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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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5호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입력일 : 2023.09.15 20:00:04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9-03.jpg 조회 : 21
경기도 안성소재 미리내성지내 김대건 신부님상



2023년 9월 17일 일요일, 제955호 소식지입니다.




올 해는 비가 자주 내리고 있습니다.

과일이나 농작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고 하여

가을비는 쓸데없는 비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상속에서

순교 성인들의 믿음의 정신을 이어 받고자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찾아 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9월 17일 (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지혜 3,1-9 / 제2독서 로마 8,31-39 / 복음 루카 9,23-26

하느님의 편이 되어 드립시다

의인의 고난·고통은 ‘십자가의 축복’
세상 구원 위해 살았던 예수님처럼
주님만을 믿고 당당하게 살아가길

어느새 사제 생활이 서른 해를 꼽습니다.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오늘, 해마다 적었던 제 강론들이 누더기 같았습니다. 나름의 최선을 기울이며 때로는 상상하며 이런저런 글들을 적으면서 기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도통 글머리가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경솔히 다룬 것만 같고, 숭고한 분들의 삶을 이렇다 저렇다 지껄여댄 허물을 어쩌나 싶었습니다. 이래야 한다고 혹은 저래야 할 것이라 숱하게 주장했지만 기실 제 삶은 모자라기 이를 데 없음에 마음이 내려앉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이 모든 것이 홀로 저지른 것이 아님을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주님의 것이기에 저의 전부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늘 세상의 온갖 기쁨과 역경에 함께하시니, 그 사랑에 저를 통째로 던지려 합니다. 물론 모든 책임을 그분께 떠넘겨드릴 수는 없기에 오늘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이해와 양해를 청하겠습니다. 이 글은 다만 하느님께로 함께 나아가는 믿음의 길을 걷는 인간의 소회일 뿐임을 밝힙니다.

오늘 강론을 준비하면서 마음이 꺾였던 가장 큰 이유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제 삶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이 거룩한 주일에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며 의인의 고난과 고통을 ‘피해야 할 십자가’가 아닌 ‘십자가의 축복’이라고 믿는 분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을지 의문이 들고, 얼마 계실 것 같지 않아 속상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전혀 소용이 되지도 못할 글을 ‘머리 싸매며’ 적어야 하는 게 슬펐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을 가장 확실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자란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설명할 권한을 주셨습니다. 또한 세상의 어느 누구든지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도록 도우시며,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살아내기를 참으로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십자가’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수도 없이, 세상의 갖은 어려움과 고통과 역경과 박해를 견뎌내고 이겨낼 힘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늘 함께하시며 ‘우리 편’이 되어 주실 것을 다짐해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확실하고 질기고 탄탄해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으며 그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다는 진리를 거듭 선포해주셨습니다. 진정 주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믿음을 생활화하시는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하느님 사랑에 의한 것입니다. 이 작은 가슴에 그분을 담아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 또한 하느님 은혜의 결과입니다. 무엇보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당신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것에 너무너무 죄송해하는 마음까지도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 믿음보다 크신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희망과 기쁨으로 평화를 누리며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너무도 보잘것없습니다. 이런 우리 모습 탓에 세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힘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쓰러져 짓밟히는 것은 모두 우리 잘못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의 대축일을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목자도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죽기까지 주님께 충성을 바쳤던 한국교회의 성인들께 칭송을 바치며 그 삶을 본받기를 청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려고 세상 것들을 포기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우리 모습에 주님은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이 좋고 복된 날에도, 켜켜이 쌓인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 순간,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하느님의 심정은 또 어떠실까요? 세상의 모든 운명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니, 깊이깊이 마음을 앓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더욱 당신을 향한 믿음인을 애타게 찾을 것입니다. 오직 순명하기 위해서 세상사에 초연한 그 누군가를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세상이 하느님의 벌을 받는 것으로 오해할 만큼, 역경과 박해와 헐벗음을 당하면서도 당신을 기억하는 믿음인을 찾으실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해드리기 위해서 파멸도 고난도 개의치 않는 담대한 믿음인이 몹시도 그리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았던 예수님의 방법이었고 주님의 편으로 살았던 순교자 모든 분들의 삶이었기에 진정 그렇습니다.

이 복된 주일, 주님을 향한 길은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통로가 없다는 진리를 깊이 새깁시다. 모든 시련까지도 그분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훈련임을 기억합시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상황도 방관하지 않으신다는 것,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품어, 당당하게 복음을 살아갑시다.

