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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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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4호 - 부활 제2주일,자비주일 / 24-4-7
입력일 : 2024.04.08 18:20:12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04-01.jpg 조회 : 79
예수님의 부활, 이탈리아 시에나 두오모 성당 내 박물관


2024년 4월 7일 일요일, 제984호 소식지입니다.




주위에 꽃들이 특히 벗꽃, 개나리

산에는 진달래들이 한창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함께

이를 축하라도 하듯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이 우리에게

꽃들처럼 활짝피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4월 7일 (일) [백]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사도 4,32-35 / 제2독서: 1요한 5,1-6 / 복음: 요한 20,19-31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변론

■ 어떤 의심을 대하는 태도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토마스가 모진 말을 내뱉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 다시 나타나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제야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서양말에 ‘Doubting Thomas’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의심하는 토마스’라는 말이지요. 결정적인 증거나 체험 없이는 어떤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 하나로 토마스는 불신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조금 불편합니다. 토마스를 그저 의심 많은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토마스의 의심을 이렇게 희화화해도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쩌면 토마스가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의심의 이유

전승에 의하면 토마스 사도는 후일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할 때 인도 신부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같이 공부하던 프랑스 신학생이 농담을 건넸습니다. “인도의 수호성인이 토마스이니, 아마 인도 신앙공동체는 의심이 많지 않나?” 웃자고 던진 말에 신부님께서는 죽자고 답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답을 주셨지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자는 동안 바쁜 아버지가 급히 집을 다녀갔다고 해봅시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에게 다른 가족 모두가 엊저녁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고 아무리 아이에게 말해도, 아이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요. 혹 믿는다고 해도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인도교회 사람들은 의심하는 토마스의 이야기를, 오히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아이와 같이 깨끗하고 간절해서, 생떼를 쓰는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토마스는 예수님께 뜨겁고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다지방으로 가시겠다고 하자 제자들은 말립니다. 그곳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오히려 다른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제자들이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두려워 숨어있을 때, 토마스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복음은 토마스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만, 다른 제자들이 죽음이 두려워 숨었을 때 토마스는 밖으로 나가서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예수님의 면전에서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토마스가 유일합니다.

과연 토마스의 의심을 불경하다 하겠습니까. 그 의심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사람은 토마스 자기 자신 밖에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토마스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사랑이 아닐까요.

■ 의심도 쓸모가 있나요

우리는 사도들이 건넨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사도들처럼, 주간 첫날 바로 이 주일에 함께 모여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도 토마스와 같이 뜨겁고 순수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과 희망의 이면에는 의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주님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 굳건하게 되기는 하는 걸까요.

토마스가 의심했다면, 우리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신앙 안에서 한 사람은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사람. 어떤 상황과 사고방식을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신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의심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의심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의심은 무한자 하느님을 마주한 유한자 인간의 권리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동안 자신의 의심을 견뎌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의심을 도구 삼아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심은 믿음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 불편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자신의 의도를 덧붙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셨던 것처럼, 토마스는 자신의 부끄러운 의심을 우리에게 내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모든 것을 기록하여, 우리를 믿음에로 이끌고 있습니다.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4월 8일 (월) [백]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태중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으므로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거슬러 가 계산한 것이다.
본디 이 대축일은 ‘3월 25일’로, 올해는 “이 대축일이 성주간에 오면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라는 『로마 미사 경본』의 지침에 따라 오늘 지낸다.

[복음묵상] 루카 1,26-38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봉독되는 성경 본문들이 강조하는 주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제1독서에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은 성모님의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우리말로 “보십시오.”라고 표현된 그리스 말 ‘이두’는 단순히 “네.”로도 옮길 수 있는 낱말입니다. 물론 이 “네.”는 앞으로 감수하여야 할 모든 고난과 도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이 “네.”를 통하여 성모님의 작은 몸에 창조주가 인류 역사의 거대한 질서와 함께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의 육화’는 성모님의 “네.” 이전에 예수님의 “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하느님으로서 위상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나자렛의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을 허락하셨기에 성모님의 허락도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라는 예수님의 고백을 두 번 되풀이함으로써,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하는 뜻에 이미 예수님께서 동의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

