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은 하늘 5월은 성모님의 달"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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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1호 - 사순 제5주일 / 24-3-17
입력일 : 2024.04.08 18:10:31
작성자 : 성물방 File : 24-03-03-1.jpg 조회 : 62
대만 우펑치 성지내의 성당외부 모습


2024년 3월 17일 일요일, 제981호 소식지입니다.





새벽미사 후 성당을 나설 때

환한 아침을 보며

밤의 길이가 점점 짧아짐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아울러 공기의 차가움도 덜합니다.

따뜻한 봄 날을 기대하며

부활하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4년 3월 17일 (일) [자] 사순제 5주일

제1독서 예레 31,31-34 / 제2독서 히브 5,7-9 / 복음 요한 12,20-33

한 알의 밀알

예수님은 씨앗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비유에서 씨앗이 주인공일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지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며 ‘저절로 자라나는 씨’, ‘겨자씨 비유’도 그렇고,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 알 밀알’은 씨앗 이야기에서 독보적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야기꾼 예수님의 말씀에서 씨앗은 생명의 근원으로, 자기희생으로, 그리고 우리네 삶에 채색되는 다양한 이야기가 되어 그림처럼 다가옵니다.

수난의 색채가 점점 짙어 가는 이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주간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울려 퍼진 가르침임을 의미합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올라온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뵙길 열망했고,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필립보에게 만남 주선을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함께 예수께 가서 그들의 청원을 말씀드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을 만나셨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만남을 주선하는 제자들의 요청을 들으시고 뜬금없는 답변을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하시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시며 ‘한 알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과 ‘영광의 때’는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영광 받을 시간’과 ‘한 알 밀알’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닿게 되는 의미가 형성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땅의 이치나 자연적 섭리를 가르치기 위한 말씀도, 보편적 진리 확인을 위한 말씀도 분명 아닐 것입니다. ‘한 알 밀알’이 된다는 것은 ‘밀알’ 자체로 남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 알 밀알만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한 줌의 흙을 만나 썩게 되었을 그때 ‘한 알’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많은 열매가 달리는 새 역사, 새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거룩함의 시작은 ‘한 알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입니다.

덧붙여서 주님은, 자신을 버리지 못하여 열매 맺지 못하는 초라한 삶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12,25)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대조를 보이는 ‘사랑하다–미워하다’, ‘잃는다–보존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열매 맺는 삶’과 ‘열매 맺지 않는 삶’의 의미를 분명히 하십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엇갈리고 일시에 전부를 흔드는 혼란에 빠지신 예수님께서 번민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대면 안에서 확신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양가감정을 체험하십니다. 죽음의 위협을 인지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주할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이러한 내적 동요를 통하여 극적으로 내보이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 나타난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그 고뇌가 요한복음의 이 말씀 저 바닥에 묻어 있는 대목입니다.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도 예수님은 의연하게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며 끝을 향하여 내달릴 준비를 하십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곁에 있던 군중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예수께서는 확신에 차서 아버지의 뜻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당신이 땅에서 높이 들어 올려질 때 모든 이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들이겠다며(12,27-32), 당신의 죽음이 어떠할지, 나아가 당신 죽음이 가져올 구원에 대하여 담백하게 술회하듯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고백에 마음이 아리어 옵니다. 한 알 밀알이 되고자 하시는 주님은 당신이 묻힐 자리가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실 자리가 십자가임을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이로써 ‘한 알 밀알’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생명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품은 표현임이 분명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기도와 하늘에서의 응답 역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지상의 사건이며 동시에 하늘 사건임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죽을 때 생명이 시작되는 신앙의 역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흙의 품에 안긴 씨앗은 썩게 되지만 밀알 속에 깃든 생명의 힘은 많은 열매로 변화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부활 역시 죽음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한 알 밀알로 썩을 자리는 어디인가요?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4년 3월 18일 (월) [자]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8,1-1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여인’(수산나/간음한 여자)과 그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두 악한 존재들’(두 원로/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여인들을 구한 ‘두 의인’(다니엘/예수님)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수산나는 죄가 없지만 욕망을 품은 두 원로의 덫에 걸리고, 간음한 여자는 현장에서 붙잡혀 죽을 위기에 놓입니다.

