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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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호 - 사순 제2주일 / 23-3-5
입력일 : 2023.03.03 19:02:50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3-01.jpg 조회 : 55
강원도 양양성당 소재 십자가의 길

2023년 3월 5일 일요일, 제927호 소식지입니다.





한 낮은 그래도 따뜻한 기온이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합니다.

따뜻함에 옷을 얇게 입어보지만

자칫 감기 걸리기에 좋은 여건입니다.

그래도 성당 마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있는 분들을 보며

나도 함께 걸어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3월 5일 (일) [자]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 12,1-4 / 제2독서 2티모 1,8-10 / 복음 마태 17,1-9

우리도 변모되어야 합니다!

요란한 영의 잡음 말끔히 털어내고
마음 정리하는 대청소 기간인 사순
흠 없는 하느님 자녀 되도록 노력하길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듣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는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옵니다. 공동번역 성경 역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요. 왠지 마음이 쓰입니다. 불과 여드레 전,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 라는 진리의 답변을 드림으로 칭찬을 들었으니 말입니다. 재밌는 것은 마르코 사도와 루카 사도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 민망한 순간을 해명해주는 듯한 문장을 삽입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하늘같은 존재였던 모세와 엘리야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으니, 얼이 빠졌을 것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남은 듯, 찝찝했습니다. 그날, 모세와 엘리야는 틀림없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씀드렸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제아무리 빼어난 인물이라도 결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능가할 수는 없으니까요.

‘영’은 하느님의 ‘그 무엇’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인간에게만 당신의 영을 선물해주신 하느님의 뜻은 압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영을 훼손시키지 않기를 바라시며 당신처럼 세상을 살리기 원하신다는 걸 압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꾸만 당신 뜻에 어긋난 삶을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 귀한 하느님의 영을 제대로 살아내는 방법을 알려주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때문에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하느님을 향한 ‘영성’을 몸소 살아내시며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성을 일상에서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며 당신의 힘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생생한 거룩함을 살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혼’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정신적 영역을 말합니다. 동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영혼’을 바친다고 고백할 때, 그 기도의 무게는 상당한 것입니다. 주님께 받은 영과 내 생각과 느낌을 전부 봉헌한다는 뜻이니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지 이천 년, 그동안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전례의 모습이 달라졌고 교회의 문화도 많이 변화됐습니다. 그럼에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반석이신 진리의 말씀, 함께하시는 성령님, 주님의 몸인 성체는 변함없는 은혜를 간직한 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진리이며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그 복된 영광의 모습을 새겨 살아가도록 당신의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은 빛나는 하늘의 존재임을 선포하십니다. 이 진리를 온전히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낮춰보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하지도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을 인식하여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도록 힘을 주고 용기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두 지혜를 익혀 복음을 살아내도록 응원해주십니다.

때문에 윤리 교수는 때로 좌절합니다. 삶이란 결코 윤리 과목의 성적으로 채점되지 않는다는 사실, 윤리 성적이 곧 삶의 변화를 일러주지 않는다는 걸 느낄 때, 맥이 빠집니다. 물론 가장 큰 자괴감은 허술한 제 삶에서 비롯됩니다. 허세로 치장된 몹쓸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하느님의 아들을 울리고만 있는 듯합니다. 매일, 죽어가는 세상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뜻을 ‘꾸준히’ 망가뜨리는 꼴입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스스로의 안녕에 마음이 빼앗겨서 노심초사하며 지내는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나 변화된 삶을 살아내기를 강권하십니다. 제발 세 개의 초막에 꽂힌 마음에서 돌아서라 하십니다. 우리의 영과 혼을 당신께 봉헌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단 한 가지의 필수요소는 사랑뿐임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사순, 진리의 말씀에 무언가를 보태지 않고, 여과시켜 변질시키지도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이도록 영과 혼과 몸을 훈련하는 때입니다. 요란한 영의 잡음을 말끔히 털어내고 소란한 마음속을 단정하게 정리 정돈하는 대청소 기간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의 주님께로 다가갑시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산재한 온갖 불순물을 제거해 주시길 청합시다. 이제껏 주님의 말씀에 ‘헷갈린 척’ 했던 위선과 주님의 뜻을 ‘못 알아듣는 척’ 했던 뻔뻔함과 세상에 휘둘려 수없이 핑계를 댔던 그 거짓된 삶에서 탈출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써만 주님의 뜻에 외람되지 않도록, 복음의 삶을 꾸릴 수 있으며 주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희생하고, 겸손한 사랑의 삶을 살아낼 수가 있음을 명심합시다.

