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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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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2호 - 연중 제31주일 / 23-11-5
입력일 : 2023.11.03 18:19:2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11-01.jpg 조회 : 149
경기도 용인소재 천주교 용인 공원 묘원


2023년 11월 5일 일요일, 제962호 소식지입니다.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왠지 모르게 11월이면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특히 레지오 단원은 선종하신 단원의 묘소를 방문하여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도 전통에 따라 일정을 잡아 다른 분과 함께

방문하고자 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1월 5일 (일) [녹]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말라 1,14ㄴ-2,2ㄷ.8-10 / 제2독서 1테살 2,7ㄴ-9.13 / 복음 마태 23,1-12

낮은 자 되어 이웃을 섬기라는 주님의 가르침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향해
위선적인 신앙 꾸짖으신 예수님
남에게만 엄격한 이중성 버리고
관용 베푸는 사제의 자세 갖추길

신앙생활의 큰 적, 위선과 이중성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못배운 백성들을 향해 7가지 행복을 선언하신 이후, 당대 부유하고 가방끈이 길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7가지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전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 선 발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르침이라기보다 도전장이요 고발장과도 같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고 예리하며 강력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업자 입장에서 섬뜩섬뜩한 느낌마저 듭니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말씀 선포의 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지만, 그 말씀들이 온통 저만을 위한 맞춤형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공격의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가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가장 역겨워하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침과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따로 삶 따로’라는 이중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조용한 익명의 자선과는 반대되는 자랑하고 과시하는 자선, 골방에서의 겸손한 기도가 아닌 길모퉁이에서의 가식적인 기도, 산발(散髮)에다 침통한 얼굴로 하는 보여주기식 단식.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 한 가지를 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 23,5)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 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내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오늘 내 발밑을 내려다보면 늦었지만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높은 자리!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높은 자리! 다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 결국 그 자리는 낮은 자 되어 이웃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자리라는 것.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 11-12) 오늘 꽤나 거친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이 뜨끔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말씀 한 말씀의 지향점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희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은 더욱 신랄하고 강경합니다.

“신분으로 사제인 자는 많으나 행동으로 사제인 자는 적습니다. 자리가 사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자리를 만듭니다.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제가 다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이는 모두 사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사제는 자신의 사제직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을 것이며, 사제직에서 오는 영예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 사제들은 철저하게 이중적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는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고 극도로 엄격한 삶의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엄격하게 굴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엄격하고 준엄한 재판관이 돼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온화하고 관용을 베풀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들의 삶은 겉꾸미지 않아야 하며, 위선적이고 이중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요란스러운 의상이나 장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용과 본질에 충실하기에, 외적인 것, 부차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치장할 유일한 장식은 선행입니다. 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의 눈으로 볼 때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예수님의 덕행이었습니다.

“사목자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목자, 온유하고 참을성 있으며 자비로운 사목자를 원합니다.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가난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는 사목자를 찾습니다. 만일 한 사목자가 군주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행동한다면, 우리 교회에 그보다 더 큰 악몽은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1월 6일 (월) [녹]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2-14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26-27 참조). 그리고 자유 의지를 주시어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한과 그들을 다스릴 권한까지 허락하셨습니다(창세 2,19-20 참조). 그런데 이러한 자유에는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불순종할 자유까지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불순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 의지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순종마저 당신 자비를 베푸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 자신이 베푼 자선이나 선행에 보답할 수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은 인정받고 싶어 하고, 보상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세적 보상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오는 보상은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으로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먼저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 고통받는 ‘변두리 이웃’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때에, 당신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모두 갚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7일 (화) [녹]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5-24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오감으로 온전히 파악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잔치를 벌이기 한참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대되었음을 알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잔치가 다 준비되면 주인이 다시 종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을 찾아가 직접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미리 잔치에 초대받았으면서도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첫째 부류는 구약 성경이 증언하듯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았기에 그들 스스로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이어서 주인은 종들에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그 결과 잔칫집은 뒤늦게 초대된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이 참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구원의 길임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며 보편된 구원을 실현합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이는 초대에 합당한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품격에 맞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에서 거행될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마다 일상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8일 (수) [녹]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4,25-3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루카 복음 14장 26절에서 ‘미워하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선호하다’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나를 선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보통은 돌잔치 때 돌잡이를 합니다. 손에 무엇인가 쥐고 있는 어린아이는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을 잡으려면 꽉 쥐고 있는 손을 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하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자기 의지나 생각이나 계획으로 가득 차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머무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며 주님으로, 예수님을 스승이며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자기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남편, 형제와 자매, 자녀와 손주,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자신이 움켜쥐고 있는 것들,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들, 그것을 버리면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들, 바로 그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머무르실 작은 공간과 짧은 시간을 봉헌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실 것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9일 (목) [백]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 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12세기부터 11월 9일에 지내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로마에서만 지내다가,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기록한 대로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 교좌에 대한 사랑과 일치의 표지로서 로마 예법의 모든 교회로 확대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2,13-22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 전통은 324년에 로마의 대성당이 봉헌된 사건을 왜 기념할까요?

