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게시글 보기
제961호 - 연중 제30주일 / 23-10-29
입력일 : 2023.10.27 17:57:57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10-05.jpg 조회 : 172
가을날의 미리내성지 평화의 모자상

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제961호 소식지입니다.



지난 주 많은 본당에서

본당 차원 또는 단체로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저희 본당도

코로나 이후 700여명이 참여하여

오랜만에 함께 성지를 걸으며 성인들을 기렸습니다.

가을의 청명함과 성인들의 발자취를 느끼며

마지막 가을을 이웃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10월 29일 (일) [녹]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탈출 22,20-26 / 제2독서 1테살 1,5ㄴ-10 / 복음 마태 22,34-40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풍요롭지만 경쟁에 휩싸인 사람들
이분법적j인 이기심의 폐해 벗어나
주님 주신 사랑의 계명 지켜가길

아름다운 잔치

지난겨울, 베를린에서 본 어느 자매님의 고희연은 감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어려웠던 시절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습니다. 짧은 어학과정을 거치고 병동에 투입된 파독 간호사들의 수고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가녀린 몸으로 육중한 체구의 독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파김치가 되도록 애쓰던 기억, 그러다 체력이 달려 닭백숙이라도 해 먹으려는데 독일어로 닭이 뭔지를 몰라서 달걀을 들고 가서 얘 엄마를 달라고 했다던 에피소드, 어떻게든 아끼고 모아서 고향 부모님께 논밭을 사드리고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보냈던 이야기들…. 듣다 보면 함께 울고 웃게 되는 사연들이 한아름입니다.

고희연의 주인공인 자매님도 수고 끝에 이제는 은퇴생활을 즐기며 성실히 본당에서 봉사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고희연을 해드리겠다고 세 아들이 계획을 세웠는데, 정작 주인공이 극구 사양하니 아들들이 꾀를 냈습니다. 성당 강당에 깜짝 파티를 준비해 놓고 어머니를 납치하다시피 모셔왔지요. 가족과 친지들이 각자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김밥이며 잡채며 요리로 상을 채운 가운데, 세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노래를 하고 시를 써서 읽었습니다. 어린 손녀가 비뚤비뚤 손으로 그려 만든 축하 카드를 받으며 환하게 웃는 자매님의 모습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잔치 다음 날, 어김없이 봉사하러 오신 자매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자매님, 어제 잔치는 너무도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좋은 잔치를 왜 안 하겠다고 고집 부리셨어요?” 자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 은총으로 이렇게 가정을 꾸렸고 애들도 잘 커서 행복하게 지내지만, 같이 고생하던 언니들, 친구들 가운데는 그런 복을 못 누리는 분들도 계셔요. 그분들 마음 아플까봐….”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시는 자매님 앞에서 저도 말을 잊었습니다. 나는 누리지만, 또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분들 속사정을 헤아리며 자제하고 삼가는 마음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너희도 이방인이었다

오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시고 십계명을 주시는 대목(탈출기 20장)에 이어지는 법전의 일부입니다. 20장에서 23장까지 이어지는 이 법전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규율하는 다양한 규정이 등장하는데, 규정 전체를 관통하는 뜻은 네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안 겪도록 돌보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개구리 올챙잇적 잊지 말라는 가르침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강대한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덕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약한 이들까지 빠짐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돌봄과 인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나와 엮일 것이 없는 이방인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이 내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느님 덕분에 얻은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 사랑을 전해주고 물려주는 데 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전하는가