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라는 말씀에 화답하는 근사한 복음인으로 도약하도록 합시다.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3월 6일 (월) [자]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6,36-38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하느님을 따라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 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된 것과 부정한 것을 피하면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였고, 하느님 말씀 곧 계명과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에게 거룩함은 하느님의 가장 큰 특성이었기에, 하느님의 백성도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은 완전함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같은 형식의 표현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구약 성경의 거룩함과 마태오 복음의 완전함은 이제 ‘자비’로 드러납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입니다. 이제 구약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닮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심판받지 않으려고 심판하지 않거나, 단죄받지 않으려고 단죄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용서받으려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으로 이미 심판받지 않았고 단죄받지 않았으며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행동보다 앞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를 본받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7일 (화) [자]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합니다. 가까운 예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라는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일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행동으로 옮기고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25,45).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율법을 삶의 중심에 두던 이들이고, 그들에게 율법을 따르는 것은 믿음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태도에서 잘못된 부분을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계명과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하느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신앙인들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기대하는 평판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스스로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뛰어난 모범을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낮추신 분이셨고 그런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8일 (수) [자]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0,17-28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 뒤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과 함께 활동하십니다. 제자들을 뽑으신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든 활동에 대한 증인이면서 예수님의 활동을 이어 갑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우리 안에서 지속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탄생하게 될 교회를 준비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복음서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활동을 전하면서 제자들의 모습도 전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모습이 그리 훌륭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셨던 네 명의 제자에 속하는 야고보와 요한입니다(4,21 참조).

야고보와 요한의 일화는 당시 예수님에 대한 일부의 견해를 소개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임금과 관련된 낱말이었고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고, 그가 하느님의 뜻에 맞게 백성들을 바른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통치자의 구실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정치적인 메시아상과 거리가 멉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에게서 본보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아니셨지만,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외아드님이시자 그리스도이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9일 (목) [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6,19-31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 전부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복음서가 언급하는 이름은 그 이름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비유는 흔히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로 불립니다. 라자로는 엘아자르의 축약형으로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을 지닙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두 인물은 라자로와 ‘어떤 부자’입니다. 비유에서 아브라함과 어떤 부자가 직접 대화하지만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라자로만이 언급됩니다. 이미 ‘라자로’라는 이름에서부터 비유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드러납니다.