언젠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이 장엄한 사건이 나자렛의 작은 집에서 이루어진 것에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 대성전이나 교회의 공적 자리가 아닌 소박한 공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느님의 거대한 계획은 가난하고 누추한 공간에서도 시작됩니다. 성당에 갈 수 없을 때, 기도할 장소가 마땅하지 않을 때, 나의 열악한 환경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내 삶의 자리가 “은총이 가득한 이”가 “기뻐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장소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4월 9일 (화) [백]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3,7ㄱ.8-15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부활 시기 전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집중하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봉독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순 시기에 읽었던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만남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면서 최고 지도층 인사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그분께서 정말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그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이, …… 하늘로 올라간 이”이심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니코데모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의미는 해당 그리스 말의 어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로부터”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은 ‘아노쎈’으로, ‘오래전부터’, ‘처음부터’라는 의미도 있으며, ‘처음부터’라는 뜻은 ‘하느님에게서’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곧 ‘위로부터 태어남’은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에 읽었던 이 내용을 부활 시기에 다시 읽는 이유는, 부활이 하느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일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어남’과 ‘다시 태어남’은 다릅니다. ‘태어남’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다시 태어남’은 참된 구원을 선택하는 의지에서 일어납니다. 이 ‘다시 태어남’의 본보기를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보여 줍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부활을 증언한 초기 교회 신자들은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변에 궁핍한 사람이 없게 하고, 이러한 결단으로 모두 큰 은총을 누립니다. 덜 교만할 때 덜 고집스러워지고, 덜 고집스러울 때 덜 두려워하게 되며, 덜 불안해집니다. 이러한 삶에 초대되는 것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삶, 곧 부활의 삶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4월 10일 (수) [백]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3,16-21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 강조된 것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구원’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빛’입니다. 그 구원은 빛이요 생명이신 분을 통하여 그 빛 안에서 걷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빛이신 분을 세상에 보내셨음이 명백해집니다. 빛으로 나아가는 삶은 독서에 나오는 사도들의 일화로도 제시됩니다. ‘어두운 밤’에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들은 천사들의 인도로 어둠에서 나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밤과 이른 아침, 감옥과 성전이 각기 대비되면서,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극심한 어둠과 억압 속에서도 빛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려 줍니다.

주변이 온통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작은 빛이 그 공간에 들어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빛을 향하고 빛 주변으로 모이게 됩니다. ‘빛’은 그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어둠 속에 있던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 체험이고 저마다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구현되는 개별적 현실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4월 11일 (목) [홍]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묵상] 요한 3,31-36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오늘 복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신지를 궁금해하던 그에게 최종적 답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시는 분”이시고 “하늘에서 오시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적 신원을 가지고 계시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신다.”라고 선언됩니다. 이 우위성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지셨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느님과 친밀하고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 뒤의 내용들이 예수님과 아버지의 친밀함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시고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심으로써 온전한 일체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니코데모가 확인하고 싶었던 예수님의 신원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복음의 마지막에,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가 사실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음이 선포된다는 점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이 관계의 목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길게 이어졌던 니코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한다.”

모든 기교와 술수, 불안과 과장을 그만두게 하는 것은 참된 사랑과 그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랑이 참됨을 확인할 때 우리는 모든 의심과 불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4월 12일 (금) [백] 부활 제2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6,1-15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실제로 유다 라삐들의 문헌에서도 그는 당시 학파의 중심인물로 거론되고 있고, 바오로도 그에게서 공부한 것을 자랑스러워할 만큼(사도 22,3 참조)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그런 가말리엘이 경고합니다.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이 표현에서 그는 사람의 일과 하느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도대체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알려 줍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많은 군중이 먹을 것을 어디에서 구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등장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안드레아의 반문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연약하고 터무니없이 작은 것들, 그래서 남들에게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되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시어 거대한 결과를 이루시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독서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라고 합니다. 모욕당하고 이해받지 못하지만 묵묵히 일하는 것이 예수님의 방식이었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자신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과 그 방법에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리 소모적인 체험만은 아닙니다. 작고 보잘것없으며 쉽게 무시되는 것들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4월 13일 (토) [백]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6,16-2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일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체험한 군중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 하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산으로 가십니다. 제자들도 저녁때가 되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납니다.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지만 노를 저어 목적지로 향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매우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가 역풍 속에 분투하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도 풍랑이 일고 파도가 출렁이는 밤바다의 상황을 그대로 대면하시며 그 역풍을 뚫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분께서 가시고자 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을 트시어, 허둥대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다가오시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자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이미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대로 오늘 독서는 그분과 함께하지 못할 때의 혼란을 묘사합니다. 공동체에 불평과 분열의 조짐이 발생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념하여야 함을 깨닫습니다. 배에 예수님을 모시듯 교회 공동체 안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사도들이 하여야 할 첫 번째 임무임을 인식한 것입니다.

늦은 밤, 낯선 길을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멀리서 다가오는 정체 모를 형체가 주는 섬뜩한 공포가 무엇인지, 그러다 상대가 익숙한 목소리로 “나야.” 하고 말하여 올 때 드는 안심이 무엇인지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하심은 모든 상황을 돌려놓는, 그 자체로 평화이고 사랑인 완전한 구원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하느님의 자비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권하는 자비 기념 방법

말씀에 귀 기울이고 기도하며 자선 실천할 때 ‘자비의 문화’ 완성

4월 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전 세계 교회는 하느님 자비를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4월 30일, 폴란드의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1905~1938)를 시성 하면서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념할 것을 청했고, 교황청 경신사성(현 경신성사부)은 그해 5월 교령을 통해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했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탈출 34,6)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처럼 ‘하느님 자비’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전쟁과 분열 폭력에 시달리는 시대가 자비를 필요로 하고 또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날의 의미가 부각된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당부하시듯이, 자비는 “말로만이 아니라 생활의 증거를 통해 전해져야 한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13항) 2015년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희년을 마치며 교서 「자비와 비참」(Misericordia et Misera)을 발표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밝혔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그 내용을 살펴본다.

