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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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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6호 - 연중 제25주일 / 23-9-24
입력일 : 2023.09.22 16:09:13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9-04.jpg 조회 : 77
하남 미사지역 구산성지

2023년 9월 24일 일요일, 제956호 소식지입니다.




추석 연휴가 있는 주간입니다.

이번 주는 긴 연휴로 나들이 계획이 많은 듯 합니다.

근처의 성지를 둘러 보면서

조상들의 넋과 선조들의 신앙을 함께 기리며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9월 24일 (일) [녹] 연중 제25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제1독서 이사 55,6-9 / 제2독서 필리 1,20ㄷ-24.27ㄱ / 복음 마태 20,1-16

삶의 자리에서 경계의 벽을 세우고 있지 않습니까?

가진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한
소외된 이들의 인간 존엄성 붕괴
경계 밖에 있는 이들 품어 안을 때
경쟁과 불안의 암흑 벗어날 수 있어

경계 낮추고 허물기

마태오복음 21장에 보면, 탐욕에 눈이 먼 소작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종을 때리거나 죽입니다.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탐욕에 눈이 먼 소작인들에게 매 맞고 죽임을 당하는 소수의 종을 보며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소외된 이들인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숙자들, 장애인들, 무의탁 독거노인들, 이주노동자들, 이 땅에 시집온 동남아 여성들, 그리고 가난한 조부모와 사는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사람들’의 탐욕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많은 직장인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쫓겨나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대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기 위해 빚을 내서 학교에 다니고 졸업하지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무의탁 독거노인들과 장애인들은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하지만, 그들을 위한 복지 예산은 부족하고 건설과 개발 분야의 국가 예산만 늘어납니다.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들은 최저임금과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한국 사회에 대해서 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말을 합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전진하지 않으면 뒤로 미끄러지게 돼 있다. 지금 한국사회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백수가 되지 않고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은 죽어라 ‘무한 학습 경쟁’을 벌여야 하고, 노동자가 되어 기업의 착취 대상이 될 젊은이의 양육과 교육 비용을 그 부모가 떠안고 있는데도 착취로부터 발생하는 이득은 모조리 기업인이 가져가는 이 상황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이 사회는 더욱더 경쟁, 불안, 공포의 암흑으로 떨어질 것이고 더욱더 흉악화, 폭력화, 범죄화될 것이다.”(박노자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참조)

복음에 나오는 포도밭의 상황처럼 때리고 죽이는 살벌한 사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과 마음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과 ‘천막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고, 마르코복음 9장에 보면 ‘제자 공동체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호수아는 그 경계를 분명히 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예수님은 그 경계 밖에 있는 이들까지도 품어 안는 뉘앙스의 말을 합니다.

