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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 성심 성월"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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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0호 - 성령 강림 대축일 / 24-5-19
입력일 : 2024.05.17 20:19:51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05-031.jpg 조회 : 111
경기도 용문소재 용문성당 성모상


2024년 5월 19일 일요일, 제990호 소식지입니다.




성모상 주위에 장미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는 요즘,

이런 분위기로 성모상앞에서

우리의 바람을

성모님을 통하여 전구할 수 있도록

묵주기도를 해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사도 2,1-11 / 제2독서 1코린 12,3ㄷ-7.12-13 / 복음 요한 20,19-23

파스카의 완성이자 교회의 시작 알리는 기쁜소식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헌장’을 반포하며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6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해마다 ‘청소년 주일’(5월 마지막 주일)까지의 한 주간을 ‘교육 주간’으로 정하였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에 가톨릭 교육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다.

[복음묵상] 요한 19,25-34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 무엇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낱말은 “어머니”입니다. 독서는 “하와”라는 이름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전하고, 복음은 성모님의 ‘모성’에 대한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합니다.

복음의 전반부는 이 어머니의 특징을 아들의 죽음 앞에 묵묵히 ‘서 계셨음’으로 제시합니다. 죽어 가는 아들 곁에 서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성모 성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두 번째로 강조된 내용은 새로운 모성의 시작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당부로써, 성모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특별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음은 복음의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 곧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라는 문장과 연결됩니다.

교부들은 이를 교회의 탄생으로 이해하였는데, 아담의 옆구리(갈빗대)에서 하와가 나왔듯,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물을 통하여 세례성사/피를 통하여 성체성사)가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모성’은 죽을 만큼의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내놓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낳으신 ‘육신의 모성’은 이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사도들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영적 모성’까지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듯, 이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소외되고 버려져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묵묵히, 그 누구보다 굳건히 서 계십니다. 모성은 사랑하는 이들 곁에 서 있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9,30-37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의 ‘서열 논쟁’으로 생긴 갈등을 정리하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는데, 사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욕심”에서 비롯합니다.

독서는 이를 매우 날카롭게 묘사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복음은 이러한 갈등과 불화를 해결할 방법으로 세 개의 이미지(꼴찌, 종, 어린이)를 제시합니다. “꼴찌”로 옮긴 그리스 말 ‘에스카토스’는 끝이나 종말 또는 마지막을 의미하며 맨 끝자리의 ‘무의미한 존재’나 ‘쓸모없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종”으로 옮긴 그리스 말 ‘디아코노스’ 또한 식탁에서 봉사하는 이를 뜻합니다. “어린이”로 옮긴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 어린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어리고 연약한 이들을 말합니다.

결국 이 세 개의 이미지를 통하여 “첫째가 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노력 대신 힘 없고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겸손을 가지도록 제안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그것이 바로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독서에서는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꼴찌가 되고 누군가의 종이 되며 연약한 아이처럼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식이나 위선 없이 진심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야말로 구원의 초대이고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그때 하느님께서는 바닥에 있는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아 주셨듯이 말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2일 (수)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러한 일이 제자들 안에서 일어났음을 알려 줍니다.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사람’이 자기들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 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도 금지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우리’의 영역을 단단하게 다지고자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하는 일은 사실 빈번히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이 부당함을 알고, ‘하느님 백성’으로서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자 제안된 것이 ‘시노달리타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교회를 모독하는 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배제되거나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야말로 하루빨리 배제하고 소외하여야 할 절대 악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 또한 고착된 이념이나 판단 기준으로 사람을 배제하지 말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열려 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의 ‘허세와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배타성이라는 금기가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고자 견고한 철벽을 치고 그 어떤 이질적 존재도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함으로써, 또 다른 소외와 변방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때 교회는 결코 복음적일 수 없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3일 (목) [백]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9,41-50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오늘 복음과 독서의 표현들은 꽤 위협적이고 과격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요소’를 없애라는 표현을 “잘라 버려라.”, “빼 던져 버려라.” 등으로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말 ‘아포콥토’(자르다)는 무엇인가를 잘라 내어 없어지게 하는 행위를 일컫고, ‘에크발로’(-로부터 빼내서 던지다) 또한 무엇인가를 멀리 던져서 주변에 존재하기 않게 하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모두 점진적 과정이나 단계와는 다른 ‘급진’과 ‘극단’을 부각시킵니다. 악의 요소를 단호하게 끊어 내고 분리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소모적이고 무모한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영성 생활에서 만나는 뜻밖의 복병은 나날의 작고 사사로운 변화입니다. 엄청난 비극과 급작스러운 불행에는 꺾이지 않는 강한 힘으로 용감히 대처하면서도 “소금”처럼 자잘한 일상의 습관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소하고 평범한 습관쯤이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스스로 속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는 손, 발, 눈 등 일상의 행동과 연결된 신체 부위를 말하며 그러한 사소함과 평범함이야말로 우리를 악에 노출시키는 의외의 도구임을 경고합니다.

