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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성심 성월"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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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2호 - 성체성혈 대축일 / 24-6-2
입력일 : 2024.06.01 22:44:2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06-01.jpg 조회 : 55
서울 역상동성당

2024년 6월 2일 일요일, 제992호 소식지입니다.




6월의 시작입니다.

무더워지는 여름날

아침과 낮의 온도차가 커

호흡기 환자가 기승입니다.

건강한 유월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탈출 24,3-8 / 제2독서 히브 9,11-15 / 복음 마르코 14,12-16.22-26

“빵에 담긴 마음, 빵을 모시는 마음”

목요일 아침, 학생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미사를 기다립니다. 경당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아이들이 몰려오곤 하는데요. 미사에 참례한 학생들에게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명의 빵’ 보다는 ‘간식’을 찾아서 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곧잘 두 손을 모으고 성가를 함께 부르며 기도 소리에 목소리를 보태곤 합니다만, 미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단지 간식을 먹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다보니 가끔은 애를 먹기도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고 계속해서 잡담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신 분들은 여쭈어보시곤 합니다. “신부님, 아이들이 이 미사의 의미를 알까요?” 아이들이 미사에 몰입하는 것 같지도 않고, 신부님 이야기도 잘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간식비도 많이 드는데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럴 때면, 오늘 마주하는 복음 이야기를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날 마지막 만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고,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파스카(페사흐)와 무교절 축제인데요. 이 무렵이면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묵을 방을 찾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예수님 일행은 ‘큰 이층 방’을 마련합니다.(학자들은 이 방의 주인이 마르코 복음사가라 보았습니다만, 근래에는 사도 요한이 속한 사제가문의 별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르던 사람 중에는 그 정도 되는 실력자가 있었음을 생각할 만한 대목이지요.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신다는 파스카 축제, 환영받으면서 들어온 예루살렘, 부러울 것 없이 큼직한 방에 모인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장담에서 유다의 배신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 모두를 세세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분명하게 짐작해 볼 만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마음과 같은 이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함께 나누어 먹은 그 빵은 예수님의 부서진 마음 조각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누어 마신 그 잔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만찬을 행하고, 만찬 때의 일을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그분을 기념하고 기억해 왔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찬례에 참례하고 있나요.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성체분배자는 성체를 전해드리면서 “그리스도의 몸”하고 초대하며, 성체를 배령받는 교우는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아멘”이라는 대답은 할 수 없고, 여러분 각자가 나름대로 대답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아멘” 외에 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으시는가요. 다시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성체를 받으면서 “아멘”하고 응답하실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는 그 말그릇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그 한마디는 선언이자 질문입니다. 이 동그란 밀떡의 모양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받아먹은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멘”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을 아우릅니다. “아멘”은 믿음입니다. 이 작은 빵조각이 주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멘”은 동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기억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음식이 되셨다는 것, 우리가 주님을 음식으로 먹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성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습니다. “아멘”은 다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실천하기로 합니다. 적어도 그의 삶과 방식을 흉내내보기로 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그렇습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같지는 않겠지요. 때로는 질문과 의심, 때로는 무심하고 냉담한 마음, 때로는 한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도 “아멘” 말마디에 담아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말로는 다할 수 없어, 우리 마음을 “아멘” 한마디에 담아내는 것이겠지요.

미사를 마치고 핫도그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에 누군가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핫도그에 담은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무심히 핫도그를 먹다가, 불현듯 우리의 눈길과 사랑을 기억하기를 바란다고요. 그때라도 아이들과 우리의 마음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요.

지금은 어긋난 그 마음도 언젠가 결국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제자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사랑을 기억하며 행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신 조각난 빵에는,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부서진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도 그 빵을 모시며, 그 사랑을 조금 더 닮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6월 3일 (월) [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성인들은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받던 그와 스물한 명의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순교하였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마르코 12,1-12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고자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배려를 묵상하게 합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하느님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알맞게 배치하셨습니다. 믿음이 나 혼자의 선택과 결정인 것 같지만, 사실 하느님의 이끄심과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선택하여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 믿음을 허락하시고 이끄시는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을 계시하셨고, 또 우리 안에 당신 없이는 채워지지 않을 갈망도 주셨습니다.

