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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성심 성월"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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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1호 -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 24-5-26
입력일 : 2024.05.24 22:01:26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05-04.jpg 조회 : 62
서울 암사동소재 이종국관 성모자상


2024년 5월 26일 일요일, 제991호 소식지입니다.




성모상 주위의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요즘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동안

5월의 마지막 주간에 접어들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5월 26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제1독서 신명 4,32-34. 39-40 / 제2독서 로마 8,14-17 / 복음 마태오 28,16-20

예수님은 왜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을까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면 늘 비슷한 내용의 강론을 듣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이니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덧붙여지는 이야기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일화입니다. 위대한 교부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 교리를 골똘히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떤 어린이가 바닷가 모래밭에 구멍을 파고 열심히 바닷물로 퍼다가 붓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고 있나고 물었더니 아이가 바닷물을 퍼서 구멍에 다 담으려 한다고 답을 합니다. 성인이 웃으며 작은 구멍에는 절대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으니 헛고생 그만하라고 타일렀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가 성인에게 말하기를, “맞다! 그러니 당신도 삼위일체 신비를 당신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 하지 말라” 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죠. 한 번쯤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삼위일체는 신학적으로 가장 어려운 교리입니다. 하느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교리이니 ‘신비’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는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혀 알 수 없다면 교부들이 어떻게 토론을 통해 그런 교리를 정립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삼위일체가 신비라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미사에서 함께 자주 바치는 사도신경과 간혹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삼위일체 신비를 고백하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신앙 고백은 이성을 통한 논리적 이해를 넘어 믿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증언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 신비는 성경과 삶을 통해 묵상하고 이를 통해 배운 것을 나의 신앙으로 고백해 볼 때 조금씩 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은 아주 짧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라는 사명입니다. 그렇게 사명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삶을 떠 올려 보면 그분은 늘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비우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신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고, 광야로 예수님을 인도하여 아버지의 뜻을 찾게 도우셨습니다. 그런 성령이기에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께서 자신들에게 내려옴을 체험합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진정한 사도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여정에 본격적으로 나섭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성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며 애쓰시는지, 우리가 당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알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가 모든 것의 주인이신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아버지,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의 아버지임을 알게 됩니다.

제2독서는 성령 하느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분이심을, 예수님이 걸으신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심을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됐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마치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된 것처럼 복음을 증거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돕고 계십니다. 성부가 없었다면 성자는 세상에 올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성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없었다면 성자는 성부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성자가 없었으면 성령은 세상에서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세 분 계시다는 이상한 교리가 아니라, 사랑은 함께 협력하는 것이며 일치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은총입니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삼위일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론하셨나 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신학적인 내용을 훈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삶의 방식에 혁명을 꾀한다는 뜻입니다. 각 위격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지속적인 상호작용 안에서 서로를 위해 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들과 함께 타인들을 위해 살라고 부추기십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삶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반영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고, 다른 이들에게 나를 내어줘야 한다고,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한다고 정말로 믿고 있는가? 나는 이를 말로 입증하는가, 아니면 내 삶으로 입증하는가?”(바티칸뉴스, 2022년 6월 12일)

저는 믿습니다. 세상 창조부터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성부 하느님을,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한 성자 하느님을, 우리 안에서 일하시며 예수님을 닮게 하시는 성령 하느님을 믿습니다. 또한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기시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우리도 그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라는 이끄심을 믿습니다. 이런 저의 믿음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삶으로 증거될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5월 27일 [녹] 연중 제8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0,17-27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오늘 복음에는 훌륭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와 …… 무릎을 꿇고” 질문할 정도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고,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도덕성에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를 대견히 여기시며, 그를 더욱 성숙한 삶으로 이끄시고자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완성은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추는 데에 있지 않고, 온전한 자유로 그분을 따르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적 자유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돌려놓을 때에만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부와 권력은 본디 하느님의 것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허락된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놓게 될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무겁고 불편해집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불안하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돈과 권력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워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이 나를 전능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고 거짓 행복에 빠지게 한다면, 부자가 되고 권력을 쥐는 것보다 더한 구원의 악조건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8일 (화) [녹]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0,28-3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본문에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담을 느끼고 떠나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이 문장에서 “버리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아피에미’는 ‘어떤 것을 두다’, ‘용서하다’, ‘없는 것으로 하다’ 등, 문맥에 따라 다양하게 옮기는 낱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버리다’ 또는 ‘포기하다’에 해당하는 낱말을 쓰지 않고 ‘아피에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 문장을 극단적인 ‘포기’나 과장된 ‘비움’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음을 암시합니다.