적당한 선행이나 기도만으로 삶과 신앙이 저절로 깊어지지 않습니다. 일상적이고 사소한 죄의 도구로 쓰이는 손과 발, 눈을 조심하는 데에 단호한 결단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어느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단호히 맞설 필요가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4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5-1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창조 때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의도하셨던 불가 해소성과 단일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맺는 모든 관계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기에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사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관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미 ‘둘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와 진심 어린 관계를 맺으면 서로의 생명이 살아나고, 그러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 죽은 상태처럼 되고 맙니다.

관계의 ‘상호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실함’입니다. 영어에서(다른 많은 서양 언어에서도) ‘신실함’을 뜻하는 fidelity는 라틴어 fides(믿음, 신앙)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가 신앙의 선물임을 어원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관계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총인 이유는, 이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여정은 수난과 고통, 죽음과 부활을 반드시 포함합니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불화, 후회와 좌절은 우리가 걷는 구원 여정에서 요구되는 감정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 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은 행복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모든 관계의 시작과 끝은 하느님께서 주관하실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5월 25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0,13-16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절마다 “어린이”라는 낱말이 되풀이됩니다. 이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 ‘파이돈’은 세 살에서 다섯 살 정도의 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이 나이의 아이들이 가지는 특징은 어른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따르며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삶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고, 이렇게 하느님께 의존하는 삶의 자세가 역설적으로 인생을 무엇보다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비결임을 강조합니다.

야고보서의 마무리에 해당하는 독서의 내용이 이러한 역설을 확인하여 줍니다. 독서에서는 고통을 겪으면 하느님께 기도하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찬양 노래를 부르며, 아픈 사람이 있으면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주어지는 상황을 수용하도록 강조하는 것입니다.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온전한 신뢰와 의존으로 단순하게 하느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들과,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를 막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언짢아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보다도 힘들어하는 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사건을 ‘막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비록 그것이 고뇌와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하여 주십니다. 그것이 구원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보편지향기도’인가 ‘신자들의 기도’인가?!

과도한 전례시간 때문에 사라졌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복구

신학생 때 읽었던 책 중 요즈음 다시 읽는 책이 있습니다. 루이 에블리의 「어떻게 祈禱할 것인가」인데, 서두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주 적게 기도하고 보기 드물게 기도하며 또 보잘 것 없이 기도한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몹시 분주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활은 활동과 혼란, 때로는 선행으로 가득 차 있다. … 즉 우리는 일을 정지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며 기도하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 통찰력있는 지적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님은 혼자보다는 이웃과 함께,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1티모 2,1-2; 2코린 1,11; 에페 6,18-19 참조).

이러한 모범에 따라 교회는 이미 1세기 말경부터 세상 구원을 위한 특별기도를 전례 중에 바쳤습니다. 95년경에 기록된 클레멘스 교황 저서에는 고통받는 이, 국가 지도자, 평화 등을 위한 여러 청원 기도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론 후 예비 신자들을 보낸 다음 신자들만 남아서 이 기도를 바쳤는데, 기도 내용은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체로 예비 신자들과 모든 이의 구원이 그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전통이 남은 형태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에서 바치는 ‘보편지향기도’인데, 당대의 기도 내용과 형식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사라진 원인은 전례 시간을 줄이려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전례 역사가 테오도로 클라우저는 「서방 전례의 역사」에서 밝힙니다. 현재의 ‘신자들의 기도’와는 달리 기도의 수가 많았고, 각 기도 다음에 주례자의 본기도가 있어서 다소 장황했으며, 반복이 잦아서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축일 미사가 세 시간 이상 지속되는 것을 문제 삼은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개혁을 통해 신자들의 기도를 없앴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기도’에 대한 회중의 응답이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는 현재의 자비송이 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1400여 년 전 사라졌던 ‘신자들의 기도’의 가치를 인정하여 복구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한 용어인 ‘신자들의 기도’(oratio fidelium)와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기도’(oratio communis)를 ‘보편지향기도’(oratio universalis)로 대신하면서, 누가 기도하고, 어떤 지향으로 해야 하는 지를 더욱 분명하게 했습니다. 이 기도는 세 가지 특징, 곧 ‘하느님을 향한 간청’이며, ‘보편적인 선’을 지향하고, ‘교우들의 참여와 그들의 현실 반영’을 특징으로 합니다.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여 세상 구원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사람임을 이 기도를 통해 실천합니다. 물론 기도한 내용을 살아가려는 실천 의지가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하지요.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새로운 물품의 입고로 이를 정리하기 위한 앵글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장소가 넓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좁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지런히 선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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