복음은 악한 소작인들을 몇 번이고 참아 주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은 소작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몇 번이고 기회를 줍니다. 자신의 종을 여러 차례 보냈고, 마지막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면서 그들의 회개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등을 돌려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도록 갖은 애를 다 쓰고 계십니다. 당신 사람을 통해서, 특별한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믿음과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고 그러한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믿고 사랑할 수 있게 하셨고, 부족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고 기다리시는 분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배려가 우리의 위로와 희망의 샘이 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4일 (화) [녹]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2,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오늘 독서는 세상 마지막 날이 될 “하느님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날은 주님을 거스른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날이지만, 주님을 믿고 바라며 기다린 이들에게는 구원과 승리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마지막 날은 혼돈 속의 멸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창조되는 구원입니다(이사 65,17 참조).

마지막 날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으로 지상 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인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죽음이 지닌 상실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죽음이 마치 온 생명을 찢고 파괴하여 영원히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지상 생활의 완성이며 영원한 삶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믿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운명이며,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과제입니다. 죽음이라는 과제는 사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양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신앙인은 죽음을 절망과 두려움의 순간이 아닌 삶의 완성으로, 또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실현되는 구원의 순간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삶을 아름답게 완성하고, 새로운 삶으로 옮아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앙이 깊었습니다. 부모들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세심하게 준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마지막 날을 세심하게 준비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날마다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응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르는 부족한 부분은 주님의 너그러운 자비에 맡길 뿐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5일 (수)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보니파시오 성인은 673년 무렵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엑시터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된 그는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성인은 독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주교로 축성되어 마인츠 교회를 다스리며, 동료들과 함께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세우고 재건하였다.
성인은 프리슬란트(오늘날 네덜란드) 지방에서 전교하다가 754년 이교도들에게 살해되었다. 1874년 비오 9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주교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복음묵상] 마르코 12,18-2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형제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사회적 관습을 근거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회적 관습에 달려 있지 않고,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서, 부활 신앙은 죽음 뒤에도 하느님께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믿음입니다.

사실 생명이 끝나는 것으로 보이는 죽음은,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는 남겨진 이들에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어 보이는 영원한 상실은 유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크나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고통이 ‘부활 신앙’ 안에서 극적으로 변화됩니다. 한 사람의 온 생애를 돌보셨던 주님께서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돌보아 주신다는 믿음, 그래서 지금 그의 영혼이 주님 품에서 아무 고통 없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믿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남은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꿉니다.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살아간 이들은 모두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살아간다면, 먼저 죽음의 강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이들과 다시 만나고, 함께 웃으며 함께하였던 오늘을 추억할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서 그 시간을 준비하셨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6일 (목) [녹]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7일 (금)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복음묵상] 요한 19,31-37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오늘 교회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독서와 복음으로 묵상하여 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 찬 사랑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짓는 이들을 보시며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사랑하시고 지금도 사랑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를 분노로 갚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갚으십니다. 주님을 거스르는 자들에게 분노로 행하시지 않고, 불쌍하게 바라보시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분노를 막아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이 거룩함입니다.

오늘 복음은 군사 하나가 예수님의 옆구리(심장)를 찔러 상처를 입히는 장면을 들려줍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는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옆구리를 찔러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이 입히는 상처를 침묵으로 받아 내시고, 분노하지 않으시며 원수를 구원으로 갚으십니다. 창에 찔린 상처에서 피(성체성사)와 물(세례성사)이 흘러나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은총이 흘러나왔듯이, 우리 죄에 찔린 성심의 상처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자비와 은총이 흘러나옵니다.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의 배신으로 입으신 상처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마음, 그 고통을 구원으로 되돌려주시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고통을 묵상하고 그 마음을 닮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6월 8일 (토) [백]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성모 신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으로 점점 보편화되어,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서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비오 12세 교황은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게 하였다. 처음에는 8월 22일에 선택 기념일로 지냈는데, 1996년 경신성사성 교령에 따라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되었다.