모세는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0-41)라고 말합니다. 경계 밖에 있는 이들까지도 품어 안는 말씀인데요. 오늘 복음에 더 분명히 표현돼 있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주인과 같이 후한 마음이라면 어떨까요? 신학교 삶을 되돌아보면, 알게 모르게 서로를 후하게 대하고 품어 안는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학장배 축구대회가 있었습니다. 학년별 대항 축구대회인데요. 보통 축구를 잘하는 친구들이 주전 선수로 뛰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축구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경계가 생길 수 있는데요. 반 체육 시간이 되면 놀라운 일들이 생깁니다. 축구 잘하는 친구들이 수비로 빠지고, 평소에 후보 선수였거나 수비했던 친구들이 공격합니다. 경계 너머의 자리에서 마음껏 뛰놀고 골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음악회를 할 때도 경계가 허물어지는 체험을 합니다. 보통 음악회를 하면 노래를 잘하거나, 악기를 잘 다루는 친구들만 참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도 그중에 하나였고 음악회는 구경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동기 중에 몇 명이 가을 음악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모아서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음치들’이라고 이름을 짓고 두 번 참여했습니다. 처음 참여했을 때는 2부로 구성된 노래를 했었고, 3학년 때는 아카펠라도 했었습니다.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음악적인 재능으로 놀라움과 감동을 주지는 못했지만, 많은 신학생에게 웃음을 줬습니다. 또 음악적 재능이 없는 친구들도 음악회에 함께 참여해서 어우러지고 일치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거리극이라는 학년별 연극도 있었는데 그때도 끼가 있고 재주 있는 친구들만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저같이 아무 재주가 없는 친구들에게도 역할이 있었습니다. 연기를 못하는 저에게 주어진 배역은 연극의 ‘시작과 끝’을 외치는 겁니다. 7년 내내 그 역할을 맡았고, 마지막에는 박수도 받았습니다.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로 공부 잘하는 친구 혼자 공부를 마치고 끝내지 않습니다. 공부를 먼저 끝내면 내용을 설명하는 작은 모임이 있기도 했습니다. 1등을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함께 배우고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경계 밖의 친구들을 챙기는 마음일 텐데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경계 밖에서 일을 찾지 못해 힘들어하고 있는 이들을 울타리 안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후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공동체는 어떨까요?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내 것을 주장하며 경계의 벽을 높이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후하고 넉넉하게 베풀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습니까?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9월 25일 (월) [녹]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8,16-18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씨가 뿌려진 땅에 비유되던 네 부류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결국 마지막 부류의 사람들(좋은 땅)만이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8,15) 열매를 맺습니다. 이 비유의 설명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도 ‘말씀을 듣는’ 주제와 깊이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곧 그저 듣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들은 말씀에 기꺼이 응답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행동으로 열매 맺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빛을 내며 집 안을 환히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들어오는 이들이 그 빛은 보게 한다.’는 것은 아직 말씀에 맛 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발하는 빛을 보게 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열매 맺은 사람들이 아직 어둠 속에서 헤매는 이들의 길을 비추며, 그들을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밝히는 등불은 그릇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여 세상을 비출 수 있고,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점점 많은 사람에게 퍼져나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비록 지금은 숨겨져 있고 감추어진 듯 보이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그 모습을 훤히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의 실천으로 결실을 거두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 우리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감추어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요 형제들, 곧 당신의 참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6일 (화) [녹]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8,19-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에즈라기의 말씀을 듣습니다. 에즈라기는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수많은 유다인이 조국을 떠나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십 년가량 지난 뒤,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가 유다인들의 귀향을 허락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에즈 1장 참조), 유배자들은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에즈 2장 참조).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의 우선적 과제는 무너진 주님의 집을 복구하는 일, 곧 폐허가 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재건 공사를 시작하며 그들이 느꼈던 벅찬 감격과 기쁨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그러나 그 뒤 공사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못합니다. 그들을 시기하던 적대자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일을 꾸미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였습니다(에즈 4―5장 참조). 그러나 예언자들의 격려로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중단되었던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성전 건축을 무사히 마친 유다인들이 성전 봉헌식을 장엄하게 거행하고, 성대하게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성전을 향한 그들의 열정을 묵상하여 봅니다. 유다인에게 성전은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곧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 모시기’였습니다.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느님과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되찾고자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새 백성이 된 우리도 ‘하느님 모시기’를 그 어떤 일보다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신비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영성체로 모시는 바로 우리 각자가 이제 하느님의 새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7일 (수) [백]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빈첸시오 드 폴 성인은 1581년 프랑스 랑드 지방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60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1617년에 가난한 이들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자선 단체인 사랑의 동지회, 전교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
1660년에 선종한 빈첸시오 사제는 1737년에 시성되었다.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은 그를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오늘날 수많은 이가 성인의 영성을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사랑의 씨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열두 제자 파견 이야기는, 그에 앞선 이야기들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8,1-18 참조).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셔서는 어떤 이에게 들린 마귀 떼를 쫓아내셨고(8,26-39 참조), 다시 갈릴래아로 돌아오셔서는 하혈하는 부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8,40-56 참조). 하느님 나라 선포와 구마, 그리고 치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이 세 가지 활동은 오늘 복음에서 고스란히 열두 제자가 펼치게 될 활동으로 제시됩니다. 그들이 파견되는 목적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처럼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끼리 알아서 해결하라고 일을 떠넘기듯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파견하시기 전에 그에 맞는 능력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일체 지니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그 무엇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파견 여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서, 심지어 입고 먹고 자는 의식주마저도, 온전히 주님께 의존하여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이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 머물게 된 곳보다 더 좋고 쾌적한 장소를 찾아다니지 말아야 함은 그 또한 하느님께서 마련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대접과 환대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하라고 파견된 제자들은, 그분께서 일하신 방식대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선교 여정을 온전히 아버지께 의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제자들도 선교에 필요한 능력은 물론이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제반 사항 모두를 하느님께 받는다는 마음으로, 그분께 전적인 신뢰를 드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게 투신하여 살 자신이 없는 나에게, 하느님에 대한 신뢰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오늘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8일 (목) [녹]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9,7-9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 우리에게 전하여 줍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많은 이가 그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알아보았지만, 헤로데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목을 베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 마찬가지로 놀라운 행보를 보이시자 일부 사람들은 헤로데가 죽인 그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한 매우 특별한 예언자였습니다(2열왕 2,1-18 참조).