▣ 말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의 자비를 언급하며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교황은 성경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전해주는 위대한 이야기”라고 강조한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깊이 배어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창조 때부터 당신 사랑의 표징을 세상에 새겨 넣고자 하셨다”고 밝힌 교황은 “성령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예언자의 말과 지혜 문헌들로 그 역사를 하느님의 온유함과 친밀함을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한다.

교회의 믿음으로 보존된 성경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 신부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며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고 구원의 복음이 모든 이에게 이르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해마다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해서 성경을 더욱 잘 알리고 더 널리 전파하는 노력을 쇄신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렉시오 디비나’를 강조하며 “그 노력 안에는 렉시오 디비나를 널리 확산하는 것도 분명히 포함될 것”이라고 언급한다. “교회의 영적 전승 전체에 비추어 성경을 읽으면, 자비를 주제로 한 렉시오 디비나로 얼마나 많은 부요가 성경에서 샘솟는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으며, 이는 반드시 사랑의 태도와 구체적인 활동을 이끌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교황의 성경 말씀에 대한 강조는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제정의 토대가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도 “복음화는 말씀에 기초하고, 말씀을 경청하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거행하고 증언한다”(174항)며 복음화의 원천이 말씀임을 역설했다.

▣ 전례와 성사

교황은 “우리는 자비를 거행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며 “전례에서 우리는 자비를 거듭 청할 뿐만 아니라 그 자비를 참으로 얻고 체험한다”고 했다. 특별히 성찬례를 강조한다. 성찬례 거행의 시작부터 마침에 이르기까지 자비는 기도하는 회중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사이의 대화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찬례를 시작하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으로 용서를 청하고 나면 바로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미사 전례의 본기도, 감사 기도에서도 자비의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교황은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아버지를 찾는 이는 모두 만나 뵈옵게 하셨나이다’라는 감사 기도 제4양식을 예시하며 “감사 기도에서 사제가 드리는 간구인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소서’는 영원한 생명을 나눠 달라고 청하는 것”임을 전한다.

하느님 자비의 거행은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이 제사는 모든 인간과 역사와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의 원천이다.

모든 성사 생활에서도 신앙인들은 자비를 풍성하게 받는다. 교황은 치유의 성사인 고해성사와 병자성사의 양식에서 자비를 분명히 언급한 것은 매우 의미 있다고 소개한다.

“교회가 드리는 기도에서 나오는 자비는 결코 구두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 효력이 있는 것”이라고 제시한 교황은 “우리가 믿음으로 자비를 간청하면 받게 되고, 우리가 자비를 살아있고 참된 것이라고 고백하면 자비가 우리를 변화시켜 주는 것”이라고 당부한다.

아울러 고해성사를 자비의 거행이 특별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성사로 밝힌다. “고해성사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껴안아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한 교황은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시어 우리가 다시 당신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주신다”고 말한다.

▣ 다른 이들과의 만남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고자 한다면 주위 형제자매들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교황은 강조한다. 자비의 구체적 표징보다 하느님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황은 또 “자비는 본질적이고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행동을 통해 보고 느낄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자비는 모든 것을 그러안는 효과가 있기에 빠르게 퍼져나가며 그 한계가 없다”고 밝힌 교황은 “자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또한 자비의 활동을 사려 깊게 펼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재차 부각시킨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의 회복을 바탕으로 한 자비의 문화 촉진’도 제안된다. 교황은 “이러한 문화에서는 어느 누구도 타인을 무관심하게 바라보거나 우리 형제자매의 고통에 등을 돌리지 않는다”며 “자비의 활동은 품이 드는 일로 그 어느 것도 똑같지 않고, 우리 손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비의 활동을 이룰 수 있다”고 역설한다.

“자비의 문화는 간절하게 기도하고 성령의 활동을 충실히 따르고 성인들의 삶을 온전히 익혀 가난한 이들을 가까이 할때 형성됩니다. 이는 우리의 참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을 우리가 간과하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이주연 기자,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지난 2월 이태리 성물전시회에서 주문한 성물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우선 독일의 전례용품 업체와 이태리 크리스탈 제품들이 입고되었습니다.
일부 고객님께서 차후 의뢰하신 것은 패킹이 완료된 이후여서 이번엔 입고되지 못하였습니다.
곧 이을 주문에 포함 예정입니다.
고객님께 정통의 성물을 선보이고자 노력하는 성물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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