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시기    아기 예수님의 다시오심을 기다립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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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6호 - 연중 제30주일 / 21-10-24
입력일 : 2021.10.29 19:00:39
작성자 : 성물방 File : 21-10-04.jpg 조회 : 447
서소문 성지 박물관 입구

2021년 10월 24일 일요일, 제856호 소식지입니다.


서소문 성지 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새롭게 단장되면서 많은 역사적인 귀중한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신앙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보며 얼마나 간절했는 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1년 10월 24(일) [녹] 연중 제30주일, 전교주일

제1독서 (이사 2,1-5) 제2독서 (로마 10,9-18) 복음 (마태 28,16-20)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때로는 순수한 신앙 살아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주기도 하지만
세상에 가득한 악과 모순 이겨내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격 지니고 선교 사명 용기있게 펼쳐가길

저는 지금 전교 주일을 맞이하는 마음이 이리도 적적하고 외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해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는데 그때는 오직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서 모든 행사를 접는 것도 어떤 모임도 삼가는 것도 최선이라 여겼기에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은둔을 강요받고 칩거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과연 전교가 가능한 것인지, 회의감이 듭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흐릿해진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꺾이는 느낌입니다. 묵주기도를 바쳐도 뒤엉킨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교황님의 책을 꺼냈습니다. “복음화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 세상에 현존하게 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76항) 이 단순한 문장을 읽는데 확, 숨통이 트였습니다. 주님의 뜻인 선교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기쁘게 살아내는 것이라는 이르심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선교를 위해서는 내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전달하는 것임을 다시 새기며 정녕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동안 제 골머리를 썩이던 숫자의 부질없음이야말로 진리를 잊고 전전긍긍하는 어리석음이었음을 통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전교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인지 물으신 적이 없고 어떤 실적을 쌓았는지 따지지 않으신다는 걸, 어찌 잊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오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명확히 일러줍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 복된 예언을 전하며 벅차올랐을 예언자의 마음이 전이되는 듯, 그 감격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진심으로 고맙고 행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현실이 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에 배어 있는 절절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살아낸 확신에 찬 믿음의 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입니다. 하여 세상의 극심한 악과 모순 속에서도 하느님의 선과 자비가 승리하고 있음을 체험하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의 관습과 전통과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선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갖은 원의와 갈망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순수한 신앙을 살아내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와 뒤섞인 ‘자기만의 복음’에 잠식하여 주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기도 합니다. 결국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서로 부딪치며 상처를 주고받으며 허비하고 헤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은 결코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해됩니다. 무작정 사랑하는 일에 초능력을 지니지도 못했기에 비난할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타인을 당신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우리 안에 심어주신 사랑을 발견하여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반목과 대립이 만연한 세상을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해주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신의 사람인 까닭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온전하고 완벽한 사랑의 방법을 반복하여 알려 주고 계십니다. 어두워 앞이 아득해진 세상에 빛이신 주님을 품고 나아가라 하십니다. 하느님 자녀의 긍지를 당신의 빛 안에서 당당히 살아내라 하십니다. 낮아지고 작아지며 더 내어줌으로 주님의 빛이 되라 하십니다. 약속해주신 복된 평화를 온전히 누림으로써 이웃을 감동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한 땅에서의 사명을 완수하시고 당신의 지상명령을 선포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이 막중한 사명에 겁을 먹는 우리에게 든든한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진리이신 주님의 약속이 이리 선명하니 겁내지 맙시다. 하느님 자녀의 품격을 지니고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갈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내가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꼭 그리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 곁에 계신 주님을 가로막지 말고 주님께서 이루시도록 길을 비켜드립시다.

“주님께서 싸워주실 터이니, 너희는 잠자코 있기만 하여라”(탈출 14,14)는 당부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매일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서 온 세상에 주님의 자비를 채워주시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정의를 제대로 인식하는 은혜를 주시길 성모님께 청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모 어머니처럼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직 서로 더 사랑하기 위해서 ‘다투는’ 축복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이 주님의 빛으로 환해지기를, 복된 묵주기도 성월의 은총에 기대어 소원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1년 10월 25일 (월)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0-17