[복음묵상] 루카 2,41-51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선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바리사이와 세리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둘의 대비를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는 그들의 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였습니다. 우리말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바리사이는 서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프로스 헤아우톤’) 이렇게 기도하였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에이스 톤 우라논’)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세리의 기도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기도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하느님 없이 진행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결국 하느님의 최종 판단은 세리가 ‘의롭다’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 없이 자기 행위만 과시한 바리사이의 기도는 그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히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소통한 세리는 ‘의롭게 됨’이라는 기도의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나의 삶과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품위 있는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저 신앙으로 포장된 경건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구태의연한 경건주의를 넘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성변화와 종

성체·성혈 축성의 순간 알리는 중요한 의미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의 뜻은 프랑스어 ‘L’Angelus’로 ‘삼종기도’입니다. 들판에서 일하다가 성당 종소리를 듣고 기도하는 농부 부부가 가운데 있고 한쪽에 성당의 종탑이 멀리 보이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종’을 교회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자유를 얻은 313년 밀라노 칙령 이후로 추정됩니다. 라틴어로 ‘종’을 ‘campana’라고 부르는 이유는 당시 이탈리아 캄파나 지역에서 청동 산업이 발전했기에 그곳에서 종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비니아노 교황(재위 604-606년)이 처음으로 기도와 미사 시간에 성당 종을 울리도록 규정했습니다.

현재 미사 중 복사가 작은 종을 사용하는 경우는 성변화와 관련됩니다. 곧 교회 공동체가 봉헌한 예물인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룩하게 변화하는 축성의 순간들이지요. 빵과 포도주가 성체와 성혈로 변하는 축성 시점은 동방 전례와 서방 전례가 서로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동방은 축성을 기원하는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를 성체·성혈 축성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지만, 서방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찬 제정문’으로 축성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서방 교회가 예수님 말씀에 중점을 두는 계기를 마련한 교부 중에 암브로시오 성인이 있습니다. 그는 저서 「성사론」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축성 전에 빵은 그저 빵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말해지는 즉시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 포도주와 물이 든 잔도 그리스도의 말씀 전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는 즉시 그것은 백성을 구원할 피가 된다.”

약 1600년 동안 로마 교회의 유일한 감사 기도이고 현재의 ‘감사 기도 제1양식’인 ‘로마 전문’(Roman Canon)에는 성령이라는 단어가 마지막 영광송(Doxologia)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성령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예물에 대한 성령의 역할을 언급합니다. 성찬 제정문을 하기 전에 하는 “주 하느님, 이 예물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강복하시어 참되고 완전하며 합당한 제물 사랑하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라는 부분이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브 콩가르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 연구에 힘입어 ‘예수님의 성찬 제정 말씀’과 함께 성령을 빵과 포도주를 성체·성혈로 변화시키는 축성의 주인공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전문인 제1양식 이외 나머지 양식에는 ‘축성 기원 성령 청원 기도’가 포함되었으며, 이 순간에는 사제가 예물 위에 손을 펴 얹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미사에서 종을 치는 순간이 축성과 관련 있다는 차원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 세 번의 순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 청원을 하며 사제가 손을 예물 위에 얹는 순간과 빵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하고 축성된 빵을 들어 올리는 순간, 또 잔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하고 축성된 피를 담은 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입니다. 이에 더하여 성체와 성혈에 대해서 깊이 절을 하는 순간에 종을 칩니다. 이런 관점에 볼 때, 사제가 영성체하는 순간에 치는 종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 청원 기도’와 ‘예수님의 성찬 제정문’을 통하여 축성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 성체와 성혈을 들어 올릴 때, 가만히 보기만 하지 않고 성 비오 10세께서 알려주신 것처럼 토마스 사도가 한 고백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을 속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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