독서에서는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고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거룩함과 사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고, 거룩함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수녀원에 입회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수녀님이 자기가 맡은 구역을 청소하고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외부 사람들이 들어와 여기저기 발자국을 내버렸습니다. 수녀님은 불같이 화를 냈고 사람들은 민망해졌습니다.

철저히 버리고 포기하며 살려고 애썼지만 정작 자신의 완고한 자아는 버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버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집과 형제와 ……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범적 영웅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사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9일 (수) [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의 복자들은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복자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성대하게 지내며, 교구장의 재량에 따라 성 바오로 6세 교황 기념일도 선택하여 거행할 수 있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복음묵상] 요한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죽음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고, 스스로도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할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밀알’은 사실 그저 곡식 낱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씨앗일 뿐입니다. 그러나 땅속 깊은 어두움, 그 숨 막히는 공간에 자신을 맡기고 부서짐을 받아들이면 땅속의 양분들과 융합하여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게 됩니다.

씨앗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자신의 본모습을 꽃으로, 향기로, 열매로 온전히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두렵고 불안하며 불편한 시간을 받아들임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때로 놀라운 생명력을 낳는 은총의 여정이 되기도 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하며 이를 집요하게 움켜쥐고 유지한다면, 자기 보호와 방어는 이루어지겠지만 그 어떤 창조의 힘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밴드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라는 노래에 “빛나는 열매를 보여 준다 했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을 막고 폐쇄적으로 남아 있다면 그 어떤 빛나는 열매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힘든 도전이 다가오면, 자신을 보호하려고 맹렬히 저항하기보다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진정한 생존의 지혜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30일 (목) [백] 부활 제8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0,46ㄴ-52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길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곧바로 외칩니다. 사람들이 그를 말리고 비난하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소리칩니다. 이 장면은 신앙의 여정에서 품게 되는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제시하여 줍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시는지, 더욱이 주위의 방해와 비난으로 우리의 갈망을 좌절시키시는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단 한 번의 기도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이 마술처럼 해결되는 방식은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난과 시련 속에 인간을 내버려두시는 듯하지만 그 시간은 거꾸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갈망과 염원이 더욱 굳어지고 깊어지도록 기다리시는 밀도 높은 집중의 시간인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너라.” 하신 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의 소망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쓰인 그리스 말 ‘아나블레포’는 ‘시력을 되찾음’을 의미하지만 ‘위를 향하여(´아나´) 보다(´블레포´)’라는 뜻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치유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 곧 초월을 향하여 위로 시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구원을 기다려 온 사람들은, 구원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보지 못하던 눈먼 이는 이제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을 알아보고 따라나섭니다. ‘길 위에’ 앉아 구원을 기다리던 눈먼 이는 이제 그분을 따르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31일 (금)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축일을 5월 31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복음묵상] 루카 1,39-56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에 봉독되는 독서와 복음은 기쁨과 환호로 가득합니다. 이유는 ‘주님의 오심’ 때문입니다.

독서는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는 촉구로 시작됩니다. 같은 뜻의 내용이 세 번이나 되풀이되며 최상급으로 기쁨을 표현하는데, 이토록 열렬한 기쁨의 이유는 “이스라엘 임금 주님”이신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독서는 그분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시며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보다 더한 기쁨과 구원이 있을까요?