참 단단한 믿음 생활로 주님께 기쁨을 드렸던 우리나라의 모든 순교자께 무릎 꿇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전구를 청합니다. “한국교회를 위해서 빌어주소서!”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9월 18일 (월)[녹]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7,1-10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루카 복음서에서 백인대장의 종을 고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처음 일으키신 기적입니다. 카파르나움에 주둔하던 백인대장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죽을병에 걸린 자기 노예를 살려주십사 간청합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몸소 찾아가지 않고, 유다인 원로들을 보내어 대신 청하도록 합니다. 우리 정서에는 예수님을 몸소 찾아가는 것이 더 진정성과 예의를 갖춘 청원일 터인데, 이방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유다인들의 정서를 헤아려 보면, 오히려 그러한 간접적인 청원이 훨씬 예를 갖춘 방식이라고 생각하였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유다인 원로들은 그 백인대장을 극찬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유다인들이, 그것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원로들이 이방인을 칭찬하는, 매우 드문 경우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으로 향하고 계실 때, 그가 다시 친구들을 보내어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부정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기를 꺼리는 유다인의 정서로 볼 때, 백인대장은 정말로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감히 제집에 그분을 모실 자격도 없고 이방인으로서 그분을 만나 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며 스스로 한껏 낮추는 자세는, 그의 청을 들어주실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긴 유다 원로들의 높은 평가와 대비되며 백인대장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만으로 제 종이 나으리라는 믿음은 주님께서 지니신 권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는 차별 없이 당신을 믿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기에, 이방인 신분인 우리도 그분을 주님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로 주님을 실제로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도 감탄하신 백인대장의 세심한 배려와 겸손한 마음과 굳건한 믿음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영성체 전에, 백인대장이 지녔던 마음으로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19일 (화) [녹]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7,11-17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오늘 복음 이야기는 엘리야 이야기(1열왕 17,8-24 참조)와 많이 유사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라는 성읍에 들어서며 과부 한 사람을 만났듯이(1열왕17,10 참조), 예수님께서도 나인이라는 고을의 성문에서 어떤 과부를 만나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었듯이(1열왕 17,22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만나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특히 다시 살아난 아이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공통된 장면에서, 두 이야기의 표현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함에서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하려는 루카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엘리야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 엘리야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아이를 살리려고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세 번에 걸쳐 자기 몸을 아이 몸 위에 펼친 다음, 다시 주님께 부르짖는 등 조금은 복잡한 치유 과정을 거치는데(1열왕 17,20-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요청(1열왕 17,18 참조)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부도, 고을 사람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이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애처로이 울고 있는 과부에게 느끼신 그 연민의 정이 죽었던 이를 살아나게 한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어떤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까? 이미 그 딱한 사정을 굽어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주님의 위로 속에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참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연민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는 이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0일 (수) [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7,30 참조)을 “이 세대 사람들”이라 일컬으시며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장터의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것은 혼례식과 관련된 놀이이고, 곡을 하며 우는 것은 장례식 놀이입니다. 문제는 한쪽에서는 놀자고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 전혀 호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피리를 불어 대도 춤을 추어 주지 않고,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곡을 하여도 우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에서 비유의 뜻은 더욱 명확하여집니다. 놀이를 제안하는 이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시고, 그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던 요한은 마치 장례식 놀이를 제안한 격이지만, 그들은 요한의 금욕주의적 태도를 비난하며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먹고 마시는 일에 비교적 자유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혼인식 놀이를 제안하신 격이나, 그들은 예수님을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먹보나 술꾼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배척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에, 곧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단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초대에 혹시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응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1일 (목)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성 마태오 사도는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 또는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9,9-13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르심이 응답에 앞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는 관계의 주도권이 우리가 아닌 하느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불러 주시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부르심은 그 자체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특별히 죄인들을 위하여 마련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불편하게 여기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는 자칫 예수님께서 의인들을 부르시지 않겠다는 말씀으로 오해될 수 있으나,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부르심에서 제외되는 이는 사실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사를 찾지 않듯이,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죄인인 우리가 은총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삶으로 그 본보기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스승께서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셨듯이(11,29 참조), 우리도 겸손과 온유를 다하여야 하고, 스승께서 당신 사랑으로 끝까지 제자들을 인내하시고 참아 주셨듯이(17,17 참조), 우리도 형제들의 부족함을 인내하고 참아 주어야 하며, 스승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셨듯이, 우리도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여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요한 17,11.20-24 참조).

