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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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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6호 -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24-6-30
입력일 : 2024.06.28 18:46:1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6-05.jpg 조회 : 91
경기도 양평소재 양근성지



2024년 6월 30일 일요일, 제996호 소식지입니다.






7월의 시작입니다.

하반기의 시작

그동안의 시간을 돌이켜보며

새로운 나머지를 구상해봅니다.

행복한 7월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6월 30일 (일) [녹]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제1독서 지혜 1,13-15; 2,23-24 / 제2독서 2코린 8,7.9.13-15 / 복음 마르 5,21-43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7월 1일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18-22
<나를 따라라.>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아버지의 장례조차 허락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따르라는 이 말씀이 너무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세워지기 마련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자녀에게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 가치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많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믿음보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가치들을 좇으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가치와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부딪치게 될 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며 그분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여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보다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정치적인 의견이, 물질에 대한 욕심이 더욱 앞섭니다. 체면과 자존심, 다른 이들의 평가가 더욱 앞섭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신앙을 먼저 선택하고, 예수님을 따르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과 타협하면 안 되는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함께 계시고, 그 길의 마지막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이 약속이 모든 이에게 소중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가장 소중한 가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2일 (화)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8,23-27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아!”로 옮긴 그리스 말은 “믿음이 거의 없는 자들아!” 또는 “작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아!”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상 설교와 그 뒤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지금 눈앞에 들이닥친 풍랑 앞에서 그들의 믿음은 한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한 제자들의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죽음의 공포로 내몰던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십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일지라도, 설령 거의 믿음이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을 찾는 우리의 목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죄와 악의 유혹이 우리 삶을 뒤흔들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어둠의 공포로 끌고 가는 순간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라는 오늘 복음의 묘사처럼, 그분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는 하느님, 고통이나 아픔과는 아무 상관 없으신 하느님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께서 풍랑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우리가 겪는 풍랑 속에서도 분명히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선택’입니다. 믿음이 거의 없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도움을 청하였던 것처럼,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을 찾는 선택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하여야 할 것은 우리의 약한 믿음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찾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린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신앙인인가요?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 불렸다(요한 20,24 참조).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는 매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해치려고 하였던 베타니아 마을로 가시려 하시자 이를 말리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큰 용기를 보였다.
한편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고백하며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다.
복음서에 나오는 언급들 말고는 그의 생애에 대하여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인도로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를 에데사(현재 튀르키예의 우르파)로 옮긴 7월 3일을 6세기부터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복음묵상] 요한 20,24-29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모든 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자신만 만나지 못하였다면 과연 그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결코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가득 찬 말이지만, 이 말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도 만나고 싶다는 토마스의 열망이 함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는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위한 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토마스가 제자들에게 하였던 말을 마치 그 자리에서 함께 들으셨던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한 그 순간에도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최고의 신앙 고백이, ‘결코 믿지 못하겠다’던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예수님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릴 때조차, 이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토마스에게 하셨던 것처럼 다시 찾아오시어 우리가 다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께 외국인도 이방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4일 (목)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8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3-26). 소돔 땅을 두고 시작된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이 대화에서 의인의 숫자가 쉰 명에서 열 명까지 점점 줄어듭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18,32). 이 대화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시는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가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당신께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미사를 드릴 때, 신앙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이 신비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찾으며 십자 성호를 긋는 순간, 그와 동시에 죄인들을 향한 자비와 용서도 함께 쏟아져 나옵니다. 기도가 메말라 갈 때마다, 신앙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는 이 신비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을 찾으며 드린 그 한 번의 기도 안에는 누군가가 죄를 용서받게 되는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 모습 안에는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5일 (금) [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 신심 미사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디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1836년 열여섯 살에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다음,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상(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 교회의 대표 성인으로 세웠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복음묵상] 마태오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한국 순교자의 영성』, 가톨릭 출판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참수되기 전에 남긴 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세례 때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라는 사제의 질문에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 우리의 믿음을 너무 쉽게 다른 것들과 바꾸어 버립니다. 바빠서, 수험생이라서, 돈을 벌어야 해서, 교우들과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등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가치는 지키고 간직하여야 하는 대상이지 버림의 대상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신앙 때문에 어려움이나 갈등을 겪을 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성령께서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들려주고 계십니다. 신앙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십자 성호를 긋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며 믿음을 지키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6일 (토)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4-17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헌 옷”과 “헌 가죽 부대”의 공통점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변화도 새로움도 없이 언제나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가장 작은 이’와 나누라는 말씀, 용서하여야 한다는 말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 때때로 주저앉아 버립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말씀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새 포도주”가 되어 “헌 가죽 부대”인 내 삶을 터뜨려 버린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다음에요. 예수님, 이 말씀은 저에게 너무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결코 실천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느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마음이 자주 든다면, 그 믿음은 이미 “헌 옷”과 “헌 가죽 부대”가 되어 버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되돌아볼 때, 어느새 기도하는 삶이 사라져 버렸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고해성사를 한 지 한참 지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세례 때 예수님을 새 옷으로 우리 모두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입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옷이 다시 빛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이 새 부대가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담아낼 수 있도록, 고해성사를 준비하며 기도하는 삶을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아멘.
(김재덕 베드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축복 속의 파견

50세가 되면, 공자가 논어의 위정편(爲政篇)에서 말한 ‘지천명’(知天命), 곧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사제품 25년이 넘으면 당연히 하느님의 영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나이 50세를 넘기고, 서품 은경축을 지내도 당연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지천명은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의 단계들을 잘 밟아간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경지이지요. 또한 하느님의 영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제와 교우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날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 거행, 특히 성찬의 희생 제사와 성무일도로 성화된다”(「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3항)는 교회 가르침에 따라 전례 거행에 온전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이루어지는 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집회를 해산해야 할 때가 옵니다. 미사의 마침 예식은 공지 사항, 인사, 강복, 파견, 퇴장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초세기 마침 예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교부도 자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영성체 후에 별도의 예식이 없거나, 있었다면 로마 관습에 따라 사제나 부제가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 하고는 파견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사제의 강복은 늦게 도입됐습니다. 6~7세기 「로마 예식」 제1권에 의하면, 주교는 제대에서 내려와 개별적으로 강복을 청하는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했음을 전해줍니다. 10세기경 이 강복이 미사 끝부분에 들어왔지만 적어도 13세기까지는 주교에게만 맡겨져 있었습니다. 현재는 강복 양식이 ‘보통 강복’, ‘장엄 강복’, ‘백성을 위한 기도’ 등 세 가지가 있습니다.

현재의 파견문인 “가십시오. 파견입니다”(Ite missa est)는 「로마 예식」 제1권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강복 전에 행했습니다. 이것 외에도 “가도 좋습니다”, “평화 안에 나아갑시다”(밀라노 전례), “평화로이 가십시오”(동방의 안티오키아 전례; 마르 5,34; 루카 7,50 참조) 등이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Ite missa est”를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의역해 사용하며, 네 개 양식을 추가 삽입해 놓았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은 잠시 성당에 남아 개별적으로 미사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 복음과 성체에 대한 감사 기도를 바치면 좋습니다.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도록 파견”(「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말합니다. 파견된 교우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하느님의 놀라우신 구원 업적에 대한 감사인 성찬례를 회상합니다. 이로써 미사의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양육된 하느님 백성은 이제 그분과 함께 사랑하러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Dilige et fac quod vis)라는 성 아우구스티노(353~430년)의 말씀은 ‘신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파견된 하느님 백성이 미사를 통하여 신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여 그분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지천명(知天命)이며, 또한 그분의 영을 따르는 삶이지요.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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