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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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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4호 - 연중 제11주일 / 24-6-16
입력일 : 2024.06.14 18:36:2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06-031.jpg 조회 : 171
서울 은평구 소재 구파발성당


2024년 6월 16일 일요일, 제994호 소식지입니다.






갑짝스런 무더위가 기승입니다.

6월 중순임에도

한 낮에는 30도를 웃도는 요즘입니다.

본격적인 여름철이 아님에도 이정도이니

미리미리

마음준비를 단단히 해야겠습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6월 16일 (일) [녹]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에제 17,22-24 / 제2독서 2코린 5,6-10 / 복음 마르 4,26-34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마르 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상들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참조)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비유를 만나는데, 그중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관한 비유(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입니다.

‘비유’는 그리스어 ‘파라볼레’의 번역으로,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파라볼레’는 하느님의 통치 혹은 행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등장하는 ‘파라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어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의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파라볼레’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원적 기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먼저 첫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이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특별히 첫 번째 비유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가 되어 곡식에 낫을 내는 농부를 언급하며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주님의 날’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직경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 과정 자체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거대한 나무를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당장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고 확신하셨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자연 속 작은 것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비유(마르 4,32)는 구약성경의 전통,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적 예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제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종류에 속하는데, 목질이 견고하고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다윗의 후손, 곧 바빌론 1차 유배 당시 끌려간 여호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향백나무에 관한 짧은 비유를 통해 다윗 왕조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장 23절의 말씀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본래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과실수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로 소개합니다. 하느님 없이 세상 만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약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거대하고 강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변화에서 우리는 경이로운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속에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인간의 통찰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신적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자에게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비유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허구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힘찬 어조로 고백한 그 믿음을 우리도 각자의 삶 안에서 고백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6월 17일 [녹]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38-4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늘 독서인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는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지 알려 줍니다. 아합은 매우 탐욕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모략을 세우거나 직접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이제벨과는 달리 하느님과 율법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였기에, 거짓 증언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에 매우 충실한 사람으로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불의와 폭력에 내던져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을 감았습니다. 나봇이 무고하게 죽었지만, 아합은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저지른 악행의 결과를 마음속으로 기대하며, 겉으로는 모른 척하였지만 그 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무죄한 의인이 희생한 대가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욕망은 아합에게 나봇의 죽음을 가리고, 포도밭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아합과 닮았습니다. 이제벨처럼 직접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그 악행의 결과가 자신에게 이익으로 돌아올 때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빈부 격차를 가속화하며 가난한 이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악법과 불의한 구조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만일 그 법으로 어떤 이득을 얻게 된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욕심은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고, 지금 곧바로 얻게 될 이익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보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어려운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희생적 선택이어야 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43-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복음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분이시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완전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루카 복음서에 따르면, 주님의 완전함은 그분의 자비하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6,36 참조).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아합 임금과 같은 악인도, 자신을 낮추고 용서를 청하기만 하면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완전해져야 합니다. 완전해진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원수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 사랑과 용서는 자비하신 하느님과 당신을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또한 자비와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이를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도, 계속 미움과 원망 속에 휩싸인 자신에게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은 자신에게 계속 상처를 냅니다. 그래서 다른 이에 대한 자비와 용서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 시작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마음이 완전히 풀렸을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는 행위’는 ‘완전한 용서’를 향하여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는 아니지만, 자비로운 마음에서 시도한 이 용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지배하던 분노를 녹이고, 연민과 사랑을 자아내며 마침내 완전한 용서로 이끌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19일 (수) [녹]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제1독서에서 엘리사에게 이어진 사명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름을 묵상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엘리사에게 넘어가며 주님의 시간과 사업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야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엘리야라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본다면, 그 사명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생애는 하느님의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너무나 짧습니다. 온 생애를 통한 엘리야의 헌신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뜻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불러올리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에서 엘리야의 사명은 엘리사에게 넘어갔고, 구원사는 변함없이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저마다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 보이고, 목적지는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교회와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할 듯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른 이를 통해서, 다음 세대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분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 노고의 열매가 비록 이 시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 속에서 사명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충실하게 실천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0일 (목)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아도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 청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청원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청원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청원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청원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분과 나는 이 기도로써 어떤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답받지 못하는 청원 기도는 없습니다.

