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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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호 - 사순 제3주일 / 23-3-12
입력일 : 2023.03.10 19:19:5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3-02.jpg 조회 : 48
한창 새싹이 나오고 있는 사무실 나무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제928호 소식지입니다.



요즘 날씨가 한 낮은 완연한 봄 날입니다.

두터운 외투가 앏은 점퍼로 갈아 입고

나뭇을 자세히 보면 파란 싹이 움트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움을 시작하는 요즘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으로 오늘을 맞이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3월 12일 (일) [자]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탈출 17,3-7 / 제2독서 로마 5,1-2.5-8 / 복음 요한 4,5-42

당신 향한 마음 한결같이 안아 주시는 주님

기도로 회개하며 자비 청하는 마음 그 열정과 의지 살펴 주시는 하느님 외적인 모습보다 내면의 진심 보시고 보잘것없는 우리에게 사랑 주시는 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보아 주십니다. 루카복음 18장에 보면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는 그가 세리이고 죄인이라는 판단을 내립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세리의 마음을 받아 주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보아 주십니다.

또 루카복음 19장에 나오는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그를 내려오라고 하신 다음 그의 집에 가셔서 함께 식사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군” 하고 투덜거리지만, 예수님은 자캐오의 마음 안에 회개하고자 하는 열정과 의지를 보아 주십니다.

욥도 사람들이 볼 때는 불행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욥기 19장 26절에서 욥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 살갗이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이 말씀을 듣고 이지선씨의 모습이 떠올랐는데요. 이지선씨는 음주 운전자가 낸 사고로 3도 화상을 입고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등이 아파서 벽에 기대야 했기 때문에 모두 앞으로 나와 기도를 하는데도 저는 맨 뒷자리에 있었어요. 그러나 내 마음은 주님 제일 가까이, 십자가 바로 밑에 엎드리고 있었답니다.

다들 찬양하는데 저는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잇몸이 다 내려앉을 것 같이 당기는 턱 때문에 도저히 입을 벌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큰 소리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지 말아주세요. 너무나 못난 얼굴을 갖게 되었지만, 예전처럼 예쁘게 화장도 못 하지만, 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예쁜 것을 좋아하는 스물네 살 여자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쯧쯧쯧...” 불쌍하다 하지 말아주세요. 누가 봐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행복한 천국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주님,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 더 좋아요.

내 부족한 외모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주님, 나는 그래서 하느님이 좋아요.

이지선씨가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힘을 낼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모습을 보아 주시고, 내적인 변화에 기뻐하시는 하느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됐던 구절도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실제로 이지선씨는 사고 후에 외적인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말씀대로 내적 인간은 새로워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됐고, 가족과 주변 신앙인들의 기도와 관심을 받으며 따뜻한 사랑을 체험합니다. 또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며 더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됐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자기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희망을 전하고 그 일에서 하느님의 도구로 쓰였다는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적인 모습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자신을 사랑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합니다. 이러한 체험 때문에 그녀는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인의 외적인 모습은 유다인에게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었고, 여러 남자를 거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던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도 갈망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아 주십니다. 그녀보다 먼저 갈망하셨고, 그 여인을 만날 수 있는 시간에 우물가로 나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비밀을 헤로데 왕에게도 말하지 않으셨고, 최고 의회에서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정체를 밝힌 사람은 인적 없는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이었습니다. 그 순간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살아온 수치가 사라졌고, 보잘것없는 인생이 높여집니다. ‘하느님이 오셨고, 하느님이 여기 계시고, 하느님이 보잘것없는 내게 마음을 쓰신다’라는 큰 사랑이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치 않으십니다. 당신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보아 주시고,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더 큰 사랑으로 안아 주십니다. 그런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품고, 그분께 마음을 향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3월 13일 (월) [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루카 복음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러한 특성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 가시어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내용은 마태오 복음이나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구약 성경의 두 이야기를 예로 드십니다. 하나는 엘리야를 통한 기적 이야기입니다.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하셨습니다. 과부는 엘리야 예언자에게, 그녀가 굶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과 함께 먹으려고 남겨 둔 밀가루와 기름으로 작은 빵 과자를 만들어 대접합니다. 그 뒤 그 집에서는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예언자를 파견한 내용으로 오늘 제1독서에서 들었습니다.

두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모두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시돈 지방이나 시리아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속하는 곳으로 이방인들의 지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미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활동하던 때부터 하느님께서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고자 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야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구약 성경 시대부터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원에 민족의 구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속한 민족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믿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4일 (화) [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18,21-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의 바탕에는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유다교에도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라삐들은 같은 죄를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관습을 생각한다면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훨씬 더 관대합니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일곱 곱절’입니다(창세 4,24 참조). 어떤 학자들은 ‘일곱 번’을 ‘일흔 번’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수가 얼마나 큰지를 떠나서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데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두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용서받는’ 것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 탈렌트라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의미로 본다면 본인은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도, 형제의 죄는 좀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모습 그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십니다. 이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5일 (수) [자]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완성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몇몇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현된 것은 ‘가득 채우다’는 의미에서 완성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우러 왔다.’ 말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율법이나 예언서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으로 표현된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법’입니다. 법은 성경에서 ‘율법서’라고도 부르는 모세 오경을 가리킬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모세 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완성하러 오신 것은 ‘율법서와 예언서들’이고 이는 구약 성경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채우러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율법이 아닌 성경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채우는 것은 그 의미를 새겨 하느님의 뜻에 맞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자주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모든 활동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 안에서 그리고 활동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이루신 분이시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는 율법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법을 따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하느님 말씀은 여전히 우리가 저마다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할 기준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6일 (목) [자]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1,14-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행위를 비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기적에 관한 것이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마귀와 사탄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기적에 관한 간략한 소개와는 다르게 예수님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양한 생각을 보여 주면서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력을 언급합니다.

