롭게 압살롬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자신을 바로 용서하지 않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궁궐에서 나와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2사무 13-15장 참조)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함으로써 더 큰 아픔을 겪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자비를 베푼 결과입니다. 누군가의 자비가 죄지은 사람이 깊이 뉘우칠 기회를 빼앗는다면 더 큰 죄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해도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시적인 벌”(1471), 곧 잠벌(暫罰)이 남습니다. 잠벌은 하느님께서 죄의 고통을 깨닫게 만들어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못하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만약 당사자가 잠벌을 다 감당할 수 없을 때는 대신 잠벌을 채워줄 사람도 필요합니다. 희생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의 죄 대신 7만 명의 군사가 죽었지만, 우리의 죄 대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죄의 크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희생하여 또 누군가의 잠벌을 사해주고 그래서 그 사람이 “불건전한 집착”(1472)에서 벗어나 “묵은 인간”에서 “새로운 인간”(1473)으로 태어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면 그 희생은 하늘에서 반드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에 참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공’(通功)이라 하는데, 나의 죄가 다른 이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나의 공로도 누군가에게 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1475 참조)

교회는 이런 성인들의 희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무한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피의 공로를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교회가 이런 공로를 통해 잠벌을 사해주는 것을 ‘대사’(大赦, indulgentia)라 합니다. 교회는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해서 쓰도록 ‘모든 잠벌을 사해주는 전대사(全大赦)’나 ‘부분적으로 사해주는 한대사(限大赦)’를 줍니다.(1479 참조) 하지만 이런 대사가 잠벌의 효과를 감소시키지 않게 또 다른 희생이나 봉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이런 봉헌이 ‘면죄부’란 오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나의 죄와 이웃의 죄를 위한 희생은 잠벌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위한 죄의 보속을 위해 희생을 봉헌함으로써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동참하고 그 공로의 나눔을 통해 교회 일치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며 잠벌을 남겨두시는 이유는 자신의 회개를 위해서건 나눔의 사랑실천을 위해서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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