그러나 수산나가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자,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다니엘을 보내십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도 사람들에게 끌려 와 예수님 앞에 서게 되지만 오히려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치졸함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문장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가 얼마나 경탄스러운지 잘 드러냅니다. 먼저 “돌을 던져라.” 하는 말씀으로 율법을 존중하셨고, “죄 없는 자가 먼저”라는 전제로, 누군가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상처를 줄 수 없음을 복음적 연민으로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약자들에게는 가혹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졸함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덫에 희생되는 나약한 이들의 절규는 하느님을 움직입니다. 약한 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는 권력자들이나 숨 막히는 잣대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율법 학자들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화답송).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3월 19일 (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마리아와 약혼하였다. 그러나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할 마음을 먹었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여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로써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또한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다.

[복음묵상] 마태오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교회의 수호자이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은 예기하지 못한 사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를 모범적으로 알려 줍니다.

먼저,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약혼’은,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이미 부부와 같은 신원을 가진 상태가 됨을 뜻하였습니다. 이 경우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면 율법에 따라 처벌(투석형)되었습니다(신명 22,21 참조).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해서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피의 복수를 면하게 하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자,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거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요셉에게 ‘의로움’(정의)은 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구현되는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언제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통하여 요셉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실천한 이들이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의로움(정의)의 구현은 믿음(신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한마디 저항이나 이의 제기 없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묵묵히 실천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결코 힘없는 공허도 의미 없는 희생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음을 보여 준 진정한 존엄의 삶이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3월 20일 (수)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8,31-4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성주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본질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스승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제자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드러내 주는 일차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일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 자체이신 분 가까이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진리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 답도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자유’를 통해서 발현됩니다. 구속이나 검열 또는 규제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대하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전락하여 버립니다. 교육이 아닌 조련으로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독서는 불가마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로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거부하며 ‘진리’를 선택한 그들은 불가마 안에서도 ‘자유롭게’ 걸어 다닙니다. 그러자 박해의 주범인 네부카드네자르조차 “신의 아들” 같은 존재가 불가마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이고, 이 자유는 ‘진리’에서만 싹트며, 진리는 그분의 ‘말씀’이기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때 진리이신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심지어 지옥의 불가마같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3월 21일 (목) [자]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8,51-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성주간이 가까워지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계약’에 집중합니다. 독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야기하고,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새로운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이 계약이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약의 결과로 “많은 자손”과 “땅”이 약속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새 계약의 결과로 약속하십니다. 옛 계약이 많은 자손과 땅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면 새 계약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내용으로 갱신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곧장 유다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아브라함보다 우위에 계시고, 이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보다 훨씬 중요하고 강력한 계약이 체결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새로움’에 대한 불편함은 유다인들을 분노와 광기로 몰아갑니다. 돌을 들어 던지려고까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발을 뒤로하신 채 성전을 빠져나가십니다. 끝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새 계약의 제물로 내놓으시지만, 이 새 계약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3월 22일 (금) [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성주간을 앞두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폭력’에 대한 내용들을 전합니다.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향하여 주변의 모든 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직역하면 ‘많은 사람’)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도 팽팽한 긴장과 불안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이유는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발과 위협의 긴장감 속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라고 하면서 그 ‘모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모독이라는 낱말은 그리스 말로 ‘블라스페미아’로, 상대의 명예를 훼손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명예를 훼손하시거나 치욕스럽게 하신 일이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될 터인데, 그분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이 아버지를 증언하고 드러낸 일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한 사건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역으로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살기를 내뿜습니다. 논리가 통하지 않으니 물리적 학대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아무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돌을 조용히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성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3월 23일 (토)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1,45-56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를 살리신 뒤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까지 개입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다 지도층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임금’(다윗 가문의 메시아)으로 인정하면, 로마인들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할까 보아 우려를 표합니다.

