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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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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64호 -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 23-11-19
입력일 : 2023.11.17 12:26:1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11-03.jpg 조회 : 29
경기도 용인소재 천주교 용인 공원 묘원 성직자 묘지


2023년 11월 19일 일요일, 제964호 소식지입니다.


본당의 행사와 함께

올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이곳 저곳에서

기침소리가 잦아진 것을 보면

요즘이 환절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때

모두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1월 19일 (일) [녹] 연중 제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제1독서 잠언 31,10-13.19-20.30-31 / 제2독서 1테살 5,1-6 / 복음 마태 25,14-30

하느님 앞에 우리의 탈렌트를 내어놓읍시다

보잘것없는 것으로 기적 만드신 주님
작은 일에도 끈기와 성실로 임하며
신앙으로 성장하고 열매 맺어가길

누구나 탈렌트가 있습니다

신부의 외모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잘생기면 사목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보좌신부 시절에 어떤 본당으로 인사이동을 했더니, 그 본당 청년들과 학생들이 엄청 많았답니다. 그래서 ‘이 본당은 학생들이 참 많은 본당이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임 보좌신부님이 굉장히 잘생긴 분이셔서 성당에 나오는 학생 수가 많아졌답니다. 비신자 학생들까지 신부님을 보러 성당에 나올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관심 있어 하는 학생들에게 그 신부님의 이야기는 다른 신부님의 이야기보다 더 잘 들릴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외모 덕을 좀 봤을까요? 아마 예상하시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을 때 안드레아가 하는 말이 저에게도 해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었죠. 예수님은 그 보잘것없는 양식을 가지고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마찬가지로 제 외모도 매력적이거나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쓰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냐면 시골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시골틱하다, 불쌍하다’고들 하는데요. 그 느낌이 도시에서는 별로 쓸 데가 없지만, 시골 본당에서는 아주 유용했습니다.

공소를 짓기 위해 모금하러 다니면서 외모가 쓰임이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불쌍한 신학생’이라는 별명을 교수 신부님이 지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수업에 들어오시면 종종 저를 찾곤 하셨는데, 그 신부님이 동기들에게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기현이한테 잘해. 나중에 기현이가 본당 나가면 신자들이 불쌍하게 생겼다고 선물 많이 해 줄 텐데, 그거 하나라도 나눠 받으려면 미리 잘하라고. 또 만약에 본당에 모금할 일이 생기면 기현이 얼굴만 보여줘 그럼 헌금이 쏟아질 테니.”

일부러 그러고 다니는 건 아니지만 제 외모가 도움을 바라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덕에 -물론 신자들도 함께 노력해서이지만- 공소를 빚 없이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보잘것없는 것들로 더 큰 일을 하십니다. 내 탈렌트를 묻어두기보다, 무엇이든지 간에 그분 앞에 내어놓고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중국에 있을 때 한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한다. 나이가 많다. 외국어가 어렵다는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그저 하루에 한 단어, 한 문장씩만 공부했어도 많이 나아졌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럼 저는 어땠을까요? 저도 1년 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거의 매일 ‘하고 싶은 말’을 작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문하고 선생님께 수정받고, 녹음해 달라고 해서 듣고, 실전에서 써 보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할 줄 아는 말이 조금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지나면서 할 수 있는 말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

물론 듣고 작문하는 수준이 높지도 않고 발음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의 범위가 해가 지날수록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열매가 혼자 다른 지역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방문하고, 현지 성당에서 강론하고 미사 봉헌하는 일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작할 수 있다면 그 너머 자라고 성장하여 열매 맺는 일들을 보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입니다

학부 3학년으로 복학하기 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 온 이후, 외국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는데, 마침 본당에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신부님이 보좌신부님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 영어 공부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아침식사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7시에 사제관에 갔습니다. 주로 제가 적어 온 영어 일기를 말하고 신부님이 고쳐 주시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영작하는 것이나 읽는 연습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이지만, 그때는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몇 주는 신부님과의 아침 영어 공부가 잘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한두 주 날짜가 지날수록 한두 번 빠지기 시작했고, 한 달이 넘어갔을 때는 한 주간을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겨우겨우 아침에 나갔는데, 그날도 신부님은 밖에 있는 신문을 가지러 나와 계셨습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거나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끈기를 가지고 성실하게 하는 모습이에요.”