마태오 사도는 비록 세리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어 죽기까지 스승을 닮고자 노력하였던 참된 제자였습니다. 오늘 축일을 기리는 성 마태오 사도를 본받아 우리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2일 (금)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루카 8,1-3
<예수님과 함께 있던 여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일행 가운데 여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이 여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고 그들의 역할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여 예수님의 선교 여정에서 그들의 공헌이 컸다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기서 ‘시중들다’는 뜻의 그리스 말 동사 ‘디아코네오’는 좁은 의미로는 식탁에서 시중드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그 밖의 다른 봉사나 물질적인 지원 등의 넓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들의 재산’을 봉헌할 뿐만 아니라 그 여정에 몸소 함께하면서 일행에게 필요한 여러 도움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헌신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강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 여인들이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사람들이었다고 전합니다. 특히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던 여자였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마귀 들린 상태가 매우 심각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강력한 속박에서 마리아를 벗어나게 하여 주셨고, 구원을 경험한 마리아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며 누구보다 그분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은 그분께서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늘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23,49.55-56 참조). 그리고 빈 무덤에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고(24,1-12 참조), 부활하신 그분을 가장 먼저 뵙는 영광을 얻습니다(마태 28,9-10 참조).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동행에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예수님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여서 소극적인 것은 아닌지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우리를 초대하시고, 그 만남 안에서 우리가 직접 맛보고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기도 안에서 얻게 되는 강렬한 체험을 바탕으로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에 우리가 더욱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3일 (토)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풀리아의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에서 사목적 열정으로 봉사 직무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의 영성을 지도하고 참회자를 화해시켰으며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섬겼다.
그는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몸에 지니고 고통을 느꼈다.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복음묵상] 루카 8,4-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평지 설교(6,17-49 참조)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합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행복과 부유한 이들의 불행을 선언하셨고(6,20-26 참조), 원수를 사랑하고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하셨으며(6,27-36 참조),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6,37-42 참조). 그리고 설교를 마무리하시는 오늘, 이 모든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시려고 비유를 하나 들어 설명하십니다.

강가에 집을 짓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서 반석을 찾고 그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을 짓습니다. 홍수로 불어난 강물이 들이닥치더라도 단단한 기초 덕분에 그 집은 끄떡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런 기초 공사 없이 맨땅에 집을 짓습니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완전히 무너져 버립니다. 여기서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듣지만 행동에 옮기지 않는 자를, 단단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 말씀을 행동에 옮기는 이를 가리킵니다.

말씀을 듣는 일은 모든 이가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사람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물과 같은 말씀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남이 나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하여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땅을 깊이 파서 반석을 찾고 그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아 집을 짓는 일은, 사실 대단히 번거롭고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맨땅에 지은 집과도 겉보기에 큰 차이가 없어서 우리는 이 기초 작업을 건너뛰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듭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기초 없는 집이 속절없이 무너지듯, 우리가 듣기만 한 말씀도 결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바위에 떨어진 씨앗의 운명을 기억합시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8,13).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기도의 길잡이
(「가톨릭교회 교리서」 2683~2696항)

가장 확실한 기도의 스승은 ‘교회’

우리는 기도를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배워야 할까요?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기도를 배울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덕의 길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의 손에 자신을 맡길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스승에 그 제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2690)라고 말합니다. 올바른 기도의 스승을 길잡이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기도의 스승이 ‘교회’뿐임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내려주시며 교회를 세상에 파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참으로 성인들의 처소입니다.”(2684)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하늘 나라에 들어간 증인들, 특별히 교회가 ‘성인’으로 인정하는 이들의 모범적인 삶과 전해 오는 그들의 글 그리고 그들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살아있는 기도의 전통에 참여하고 있습니다.”(2683)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토니 던지는 1996년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악의 팀으로 평가받던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신임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던지의 가르침으로 최악의 팀이 강력한 팀으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강팀으로 변모한 버커니어스가 플레이오프에 나가 큰 경기를 할 때면 매번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2년 연속 슈퍼볼 경기에 진출하지 못하자, 던지는 해임당합니다. 다행히 한 해 동안 참담한 시즌을 보낸 ‘인디애나폴리스 콜츠’가 그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합니다. 그러나 버커니어스 때와 같은 문제가 계속 발생하였습니다.

콜츠가 정규 시즌을 14승 2패의 역사상 최고 성적으로 마친 2005년 성탄절에 끔찍한 비극이 닥쳤습니다. 던지의 큰아들, 제이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힘이 팀 전체를 감쌌습니다. 모두가 감독을 위로하기 위해 전적으로 감독을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 다음 해에 콜츠는 슈퍼볼을 향한 자신들의 열망을 두 번이나 좌절시켰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역사에 남을 명경기로 역전승하며 승리합니다.

피는 성령과 같습니다. 피의 힘이 작용하는 팀은 하나로 일치합니다. 그 팀 안에 있었던 선수들은 진정 한 감독 아래 한 팀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의 피가 흐릅니다. 그 피의 힘을 얻으려면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교회와 연결되지 않고 지나치게 사적으로 치우치다 보면 교회 안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에서도 멀어집니다. 고독한 은수자라 해도 그를 그 수준으로 만든 스승과 친구, 그리고 제자도 반드시 존재합니다. “마치 엘리야의 ‘정신’이 엘리사와 세례자 요한에게 전해졌던 것처럼”(2684) 개인이 받은 특별한 은총은 공동체에 통합되고 친교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당신 아드님의 피와 같은 성령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와의 “친교에 대한 열망이 참다운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표”(2689)가 됩니다. 교회에서 성인들에게 배워야 하고 부모에게 배워야 하며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나의 기도가 교회의 기도가 되고 교회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될 때 기도의 여정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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