말라키서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 곧 종말이 오기 전에 그가 돌아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예언합니다(말라 3,23-24 참조). 이 말씀 때문에 엘리야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유다인들 사이에 강하게 생겼는데,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엘리야로 오셨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위의 세 의견은 모두 예수님을 예언자적 인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맞지만 정확한 인식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의 신분을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그분의 본모습을 베드로 사도는 제대로 알아보았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9,20).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바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가운데, 오직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터 그분의 모든 것을 목격한 유일한 인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보려면 그분을 따르는 제자 여정에 제대로 참여하여야 합니다. 따르다 말다를 되풀이하다 보면, 예수님을 띄엄띄엄 알아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대충 비슷하니까 괜찮다고 주장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엘리야’도 ‘옛 예언자’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9일 (금) [백] 한가위

오늘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 한가위입니다. 계절의 변화를 섭리하시고 수확의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며, 이웃과 서로 나누며 살아온 조상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본받읍시다.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도 나눔을 실천하기로 다짐하며 주님의 잔치에 참여합시다.

[복음묵상] 루카 8,1-3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타작마당은 곡식으로 가득하고, 확마다 햇포도주와 햇기름이 넘쳐흐르리라”(제1독서). 한 해 동안 공들인 수고의 결실을 거두는 명절 한가위입니다. 오늘 밤 떠오를 한가위 보름달처럼,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수확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추석은 풍성함을 만끽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거둔 풍요로운 결실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여 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부유한 농부가 그 소출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표현들 속에서 우리는 그의 관심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여기서 ‘모아 두다’ 또는 ‘쌓아 두다’라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유한 농부의 관심사는 수확한 것을 모아 두고 쌓아 두는 일이었습니다. 모아 둔 것을 앞으로 어디에 쓸지에 대한 고민은 크게 없어 보입니다. 그의 고민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장소가 좁다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전 곳간들을 허물고 더 큰 곳간들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데에 그치고 맙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으는 데만 마음을 쓸 뿐,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아 두고 쌓아 두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바는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되도록 현세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여 봅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30일 (토)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7년 무렵 달마티아의 스트리돈(현재 보스니아의 그라호보 근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 말과 그리스 말을 공부한 다음 트리어에서 정부 관리로 일하였으나,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379년 사제가 되어 382년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말로 번역하였는데,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가 그것이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성경 주해를 비롯하여 많은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베들레헴에서 세상을 떠났다.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루카 9,43ㄴ-45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겪으실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런데 수난을 예고하시는 상황이 그런 암울한 미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 특히 어떤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강력한 영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 놀라워하는(9,37-43 참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에게서 환영을 받으셔야 할 ‘사람의 아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운명을 겪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곳은 산 밑입니다. 그들은 조금 전, 산 위에서 매우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옷이 하얗게 번쩍이며,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그들을 덮은 구름 속에서는 이러한 음성이 들려 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 예수님께서 지니신 거룩함과 영광의 극치를 선보이는 이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제자들이,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으셔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루카 복음서 저자는 이러한 제자들의 몰이해가 감추어진 신비 때문이라며 그들의 책임을 조금 덜어 주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잘못을 명확히 지적합니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음을 의미합니다.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묻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신앙의 길이 내가 바라는 바와 크게 다를까 보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감추어진 신비를 열어 주시는 분께 끊임없이 그 뜻을 찾고 이해를 바라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소리기도
(「가톨릭교회 교리서」 2697~2704항)

우리가 불러주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기도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되새기는 시간입니다.(2697 참조)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경찰이 바로 앞에 있는데 신호 위반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일단 보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거꾸로 나아갑니다. 보이지 않아도 일단 보인다고 믿고 먼저 말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차차 들리게 되고 나중에는 온전히 보게 됩니다.

오랜 어둠 속에서 갑자기 밝은 빛으로 나오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도 차근차근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먼저 말하고 다음엔 듣고 마지막엔 보는 과정의 기도법을 소개합니다. 곧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2699 참조)입니다. 소리기도는 주님께 말하는 것이고 묵상기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관상기도는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선 우리가 말을 걸 수 있도록 당신의 거룩한 현존을 숨기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침기도, 저녁기도, 삼종기도, 성무일도, 묵주기도 등을 통해 그분께 말을 합니다. 소리기도의 내용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든 하면 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저녁마다 성당에 기도하러 들르십니다. 그런데 10초도 안 돼 나오십니다. 본당 신부님은 매일 너무도 짧게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를 ‘기도할 줄 모르시는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좋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예,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몰라서 매일 성당에 들러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매일 ‘요셉아, 내가 왔다’ 하고 가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할아버지는 비록 짧게 기도했지만, 누구보다 깊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현존을 확실히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말씀드리는’ 그분을 의식하면 할수록, 내적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가장 내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 해도, 소리기도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내적인 기도가 관상기도입니다. “소리기도는 관상기도의 최초의 형태”(2704)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처럼 ‘주기적’으로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2698 참조) 밥 먹고 잠자야 하는 필요성을 아는데 그것을 주기적으로 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랜 시간 주님께 말을 걸지 않는다면 현존에서 멀어지고 죄에 가까워집니다. 반면 위 이야기의 할아버지처럼 주기적으로 주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묵상기도를 거쳐 그분을 뵈옵는 관상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라며 우리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조금은 몸을 숨기시고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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