신부님의 그 말씀이 아직도 마음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의식 중에 무언가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성실함입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1월 20일 (월)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8,35-4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번 주는 제1독서로 마카베오기 상권을 읽습니다. 이 책은 현대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마카베오기는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기원전 176년부터 134년까지 펼쳐진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계 왕조 셀레우코스 4세 통치 말기부터 유다의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의 즉위까지 해당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짓밟았던 비유다계 출신 왕조의 통치부터 유다계 왕조가 재정립되는 역사적 종교적 과정을 서술하기 때문에, 교회 전통은 이 두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

한편 마카베오기 상권은 그리스계 왕조에 대항하였던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두 형제의 무용담을 차례로 엮은 삼부작 드라마입니다. 오늘 제1독서(1마카 1장)는 유다 지방에 그리스 관습과 문화, 곧 이교 풍습을 강요한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불경한 작태를 고발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2장부터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세 아들(유다 마카베오, 요나탄, 시몬)의 반란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과 율법을 수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방 출신 왕조의 핍박과 박해 앞에서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 계약의 수혜자가 되는 길은 철저한 율법 준수와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이교 풍습의 거부로 제시됩니다.

그러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율법 준수’처럼 다른 것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신앙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복음 정신과 반대되는 현대의 ‘이교 풍습’은 모든 것을 돈과 실적으로만 환산하려는 세속적 유혹이 아닐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21일 (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날은 동방 교회의 신자들과 함께,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 은총을 가득히 채워 주신 그 성령의 감도로 성모님께서 아기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이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바쳤다고 전하여 온다.
이날은 본디 6세기 중엽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세워진 새로운 성모 성당의 봉헌을 기념하는 날이었는데, 147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로 선포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2,46-5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에 대한 신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합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방문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과 성경 전통에서 “형제”라는 말은 한 어머니의 자식들뿐 아니라 가까운 친족까지 포괄합니다. 이어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라고 서술하는데, 직역하면 ‘그러고서는 당신의 제자들 위로 당신의 손을 뻗으시며 또 이르셨다.’가 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과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이는 제자 공동체가 스승 예수님의 새로운 가정 공동체라는 신학적 의미로 풀이됩니다. 이 구절에서 ‘하느님’ 대신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제자 공동체가 지닌 가정으로서의 새로운 신원과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혈육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만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포함한 친족에게 면박을 주시기보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더욱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이며 그분의 가정 공동체에 속합니다. 이 공동체의 본질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존재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삶에서 실천하도록 초대받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22일 (수) [홍]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동안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9,11ㄴ-28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연결하여 ‘미나의 비유’를 설명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올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행하실 ‘심판’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처럼 제자들도 하느님 나라가 갑자기 닥쳐오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기대나 조급함을 경계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완수하여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맡겨졌음을 비유를 들어 이야기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아 오려고 길을 떠나는 주인은 열 명의 종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줍니다. 유다 화폐 단위 미나는 백 데나리온이며, 한 미나는 당시 일꾼이 백 일 동안 일하여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한편 돌아온 주인은 종들에게 나누어 준 미나를 어떻게 관리하였는지 묻습니다.

첫째 종은 열 배로, 둘째 종은 다섯 배로 늘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종들에게 각각 고을을 맡깁니다. 그러나 다른 종은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주인은 게으르고 악의에 찬 종의 말대로 그에게 혹독한 판결을 내립니다.