내가 겪은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시련의 경험은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 고통의 기억 속에 ‘나는 고생했지만 내 자식만큼은 고생 안 시키겠다’는 마음이 우리 사회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끼니 걱정에 시달리거나,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놓치거나, 일만 하느라 옆도 돌아보지 못했던 어려움을 미래 세대가 겪지 않도록 애쓴 결과, 오늘의 한국사회는 물질적인 면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십리 길을 걸어가던 세대가 값비싼 자동차로 막히는 거리를 물려주고, 끼니 걱정하던 동네를 미식가의 천국으로 만들어 준 것과는 별개로, 정작 중요한 것,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를 기억하고 전해주는 데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원하던 풍요는 얻었으되 이웃을 여전히 경계와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마음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거두고 이룬 것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점을 놓치기 때문에, 내 성공의 결실을 독점하고 남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못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학벌 사회의 폐해를 뼛속 깊이 체험하고 자란 사람들이 입시 경쟁의 광풍을 잦아들게 하는 대신, 더 지독한 경쟁의 프레임을 강요하는 학부모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요컨대 고통의 기억, 시련의 기억만 남은 사람은 그 자신부터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을 온통 경쟁자와 잠재적인 적으로 가득 찬 전쟁터로 인식합니다. 내 사람과 남들이라는 이분법에 갇혀서 남들이 도전할 수 없는 나만의 성벽을 쌓아올리는 일에 골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삶을 구가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나와 남 사이에 구별의 벽을 세우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메마르고 빈한한 마음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근본을 짚어주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계명은 의무이기 전에, 우리가 시련의 고통만 남기고 사랑의 기억을 증발시켜 버린 초라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지 돌아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가 남기고 전해야 할 것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10월 30일 (월) [녹]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여정을 이어 가는 예수님과 회당장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열여덟 해 동안 병마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 주셨는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회당장의 비판에 대한 예수님의 논거는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이며, 논증의 방법은 점증적입니다. 율법에서 길 잃은 동물을 다시 돌아오게 하며 넘어진 소나 나귀를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이 허용되듯이(신명 22,1-4 참조), 안식일에 소나 나귀에게 물을 먹이러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은 허용됩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볼 때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을 고쳐 주는 행위가 율법을 위반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 준수와 같은 종교적 의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시며(루카 6,9 참조) 안식일의 참다운 의미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해방’과 ‘휴식’은 안식일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회당장은 “위선자”입니다. 그는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 조문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하였습니다. 안식일 규정에 담긴 정신, 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마르 2,27 참조).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회당장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회당장을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3년 10월 31일 (화) [녹]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13,18-21
<겨자씨는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소개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비유는 각각 겨자씨와 누룩을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두 비유는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한 쌍의 비유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대한 전반부 이야기(9,51―13,21)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팔레스티나 지방에 사는 주민들에게 친숙한 식물인 겨자씨를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작은 씨앗이 자라서 새들이 둥지를 만들 수 있는 나무로 성장하는 현상을 예시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신께서 갈릴래아에서 보여 주신 ‘현재’의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게 될 ‘미래’의 모습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누룩의 비유가 소개됩니다. 이 비유는 누룩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서 덩어리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설명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느님 나라가 지닌 생명의 힘은 세상 전체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빵을 만드는 데 밀가루는 꼭 필요한 재료이지만 누룩이 없다면 빵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의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필연적 성장과 그 역동적 현상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지성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겨자씨의 성장은 신비로운 신적 권능의 결과입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이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비유로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여러분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정진만 안젤로 신부)


2023년 11월 1일 (수) [백]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특히 전례력에 축일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억하고 기린다.
이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어 609년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 때부터 서방 교회에서도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5월 13일이었는데, 9세기 중엽에 11월 1일로 바뀌었다.
교회는 이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우리와 천국의 모든 성인 사이의 연대성도 일깨워 준다.

[복음묵상] 마태오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신앙의 목마름은 우리를 가끔 엉뚱한 곳으로 이끕니다. 특별한 미사, 특별한 성서 공부, 특별한 기도 모임, 특별한 신심, 특별한 치유는 인간적 부족함을 채워 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인장은 하느님 백성에 속함을 드러내며,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 이들을(에제 9장 참조) 가리키기도 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뽑은 총합으로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입니다. 제2독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상황과(요한 1,12; 3,5; 2코린 3,18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될 종말 때의 상황을(콜로 3,3-4 참조) 나누어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한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선포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소유함, 위로를 받음, 땅을 차지함, 흡족해짐, 자비를 입음, 하느님을 뵙게 됨, 그분의 자녀라 불림이 예수님께서 신앙인에게 약속하신 행복의 선물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아 우리의 신앙을 성찰합니다. 가톨릭 신앙은 사회, 문화, 역사를 넘어 인류에게 선물로 주어진 보편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약함은 이 보편 신앙보다는 구체적이며 특별한 신심 행위를 찾게 합니다. 세례 때 받은 신앙의 선물을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가꾸며, 얼마나 성장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2일 (목)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하여 왔는데, 이는 15세기 말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성탄과 같이 세 대의 미사를 봉헌하였던 풍습에서 유래한다.
1748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이 풍습을 인정하여 특전으로 확대시켰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1,25-30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위령의 날 둘째 미사에서 듣게 되는 하느님 말씀은 신앙인들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누구에게 주어지며, 무엇을 약속합니까?

제1독서 지혜서는 구원받을 신앙인들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신앙인은 주님을 신뢰하는 이, 거룩한 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로 묘사됩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범죄는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의 순종과 십자가 희생은 모든 신앙인에게 구원과 은총과 의로움 그리고 생명을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복음에서 구원받을 이들을 미리 선택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소개됩니다. 이 감사 기도에서 구원받을 신앙인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말하는 이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처럼 부족한 이들로 그려집니다.