이 미사 중에 사제가 바치는 고유 기도문에서 단서를 발견합니다. 먼저 본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 몸소 뽑으신 살아 있는 돌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하느님의 교회에 은총의 영을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소서.” 이어서 영성체 후 기도를 보면, “하느님, 교회를 통하여 저희에게 천상 예루살렘을 미리 보여 주셨으니, 오늘 이 성사에 참여한 저희가 은총의 성전이 되고,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은 오랫동안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거주하던 교회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지상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천상 교회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부분적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분 영광에 참여하지만, 언젠가 천상 교회, 곧 천상 예루살렘에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와 함께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방인입니다(1베드 2,11 참조).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입니다(필리 3,20 참조).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돌로 지어진 성전이 드러내는 지상 교회에서 살지만, 천상 교회에서 영원히 지낼 영광스러운 날을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나그네이며 이방인인 우리는 성사로 주어지는 일상 속 은총에 힘입어 오늘도 천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갑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0일 (금) [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성 대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에트루리아(현재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온전한 신앙을 확고히 보존하고 교회의 일치를 강력히 수호하며, 이민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거나 무마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교회 안팎을 아우르는 많은 공로로 ‘대 교황’이라고 불리게 된 그는 461년에 선종하였으며,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에게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루카 16,1-8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오늘 복음에서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협잡꾼’ 또는 ‘사기꾼’처럼 묘사된 집사의 모습을 주인이 칭찬하는 것으로 비유 이야기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루카 복음사가는 독자들에게 ‘협잡꾼’이나 ‘사기꾼’이 되라는 것일까요?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서 ‘협잡꾼’의 모습 그 자체를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세속적 이익을 좇아 재빠르고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비유 속 집사의 모습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자녀들도 그처럼 부정한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는데,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데 능숙하고 현명하여야 한다는 교회 공동체를 향한 신앙적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듯 교회 공동체는 천사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의 공동체,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공동체, 성령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삶 속에서 복음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적극적입니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11일 (토) [백]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마르티노 성인은 316년 무렵 판노니아(현재 헝가리의 솜바테이)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다음 군인이 된 그는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다.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신비 체험을 하고 나서 곧장 세례를 받았다. 그 뒤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뽑혔다.
착한 목자로서 모범을 보이고,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성직자들을 교육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397년 프랑스 중부의 캉데생마르탱에서 선종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그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16,9ㄴ-15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오늘 복음의 요점은 ‘재물을 어떻게 이용하여야 하는가?’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재물에 관하여 어떤 입장입니까?

먼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풀이됩니다. 곧 재물이 이 세상을 그것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미에서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애덕 행위를 강조하는 의미까지 폭넓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는 ‘재물을 소유하고 있던 이가 죽을 때’ 또는 ‘세상의 종말이 닥칠 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는 ‘너희가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여질 것이다.’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함께 묶어, ‘세상의 종말이 닥치게 될 때, 너희가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여질 것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영원한 거처로 맞아 주시는 분’은 간접적으로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한편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구절에서 ‘섬기다’로 옮긴 그리스 말은 종교적 신학적으로 ‘노예살이를 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 결과 엄격한 의미에서 복음 내용은 재물에 대한 일반적 가르침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서 저자는 재물을 대할 때와 하느님을 대할 때 각각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비교하며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재물에 각각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합니까?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시간과 노력과 재화를 엉뚱한 것들에 쏟아붓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진만 안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주님의 기도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759~2776항)

성경의 핵심 담긴 가장 완전한 기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의 저자 젠 브리커(Jen Bricker)는 두 다리가 없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딸아이를 버렸습니다. 그녀는 미국 일리노이주 작은 마을의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그녀의 양부모는 그녀와 세 아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도록 가르쳤습니다. 그 집에서는 단 하나의 규칙이 있었는데 “절대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브리커는 어린 나이부터 야구, 농구, 체조 등 스포츠를 즐겼고, 마당에서 트램펄린을 타며 곡예 동작을 배웠습니다. 전문적인 텀블링을 습득한 그녀는 결국 일리노이주 텀블러 챔피언이 됩니다. 패럴림픽에서 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월드투어를 하며 30m 높이 실크 로프에 매달려 다양한 퍼포먼스 공연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현재 모습은 이전의 자신이 믿어온 자기 정체성의 결과입니다. 동물에게 키워져 자기를 동물이라 믿는 아이가 인간처럼 두 발로 걷고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정체성을 주는 것이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여길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고 청했습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를 한다면 그 제자들은 요한의 수준만큼 회개하고 믿고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는 유일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전해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2765)입니다.

결국 ‘무엇을 바라느냐’가 ‘내가 누구냐’라는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처럼 우리도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할 수 있어야 진정 주님의 자녀답습니다. 성경에는 하느님 자녀가 바라야 하는 모든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성경에 실려 있는 모든 청원을 살펴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그 안에서 주님의 기도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연유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2762)라고 말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불과 몇 마디 안 되는 말들 속에 어쩌면 그렇게도 관상과 완덕이 다 들어있는지 나는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마치 이것만 배우면 다른 책들은 소용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완덕의 길」 37,1)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순서대로 청하기도 합니다”(2763)라고 말합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마치 물 위를 걷는 베드로처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를 한 번 바치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것을 나도 바라고 행하기 위해 그 일곱 가지 청원에 온 마음으로 깊이 잠겨야 합니다. 그분의 바람과 나의 바람이 마음으로부터 일치할 때만 진정 하느님의 본성과 하나가 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하듯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비로소 피조물이 창조자가 원할 수 있는 것을 원하게 되고 창조자의 본성 수준으로 살게 됩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 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서서히 성탄을 준비합니다.
가정용 구유 와 성당용 구유가 다음주에 입고가 됩니다.
고객님께 시즌에 맞는 성물을 준비하는 성물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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