도대체 안식일이 어떠한 날이기에 회당장은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인이 치유되고 건강해지는 일로 분개하기까지 하였는지 묻게 됩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일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쉬는 날’입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하는 곳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대목입니다(2,1-3 참조). 창세기가 전해 주는 안식일은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진 날입니다. 엿새 동안 창조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 곧 안식일에 비로소 창조가 완성됩니다. 또한 이날은 하느님께서 복을 내리신 날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는 날이며,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날은 거룩한 날이 됩니다. 안식일은 그렇게 다른 날들과 구별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고 쉬셨기 때문에, 쉬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여인이 치유된 일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좋은 상황으로 옮겨 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상황으로 바뀐 것, 곧 창조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여인은 예수님의 치유로 하느님의 복을 가득 받아 거룩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에 그녀는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의 치유 이야기는 안식일이 품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풍요롭게 만든 것이지, 안식일의 의미를 훼손한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에 분개한 회당장에게는, 안식일은 ‘쉬는 날’이었을 뿐 하느님께 축복받은 거룩한 날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안식일은 예수님의 부활로써, 주님의 날, 곧 ‘주일’의 기원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날’을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요. 그저 ‘쉬는 날’로 주일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눈은 회당장의 그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6일 (화) [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8-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맨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작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닌 힘까지 작은 것은 아닙니다. 작은 씨앗이 나무가 되고, 또 누룩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가 지닌 역동성을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고 누룩이 부풀어 오르려면, 겨자씨를 땅에 심고, 누룩을 밀가루 속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이 지닌 역동성이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홀로 만들어 가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당신 나라를 완성하시는 데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건설과 완성을 위하여 오늘도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십니다. 겨자씨와 누룩에 역동성을 부여하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씨앗이 심어지지 않고 누룩이 밀가루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이 지닌 역동성은 결코 발휘될 수 없습니다. 부족한 신앙을 지녔지만, 하느님보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을 더 따르고 싶은 우리지만, 그런 우리의 손길을 하느님께서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꿈과 희망입니다. 그분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보잘것없는 힘이라도 보태고자 노력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세워지고,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7일 (수) [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3,22-30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들려줍니다. 구원받을 사람이 적은지에 관한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우리말 ‘힘쓰다’로 번역되는 이 낱말은,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투쟁하다’라는 뜻으로, 훨씬 강한 어감을 지닙니다. 곧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며 적당히 노력하는 태도는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닫힌 문을 보게 하리라고 경고합니다.

또한 닫힌 문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 함께 먹은 것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자기 진술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저 예수님 앞에 머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당에 간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자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과 싸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초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눈과 귀가 조금씩 주님께 향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8일 (목) [홍]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시몬 성인과 유다 성인은 열두 사도의 일원이다. 시몬 사도는 카나 출신으로 열혈당원이었다가 제자로 선택되었다. 그는 주로 페르시아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다 사도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구별하여 ‘타대오’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약 성경』의 유다 서간 저자인 그는 유다 지역에서 선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도는 예수님의 친척일 가능성도 있다. 예수님의 형제가 언급되는 복음 구절에 같은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마태 13,55)

[복음묵상] 루카 6,12-19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 일생을 바친 두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이 걸어간 여정은 예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됩니다. 그들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은 복음에 자주 등장하기에 그다지 낯선 장면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실 뿐 아니라, 밤을 새워 기도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시는 순간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일치하는 가운데 그 일을 진행하십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귀한 마음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을 위한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간 이들이 바로 사도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이천 년 전 열두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준비와 응답을 기다리시며 우리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함,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기 전에 보여 주신 간절한 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29일 (금) [녹]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6

월요일에 이어 다시 안식일이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시작과 함께 두 가지 낯선 설정을 제시합니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율법 교사와 바리사이들의 행동이 묘사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식사 자리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위계질서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식사 자리에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병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그날은 주중의 다른 식사와는 구분되는 안식일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이 두 가지 설정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질문하시며, 그들의 계략을 무력하게 만드십니다.