이처럼 구원은 인간적 부족함과 나약함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 비록 세속적인 모습에 더 가까울지라도 거룩함의 길을 걷고자 애쓰는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영혼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에게 베푼 은혜와 더불어 인간적 잘못이나 실수도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산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완벽함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창조주 하느님과 위로자 성령의 친교와 일치 안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3일 (금) [녹]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14,1-6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 규정은 구약 성경의 오경에 소개된 모세의 율법에 속합니다.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탈출기 이야기는 유다인들에게 하느님의 구원 체험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과 맺은 계약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포함하는 모세의 율법은 당신 백성을 향한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하느님 사랑에 무감각해지고 바빌론 유배의 아픔까지 겪습니다. 그 과정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에 세부 규정을 더합니다. 안식일에 관한 규정들도 이에 해당합니다.

본디 안식일은 창세기에 나오듯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를 마치시고 마지막 날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거룩하게 지내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근본정신인 하느님 사랑의 마음은 어느새 잊히고 법 규정만 남게 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린 채 세부 규정에만 집착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나눈 대화인 복음 속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에서 비롯합니다. 미사는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재현하며 현재화하는 공적인 전례입니다. 미사의 근본정신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3년 11월 4일 (토)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성인은 153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아로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쌓는 데 힘썼다.
1560년 외삼촌인 비오 4세 교황이 평신도인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자, 뒤늦게 성직자 교육을 받고 1563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밀라노의 대주교로서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6,12-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셨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마태오 복음서와(10,1-4 참조) 마르코 복음서와(3,13-19 참조) 함께 열두 제자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시몬과 유다의 이름도 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명은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이고, 다른 한 명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러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셨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에서 열두 제자는 사도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보냄 또는 파견을 받은 이’로서 파견하는 이에게 종속됩니다. 파견하는 사람 없이 파견되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주님께서 부여하시는 권한으로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도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루카 복음 9장 1-2절에서 드러납니다.

루카 복음 전승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을 한 가지 꼽는다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셨다는 묘사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6장 12절에서 소개하면서 사도의 선발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임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시어 당신의 협조자를 선택하셨습니다. 기도의 두 번째 결과는 예수님의 선교 활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세우시고 활동을 위한 힘을 얻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기도와 활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선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활동의 ‘배경’이 됩니다.
(정진만 안젤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기도의 싸움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734~2758항)

올바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요한 16,23)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나요?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받지 못해 우울해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해서 다 받으셨을까요? 성경은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께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라고 청하셔도, 결국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청원을 언제나 들어주시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들 때, 자녀다운 신뢰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2756)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받게 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유튜브에는 ‘1년째 축축한 화장실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라는 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누군가가 자기 집에 심각한 위해를 가한다고 믿습니다. 할머니는 집에서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화장실에 숨어서 살아갑니다. 영상 제작진은 할머니를 돕고 싶었으나, 할머니는 자신을 지켜달라고만 합니다. 제작진은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며칠이 지나자 할머니는 미안한 마음에 거실로 나와 제작진에게 처음으로 근사한 밥상을 차려줍니다. 드디어 피해의식에서 해방되어 화장실 밖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할머니는 제작진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청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기도가 이뤄지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교리서는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가 이용할 만한 수단으로 이해하는가, 아니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이해하는가?”(2735)라고 묻습니다. 자신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부모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 안 됩니다. 다만 기도하면 받게 되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은 자신들이 ‘청하는 어떤 것’이 아닌 ‘부모의 존재 자체’입니다. 부모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교리서는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자녀다운 신뢰와 대담성을 지녀 예수님의 기도와 튼튼히 결합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얻으며, 이러저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곧 모든 선물을 지닌 성령 바로 그분을 받게 된다.”(2741)

성령을 받으면 하느님을 받은 것입니다. 유혹자는 우리가 하느님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유혹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노력을, 그리고 유혹자의 계략과 우리 자신에 맞서는 싸움을 전제로 합니다.”(2752) 우리가 올바로 청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당신 자신을 내어주셔서 결국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까지도 알아서 다 챙겨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물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더 집착”(2740)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성령으로 임하시는 하느님 나라만을 청합시다. 자녀는 부모의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마태 6,33 참조)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 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대림초가 입고되었습니다. 지난 해에 대림초를 일찍부터 요청이 있어 부지런히 준비하였습니다.
고객여러분께서 전례에 맞는 성물을 준비코자 노력하는 성물방입니다.




상호명:임마누엘/대표 송철영 라파엘, 사업자등록번호 : 206-17-24777, 통신판매업번호 : 하남 제0378호,
[12902]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한강로 135 미사강변 스카이폴리스 나동 415호
☎02-447-7396, 010-3161-4511

Copyright ⓒ 성물방 All Rights Reserved. Since 2004
성물방은 "www.smb.kr"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