복음 또한 조용하였던 즈카르야의 집이 마리아의 방문으로 기쁨에 충만함을 묘사합니다.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가 그들 집에 오셨기 때문이고, 이에 성모님께서는 그 유명한 성모의 노래(마니피캇)로 응답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두려움을 조롱하고 폭력 앞에 용감할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심’을 알고 깨달을 때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시고,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시는’ 참된 진리와 자유, 정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쁨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에서 나오는 선물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6월 1일 (토) [홍]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유스티노 성인은 2세기 초 사마리아 지방 플라비아 네아폴리스(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문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벌인 종교 토론을 바탕으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내고,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성인은 165년 무렵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다른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르코 11,27-33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평생 구도자로서 진리를 탐구하던 유스티노 성인은 참된 진리를 그리스 철학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그리스 가정에서 태어나 그 문화 안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그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유스티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플라톤 철학 등 당대에 유행하던 철학 사상들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만족할 수 없었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 참된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유스티노가 그리스도교로 마음이 움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순교자들이 보여 준 용기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용감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악이나 탐욕 가운데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제2호교론」, 12장).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철학에서 진리를 찾았지만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고 입교하게 되었다는 유스티노의 고백은, 과학이나 다른 세속 학문에서 진리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바로 용기 있는 순교적 삶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피의 순교는 할 수 없지만, 삶 안에서 순교는 계속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을 모두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가치를 실천하며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순교입니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 가치를 거부하고 영원한 가치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용기에서 진리의 빛을 보고, 주님을 향하여 마음이 움직일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불리한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려면 일반적인 용기와 태도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 비난 중에도 지지를 받으려면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확고한 신념과 큰 용기를 지녀야 한다. 중국의 맹자는 전국 시대에 살았는데, 각 나라의 왕들은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려 혈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학식과 덕망 높은 대학자였던 맹자는 왕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맹자가 도덕 정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맹자는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백성을 사랑하고, 욕심을 버리고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이 매일 일어나는 마당에 맹자의 이런 주장을 귀담아듣는 왕은 없었다. 어느 날 높은 관리가 와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면 1000만 명이 가로막는다 해도 가는 것이 용기라고 가르쳤다. 남의 말에 귀를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의 의견이 다를 때 깊이 성찰하여 하늘과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용기를 내서 실천하라는 의미이다.

미디안족의 세력이 이스라엘을 억압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피하여 깊은 산속에다 은신처와 동굴 등 밖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들을 마련하였다. 그래도 미디안족과 다른 종족은 올라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농사지은 소출을 모두 약탈했다.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느님께 절규하며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에게 나타났다.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에게 말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기드온은 이게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했다.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어린 자신이 미디안족과 싸움을 할 수 있냐며 반문했다.

살기등등한 미디안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소집되었지만, 하느님은 군인 숫자를 줄이라고 명령하셨다. 안 그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인데 병력 숫자를 줄인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았다. 많은 병력으로 전쟁에서 이기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고, 하느님께서는 이 전쟁을 자신이 이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었다.

시험을 통과한 군인들이 겨우 300명이었다. 군인을 시험하는 방법도 특이했는데 물가로 데려가 개처럼 물을 핥는 이들을 뽑았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합격한 것이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인을 이끌고 전쟁에서 대승하였다. 이스라엘이 몇십 배가 넘는 적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족의 영웅인 기드온도 말년에 전리품으로 탈취한 금을 가지고 에폿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에폿을 섬기며 음란죄에 빠졌다. 말년에 한 번 잘못 판단한 실수로 인해 자신이 쌓은 평생의 명예가 무너져 버렸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묵주재료 파트 부분이 거의 업데이트 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보지 못한 그런 방석이나 십자가 입니다. 또다른 성물을 선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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