비록 그들의 침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지만,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이라는 주님의 거룩한 날과 수종을 앓고 있는 병자를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도구로 삼는 모습이 참으로 무섭게 다가옵니다. 안식일이 지닌 참된 의미는 보지 못한 채,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은 생각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계명과 고통받는 이웃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그들의 폭력성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지키는 계명과 의무가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면, 생명의 법이 나만을 위하거나, 누군가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지켜야 하는 계명보다, 그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2021년 10월 30일 (토) [녹]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7-11

‘윗자리’와 ‘끝자리’, ‘영광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이루는 강한 대조가 오늘 복음을 이끌어 갑니다. 흥미로운 것은 윗자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부끄럽게 되고, 끝자리를 찾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논리에서는 윗자리가 영광을 주고, 끝자리는 부끄러움을 준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당연하고 자명한 논리를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세상 논리와 예수님 말씀이 충돌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고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을지 묻게 됩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초대한 이에게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게.”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밀려나더라도, 또다시 윗자리를 고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 논리를 더 익숙하고 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의 옷을, 예수님 말씀의 옷으로 갈아입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부끄러움이 아닌 영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요 선물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고해성사 ⑦

고해성사는 관계회복의 열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68~1470항
모든 사람이 양심 가지고 있기에 죄 지은 후엔 ‘양심의 가책’ 느껴
남탓·자책으론 문제 해결 못해 고해성사 통해 가책 덜어내야

고해성사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효과는 무엇일까요? ‘관계회복’입니다. 교리서는 고해성사의 효과가 “하느님과 이루는 화해”(1468), 그리고 자연과 이웃을 포함한 “교회와 화해”(1469)로 나타난다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이웃, 자연과의 친교와 일치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죄가 관계를 단절시키는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어서입니다. 게다가 원죄까지 입고 태어납니다. 모든 인간은 죄책감의 노예란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삽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일으키는 것이 관계의 분열입니다.

우리에겐 양심의 가책을 인정하지 않든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해결하든가,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우선 양심의 가책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도 모르게 ‘자기합리화’의 길로 빠집니다. 대표적인 자기합리화가 ‘하느님과 이웃을 심판하는 일’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책감을 느껴 두렁이를 입었지만 충분하지 않자 죄의 탓을 타인에게 돌리려 했던 행위와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점점 타인을 심판하면 이웃과 단절되고 급기야 타인의 아픔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소시오패스’가 됩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유다 지도자들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 ‘양철북’(1979)의 주인공 오스카는 어른들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일부러 성장하기를 거부합니다. 어른들의 잘못을 볼 때마다 ‘양철북’을 두드립니다. 그의 눈에는 모든 어른이 부조리하고 부도덕합니다. 그는 점점 더 강력하게 어른들을 비판하고 그렇게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합니다. 그 결과는 자신이 비판하는 히틀러와 같은 소시오패스가 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오스카처럼 비판의 양철북을 두드리며 소시오패스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를 자기 탓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엔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견딜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선택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가 그런 경우입니다. 죄를 뉘우쳐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자기 스스로 짊어지려 했던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클랜’(2015)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에 부역한 푸치오가 부자들을 납치해 일말의 양심도 없이 돈을 갈취했던 사건을 담았습니다. 아들 알렉스는 아버지가 친구를 납치하는 범죄에 작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돈을 받고는 친구를 살해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일에서 손을 떼려 합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떠나 도망칩니다. 하지만 알렉스는 아버지를 떠날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다 결국 경찰에 잡히고 맙니다.

알렉스와 아버지는 종신형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 가정을 위해 했다고 줄기차게 자기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 못한 알렉스는 어떻게 했을까요? 법정으로 가다가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죽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여러 차례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매번 실패합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법학 학위를 받아 2008년 출소하여 변호사 일을 합니다. 소시오패스가 변호사가 된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고 아무리 주장하려 해도 그 결과는 소시오패스가 되거나 자살하게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양심’은 올바른 길을 가도록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알람과 같습니다. 운전하다 차선을 변경할 때 ‘깜빡이’를 넣는 것은 알람을 울리는 기능과 같습니다. 만약 ‘깜빡이’를 무시하고 사고가 났다면 스스로 차를 고쳐야 할까요? 만들 능력이 있는 사람만 고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의 문제는 하느님과 해결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만들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잘못했으면 부모에게 용서받으면 그만입니다. 스스로 감추고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부모의 자비를 무시하는 더 큰 죄가 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단절로 나아가겠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이 고해성사로 양심의 가책을 없앰으로써 자기를 합리화할 필요가 없어지게 하지 않으면 인간관계의 단절은 자연적인 절차입니다.

전삼용 신부 (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지금까지 연재된 "생활과 함께 하는 교리"는 메인페이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물방 소식]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하여 많은 성당에서 팔찌묵주 만들기를 주문하셨습니다.
아마 아이들과 함께 하는 좋은 시간이였기를 기대해 봅니다.
성물방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성물을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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