베엘제불은 구약 성경에서 ‘바알 즈붑’이라고도 불립니다(2열왕 1,2 참조). 두 이름은 발음에서 다를 뿐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열왕기 하권에서 바알 즈붑은 ‘에크론의 신’으로 표현됩니다. 우상과 관련된 베엘제불은 사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악의 세력의 우두머리를 일컬을 때 가장 자주 쓰이는 표현인 사탄은 하느님의 적대자나 반대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합니다. 복음서에 많이 언급되는 마귀는 사탄 아래 있는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악의 세력에 반대되는 표현은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을 말할 때 묘사되고(탈출 8,15 참조), 하느님의 업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업적은 사탄과 마귀들의 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사탄의 힘은 우리에게 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힘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업적은 그것보다 더 강합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7일 (금) [자]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28ㄱㄷ-34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요약이면서 기본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계명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전해진 십계명은 결국 이 두 가지 사랑으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열 개의 계명에서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첫째 계명은 성경에서 줄곧 강조하는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째 계명은 주님의 이름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업적은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됩니다. 세 번째 계명인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주일의 의무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는 그 시간을 하느님과 함께 충실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의 일곱 계명은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부모에 대한 계명은 ‘효(孝)’의 의미를 넘어 가정의 모든 구성원 사이의 존중을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 또한 남의 목숨을 빼앗는 행동에 대한 금지만이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촉진하라는 말씀입니다. 간음에 대한 가르침도 성(性)에 대한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서로 일치하고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그 밖의 계명도 모두 글자 그대로의 의미보다 다른 이들의 권리와 명예, 가정과 재산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계명이 지니는 그 의미들을 되새기며 실천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8일 (토)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에서 비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 예로 바리사이가 등장합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의로움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이런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본디 유다교에서는 속죄의 날에 단식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율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더 열심히 종교 생활을 실천하려는 이들이 단식하는 횟수를 차츰 늘려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에 경건하다고 스스로 여기는 이들이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십일조에 대한 규정을 지키는 것도 철저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원에서 얻는 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바칠 정도였습니다(루카 11,42 참조). 기도 내용을 보면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법을 열성적으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계층이었으며, 그는 하느님 앞에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차이는 ‘기준’입니다. 바리사이의 기준은 자신의 행실입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규정을 지키며 자랑스러워하는 바리사이의 기도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 기준이 하느님입니다. 자신의 잘잘못을 떠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그분의 구원을 청합니다. 자신의 행실만으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다섯째 계명③(「가톨릭교회 교리서」 2284~2301항)

자기 몸 존중해야 타인의 생명도 존중할 수 있어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창업자로서 혁신적인 제품을 개발하여 인류의 편의를 위해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존심이 강하고 독단적인 인물이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특히 직원들에게 불필요한 비하와 폭언을 일삼았고 그로 인해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업무 때문에 불필요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아 스스로 마약이 필요할 정도라고 언급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췌장암으로 56세에 사망합니다.

마이클 잭슨은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라는 노래에서 보듯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한 음악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자신을 사랑했을까요? 그는 한 방송에서 자신이 성형수술을 한 것은 “아버지를 점점 닮아가는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검은색의 피부와 모습을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50세에 갑작스러운 호흡 장애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사인은 수년간의 비정상적인 수면 패턴과 스트레스에 의한 심장질환, 불면증 등 건강 문제로 많은 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사랑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기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부모와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에 감사해하고, 잘 가꾸어 지켜나가고 성장시켜나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생명과 신체의 건강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값진 재산입니다.”(2288) 자살이 살인인 것처럼, 지나친 과로와 스트레스, 방탕한 삶 등으로 자기 건강을 해치는 일은 또한 이웃사랑에도 반하는 것이 됩니다. 자기 생명에 대한 관리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운동이 유일한 취미라는 유재석씨는 자기관리에 충실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첫 메이저리그 성공 신화를 이루어 낸 박찬호 선수도 후배들에게 성공을 위한 조언을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다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리서는 죽은 이들의 시신까지도 “존경과 사랑으로 다루어야 한다”(2300)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생명이 소중해야 타인의 생명도 소중합니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부터 좋은 표양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자기가 조장한 악에 책임”(2287)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장기이식’을 해 준다면 그것은 도덕률에 부합됩니다.(2296 참조) 하지만 무절제한 생활로 누구에게도 장기를 줄 수 없게 자기를 망가뜨린다면 어떨까요?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설명하면서 교리서는 ‘절제의 덕’을 강조함을 잊지 않습니다. 지나친 음주와 폭식, 과다한 약물 복용이나 스트레스는 “타인과 자신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중죄를 짓는 것이라 가르칩니다.(2290 참조) 성경은 흥청대는 술판에서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합니다.(갈라 5,21) 적절한 휴식과 절제의 삶으로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 이것이 이웃사랑의 시작입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바구니의 주문이 작년에 비해 빠르게 주문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마 올 해는 코로나의 영향이 많이 줄어든 느낌을 줍니다.
보다 다양한 품목으로 부활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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