물론 이 비유에서 마지막 종에 대한 주인의 처우가 조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결정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불충한 유다인들에게 내려질 심판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 비유 이야기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냉혹한 심판자’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23일 (목) [녹]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19,41-44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유다교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중심축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신앙생활의 정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 무렵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그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과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에 자신들 삶과 종교의 중심점을 새로 잡으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정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고, 새로이 겪게 될 위기와 절망과 고통의 순간들을 극복하여 나아갈 힘을 성경에서 찾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구세주 그리스도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특히 그들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예루살렘 성읍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통탄하여 마지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지혜롭게 이겨 내는 용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지고 걸어가는 믿음입니다. 삶의 무게에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준비로 채워 나가려면,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24일 (금) [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안드레아 둥락 성인은 1795년 베트남 박닌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23년 사제가 된 그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1833년 박해가 시작되자 베트남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그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116명의 베트남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베트남 교회 역사는 1533년 포르투갈 선교사들과 함께 시작됩니다. 베트남은 한국보다 200년가량 일찍 신앙을 접하였는데, 오랜 교회 역사를 가진 만큼 고통과 아픔도 깊습니다. 베트남 왕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할 것을 강요하며 신자들에게 십자고상을 밟고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은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당신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당신 사랑은 왜 침묵뿐이냐며 울부짖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내가 바라는 사랑과, 내 기도가 실현되지 않는 어둠의 심연에서 믿음은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저주받은 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셨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저 이천여 년 전 과거의 일회적 사건이나 나의 오늘과 아무 상관 없는 사건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모든 미사 가운데, 그리고 우리의 현재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시고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간직합니까? 고통받는 나에게, 무의미함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방황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미사에 참례하면서 나와 하느님과 맺는 관계, 나와 예수님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25일 (토)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20,27-40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사두가이들과 예수님의 부활 논쟁을 다룹니다. 당시 유다교에는 여러 분파가 있었는데, 사두가이들은 죽음 이후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그 나름의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모두 자식 없이 죽었다면, 부활 때 그는 누구의 아내가 되냐는 것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답하십니다. 부활을 믿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대답에 맞장구를 칩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언어로는 하느님 나라를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이해하기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다양한 비유를 쓰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비교할 때 피조물 인간은 상대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구성된 2차원에서 입체적인 3차원을 이해할 수 없고, 3차원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4차원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이성과 지식은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올바르게 소통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 여정을 내딛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활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정진만 안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주님의 기도③
(「가톨릭교회 교리서」 2803~2815항)

내가 거룩해질 때 아버지 이름도 빛난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 자체로 이미 거룩히 빛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거룩하신데, 누가 그분을 거룩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2813) 천사들이 아무리 밤낮없이 주님께 “거룩하시다”(이사 6,3; 묵시 4,8)를 외쳐도 그분의 거룩하심에는 더하거나 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이름’을 이 세상에 거룩히 빛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실화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에서 좀도둑 제리는 런던 폭탄 테러에 휘말리게 됩니다. 결국 자신 때문에 아버지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을 용서하고 감옥에서도 기도로 살다가 14년 만에 사망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제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경찰의 협박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결국 힘든 법정 싸움 끝에 자신과 가족,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무죄를 선고받지 않았어도 무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여전히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처럼 거룩하게 된다면 이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게 됩니다. 이런 의미로 주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라고 명하셨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 3,2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심으로써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십니다.”(2809) 그렇게 세상에 드러난 거룩함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요한 5,43 참조) 그래서 아버지와 하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하시고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며 아버지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음을 증명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요한 10,25 참조)

예수님은 우리 또한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요한 17,19 참조) 내가 거룩해짐으로써 아버지의 이름도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성령을 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성자를 잉태하신 성모님처럼 거룩해집니다. 이제 성체를 영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품은 존재로 행동할 차례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처럼 하려는 것이 교만이라고 여깁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마르 2,7 참조)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권위로 죄를 용서하고 하느님 자녀들을 탄생시킵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주고 죄를 용서하는 가톨릭교회가 가장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고 하느님만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함으로써 교회의 선교 사명에 참여해 우리 자신도 거룩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2814 참조)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 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수능 시험이 지난 주에 치뤄졌습니다.
많은 수험생들을 위한 선물도 받으시는 분의 노력이 헛되이지 않기를 바라며 보내드렸습니다.
모든 수험생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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