청원 기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로 하느님께 바람을 아룁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들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다른 것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청원이 정말 옳고 합당한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청하여야 할 올바른 것을 알게 됩니다. 청원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뜻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기쁨도 함께 느낍니다. 주님의 청원에 내가 응답하면서 주님 사업의 협력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청원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1일 (금) [백]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본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려고 하였지만,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선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열일곱 살에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로마에서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로마 전역에 흑사병이 번지자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1591년 스물세 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였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며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6,19-23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제1독서는 아탈야의 학살과 죽음을 전합니다. 아탈야는 엘리야 예언자의 오랜 원수인 아합과 이제벨의 딸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공주였던 그는 남 유다 임금과 혼인하여 남 유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하즈야 임금이 죽자, 아탈야는 남 유다 다윗 가문의 왕족들을 모두 학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장악하여 스스로 남 유다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가가 멸족될 위기에서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기지를 발휘하여 다윗 왕가의 마지막 핏줄인 요아스를 구출하였고, 6년 뒤에 여호세바의 남편인 여호야다는 아탈야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위에 앉힙니다.

이 사건은 야훼 신앙과 철저히 거리를 둔 오므리 왕조(아합, 이제벨, 아탈야)와 다윗 왕조의 대결이었고, 아탈야의 학살로 다윗 가문에게 주어진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이(2사무 7,11-16 참조)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지만, 주님께서는 결국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과, 그 약속을 위하여 협력하는 여러 의인들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 시기 이후에 교회에 오는 신자들이 줄고, 교회 활동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고, 성소자 수는 몹시 줄었습니다. 교회의 머지않은 미래가 마치 명맥이 끊길 위험에 놓인 다윗 왕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다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고, 여호세바와 여호야다 같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들을 계속해서 보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22일 (토)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24-34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섭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섭리’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지혜와 힘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믿는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힘이 우리를 이끌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섭리는 진지한 삶의 태도를 먼저 내세웁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하여 이해가 깊은 이들은 개인의 내적인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운명의 흐름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섭리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 나라와 거룩한 정의를 먼저 바라는 믿음으로써 주위에서 진행되는 일들이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물, 인간, 상황, 운명과 같은 주변 세계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방식에 따라 형태를 갖춥니다. 믿음으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됩니다. 곧 믿는 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삶의 궁극적인 목표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가볍지 않은 요구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추구를 첫자리에 놓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우리에게 위대한 약속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이에게 ‘구원으로 이끌리는 삶’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로마노 과르디니, 『예비 기도 학교』, 154-158면 참조).
(최정훈 바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전례에 쓸 수 있는 악기는 오르간뿐이다?

오르간, 교회 전례에서 특별한 위상…방침에 따라 현악기·관악기도 사용
악기는 하느님 찬미 노래 도울 뿐…하느님 찬미 노랫소리가 더 중요

성당하면 떠오르는 악기가 있습니다. 전례를 웅장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오르간입니다. 큰 규모의 성당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성당에는 오르간이 설치돼 있습니다.

교회는 오르간 축복 예식도 따로 거행하는데요. 오르간 축복 예식은 「축복 예식」 중에서도 ‘전례와 신심을 위한 성당 기물 축복 예식’ 항목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례대나 감실, 성당문, 성화상, 십자가의 길 등 성당 안에서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들을 축복하는 예식서들을 모은 곳에 오르간 축복 예식서도 있는 것이죠.

교회는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 “전례 거행에 가장 어울리는 악기는 오르간”이라면서 오르간을 “적당한 자리에 놓아 성가대와 교우들이 노래할 때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악기만 연주하는 경우에는 모든 이가 잘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명시할 정도로 오르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393항, 313항 참조)

이처럼 교회 안에서 오르간의 위상은 특별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부들은 “라틴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은 전통적인 악기로서 크게 존중돼야 한다”면서 “그 음향은 교회 의전에 놀라운 광채를 더하고,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이 힘차게 들어 올릴 수 있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전례헌장」 120항 참조)

이처럼 교회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오르간이지만, 사실 교회가 처음부터 전례에 오르간을 사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전례에 악기를 도입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오르간 역시 처음에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9세기 무렵부터 하나, 둘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양 교회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이 설치된 곳은 독일의 아헨주교좌성당(812년)이라고 하는데요. 이후로도 오르간은 여러 성당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교회 전례를 위한 중요한 악기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전례 중 악기 사용은 오르간만 가능한 것일까요? 오르간 말고 다른 악기들도 전례 중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르간과 달리 다른 악기들은 일종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전례헌장은 오르간 외의 다른 악기들은 지역 교회의 판단과 동의에 따라 거룩한 용도에 적합하고 성당의 품위에 맞으며 신자들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전례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방침에 따라 한국 교구들도 오르간 외에 사용할 수 있는 악기를 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전례 중 관악기와 현악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악기는 특별한 경우에 신중하게 검토해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오르간이지만, 그렇다고 전례 음악에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전례 시기 중 대림 시기에는 오르간과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절제하고, 사순 시기에는 노래 반주에만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반주에만 쓸 수 있다는 것은 악기만으로 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례 음악에서 오르간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우리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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