비유 안에서 화려한 차림의 부자와 온몸이 종기투성이인 라자로에 대한 묘사는 현세에서 드러나는 부와 가난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상황은 다릅니다. 라자로는 복된 모습이지만 부자는 고통을 겪는 듯합니다. 비유가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현세의 상황과 반대로 된다는 것을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라자로는 오직 이 한 가지 희망을 가졌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의 잘못은 라자로로 대표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처럼 보입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바른길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0일 (금) [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1,33-43.45-46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요약합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포도밭은 하느님 백성을 상징합니다.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땅을 일구는 것만이 아니라 울타리와 확과 탑을 마련하는 구체적인 과정은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소작인은 이 백성을 이끌어 갈 책임을 맡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밭의 주인은 소출을 받아 오도록 종들을 보냅니다. 비유에서 이 종들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악행을 일삼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다시 자신의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마저 죽여 버립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복음서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그분의 삶을 요약합니다. 하나의 비유이지만 그 안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비록 종교 지도자들이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백성을 위하여 당신의 종들을 파견하십니다.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백성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전하는 많은 이야기도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백성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말합니다. 모든 것을 시작하신 분도 하느님이시고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종들을, 마침내는 사랑하는 아들마저 백성을 위하여 내주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분을 믿는 이들의 역사는 사랑과 자비의 역사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11일 (토) [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비유에서 주인공은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작은아들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죄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뉘우침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그리고 회개에는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실천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입니다.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라는 아버지의 심정 표현은 온전히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냅니다. 복음서에서 ‘가엾은 마음’은 동정이 아니라 자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비교적 적게 관심을 받지만, 큰아들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집안의 일을 도맡아 성실하게 “종처럼”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뜻을 한 번도 어기지 않은 충실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생의 귀환과 그를 위한 잔치가 마뜩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두 아들을 대비하여 보여 줍니다. 작은아들에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비의 체험이고 행복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행복이기보다 견뎌야 할 일입니다. 작은아들은 스스로 품팔이꾼이라고 하지만 아들로 대우받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스스로 종인 듯 살아 갑니다. 오늘 비유는 교회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은아들은 회개하는 죄인을, 큰아들은 율법에 충실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말합니다. 나는 어떤 아들의 모습입니까?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다섯째 계명②(「가톨릭교회 교리서」 2263~2283항)

살인자가 될 것인가, 순교자가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살인하지 말라는 다섯째 계명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 속에는 살인인 것 같지만 살인이 아니고 살인이 아닌 것 같지만 살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당방위로 죽이는 것은 살인일까요? 아닙니다. 교리서는 “자기 사랑은 도덕성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말하며 “적절한 방어 행위”를 인정합니다. 전쟁 상황에 나와 가족을 죽이려는 이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을 돌볼 의무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2264)

반대로 살인이 아닌 것 같지만 살인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암묵적인 살인입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단편 영화 ‘44번 버스’는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강도 두 명이 버스에 탔습니다. 그들은 버스 안 승객의 금품을 빼앗고 운전사까지 끌고 내립니다. 운전사는 여자입니다. 그들은 버스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운전사를 폭행합니다. 버스 안에는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많은 남성들이 타고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뛰쳐나가 그들과 싸우다 칼에 다리를 찔립니다. 폭행을 당한 여자 운전사는 다리를 절뚝이며 버스에 타려는, 자신을 구해주려던 사람을 태우지 않고 그냥 가버립니다. 그리고 뉴스에 그 44번 버스가 다리에서 추락하여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버스 운전사는 자신을 가해한 강도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방관한, 버스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까지 공범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내가 당연히 구해주어야 할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때 이런 것이 방관적 살인입니다. 마찬가지로 낙태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낙태에 대한 분명한 협력은 중죄가 됩니다.”(2272) “인간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2270)

순교와 자살도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같이 자기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자살은 살인이고 순교는 살인이 아닙니다. 사실 자살과 순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생명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느냐, 주님의 것으로 생각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위해 쓰면 순교요, 나를 위해 쓰면 자살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나의 생명을 쓰면 순교요, 나를 살리려고 하면 자살이 됩니다. 순교로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지만, 자살은 이 세상 고통에서 피하여 내가 살려고 하는 행위의 일환이 됩니다. 안락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안락사를 살인으로 정의합니다.(2277 참조)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입니다. 내가 살려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전연명치료거부에 대해서는 또 다릅니다. 이는 천국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이웃을 위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그것을 주신 분의 의도대로 써야 합니다. 그러면 순교가 되지만 죽으려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의 살인자가 됩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습니다. 살리기 위해 죽을 것이냐, 살기 위해 죽일 것이냐는 우리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3월로 접어 들면서 벌써부터 부활용품에 대한 주문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많은 부활 행사를 하지 못하였지만 올해는 많은 성당에서 부활관련 행사를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보다 다양한 부활용품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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