결국 대사제 카야파가 이 모든 논쟁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에는 희생될 존재의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희생양이 될 존재가 모든 혼란과 불안을 끝내 줄 결정적 동기가 되어 주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이 불의한 결정도 당신 섭리에 활용하십니다. 대사제의 입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임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대사제의 제안에 따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두려움’은 질투와 경쟁심에서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사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은 민중의 작은 움직임도 하나같이 ‘반역’으로 선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성유는 어떻게 만들까?

각 교구마다 일 년에 한 차례 축성
성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에서
예비 신자·병자·축성 성유 축성
재료로는 올리브기름 사용하고
축성 성유에는 발삼 항료 섞어

세례성사 혹은 견진성사를 거행하는 모습을 기억하는 분이라면 이마와 목에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바로 거룩한 기름, 성유를 바르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사 중에 신부님이 세례수를 축복하는 모습은 봤지만, 성유를 축성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성유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요? 성사 중에 성유를 바르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점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부르는 이 말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기름 부음의 중요성 때문에 성령과 기름 부음이 동의어로 쓰일 정도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죽음을 이긴 당신 인성 안에 충만히 ‘그리스도’로 세워지신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넘치게 부어 주시어, 그들이 하느님 아들의 인성과 결합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에페 4,13) 하신다”고 가르칩니다.(695항)

성유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바로 ‘예비 신자 성유’, ‘병자 성유’ 그리고 크리스마 성유라고도 부르는 ‘축성 성유’입니다.

세례수를 만들려면 물이 있어야 하듯, 성유를 만들려면 기름이 있어야겠죠? 성유의 재료는 주로 올리브기름입니다. 올리브기름은 예수님께서 살던 이스라엘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서 많이 사용한 기름입니다. 올리브기름을 구할 수 없다면 다른 식물에서 짜낸 기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기름은 풍요와 기쁨의 표징이었습니다. 기름은 정화와 치유를, 그리고 아름다움과 건강, 힘을 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성사 안에서도 이런 의미들을 찾을 수 있는데요. 세례 전에 예비 신자에게 ‘예비 신자 성유’를 바르는 의식은 정화와 강화를 뜻하고, 병자성사 때 바르는 ‘병자 성유’는 치유와 위안을 의미합니다.

‘예비 신자 성유’와 ‘병자 성유’는 순수하게 기름만을 사용하는 반면,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 때 사용하는 축성 성유는 기름에 발삼을 섞어 만듭니다. 발삼은 침엽수에서 분비되는 끈적한 액체로 만드는 향료의 일종입니다.

이렇게 축성 성유에 향료를 섞는 것은 기름 바를 때에 성령의 현존을 암시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축성 성유를 바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그분이 가득히 지니신 성령의 충만에 더 깊이 참여함으로써,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를 풍기게 해줍니다.

재료가 준비됐다면 축성을 해야겠죠? 성유는 보통 1년 중 한 번, 성 목요일 아침에 거행되는 ‘성유 축성 미사’에서 주교님이 축성합니다. 한 교구에서 1년 동안 사용할 성유를 이 자리에서 한 번에 축성하는 것이죠. 이날 미사가 끝나면 신부님들은 기름을 나눠 받아 각자 본당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성유는 주교님만 축성할 수 있는데요. 다만 미리 준비할 수 있는 다른 성사와는 달리 위급하게 앓고 있는 신자를 위한 병자성사를 위해 필요하다면 어느 신부님이든지 병자 성유를 축성할 수 있습니다.(교회법 제999조 2항 참조)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작년에 이어 올 해에도 새로운 부활 꾸미기 용품이 입고되었습니다.
가격 인상요인이 있지만 최대한 예년의 가격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고객님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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