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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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3호 - 연중 제22주일 / 23-9-3
입력일 : 2023.09.01 18:09:2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9-01.jpg 조회 : 49
경기도 안성소재 미리내성지


2023년 9월 3일 일요일, 제953호 소식지입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하지만

아직 오후에 더운 날 입니다.

올해는 비도 많이 오고

그에 따라 피해도 컷던 한 해 입니다.

그래도 우리 모두의 합심으로

슬기롭게 가을을 맞이해야겠습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9월 3일 (일) [녹]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예레 20,7-9 / 제2독서 로마 12,1-2 / 복음 마태 16,21-27

자신을 버리고 스승을 따르는 길

노력에 대해 보상만을 바라는 이들
고통도 하느님의 큰 뜻으로 여기며
교만함 떨치고 주님의 길 따라가야

빛나는 성취의 순간

힘든 산행 중에 정상에 올라 스스로를 대견해하듯, ‘돌이켜 보면 굴곡은 있었으되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싶은 때가 있습니다. 왕후장상의 삶이나 천재의 삶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게 디뎌온 걸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때에’(마태 16,21), 그런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고 물으셨고,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16) 하고 대답했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을 뽑아서 두 해가 넘도록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어부 시몬이 드디어 예수께서 하느님이며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믿음을 고백하는 제자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고 ‘하늘나라의 열쇠’(16,19)를 맡기십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약속에 한껏 고무되었을 터입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나를 알아주시는구나, 힘든 수련이 이제 빛을 보는구나!’

계산이 어긋나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는 산통을 깨는 말씀을 베드로에게 던지십니다.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16,21)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말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었지요. 구세주 메시아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며 승리를 구가하리라는 자신의 계획과 구상이 일그러집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스승의 말씀을 반박할 수밖에요. 복음서 본문에서 ‘반박하다’(16,22)로 번역된 ‘에피티만’(ἐπιτιμᾶν)은 꾸짖고 경고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베드로가 외칩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도리를 잊고 자기의 뜻에 주님이 휘둘리기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내 계획과 생각에 어긋나는 현실

베드로의 충격과 탄식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의 계획과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꾸려갑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면 하느님과 세상이 그에 맞는 보상을 해주시리라고 기대하면서요. 물론 그 기대에 걸맞은 보상을 맛볼 때도 있습니다. 내가 최고라고 으스댈 정도는 아니라도, 어디 가서 목소리 낼 정도는 된다고 생각할만큼 말이지요.

그러다 보면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러게 진작 내 말대로 하지’ 하며 혀를 차고, ‘저 사람은 당할 만하니까 당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보는 내 틀을 벗어난 일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세상이 내 계획과 계산대로 흘러가야 정의롭고 올바른 것인 양 착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그렇게 생각대로만 되던가요. 어느날 남의 일로만 알았던 고통과 고난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닥쳐올 때, 우리는 베드로의 탄식을 반복합니다. ‘하느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왜 내게, 내 세상에 이런 풍파를 일으키십니까?’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뜻을 따라야 한다는 교만이 눈과 귀를 가립니다. 하느님뿐만 아닙니다. 내 사람이라고 믿었던 이들도 원망합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너한테 쏟아부은 정성이 얼만데!’ 상대방의 삶을 인정하지 않고 내 삶의 방식대로 따르기를 강요하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내 세상’에 갇힌 사람은 결코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세상의 주인도 아니면서, 언젠가는 다 내려놓아야 할 인간이면서, 우리는 하느님 행세를 하고 원망하며 탄식합니다.

하느님의 뜻

참된 제자의 삶은 내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내 생각과 내 계획이 꺾이는 고통을 겪습니다. 오늘 첫째 독서의 예레미아 예언자의 행보가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예레 1,5)고 선언하셨지만, 예레미아는 자신이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 때문에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 20,8)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에 충실하면 세상도 그에 맞춰 변하리라는 기대가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좌절의 고통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는 시련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서 불타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합니다.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이렇게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제2독서가 말하는 것처럼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로마 12,2) 있게 됩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

내가 계획하고 바라는 세상은 고작해야 내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생각에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남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 좁은 세상을 까마득히 뛰어넘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아버지의 영광”(마태 16,27)은 세상 누구의 예상과 계획보다 큰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우리 삶에 닥쳐온 고통,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내 계획과 뜻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하느님의 더 큰 뜻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일 것입니다. 내 껍질을 깨는 데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이 없이는 더 큰 곳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9월 4일 (월)[녹]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루카 4,16-30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연중 제22주간부터 우리는 평일 복음에서 루카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 첫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향하십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신 뒤에 고향을 방문하시는데(마태 13,54-58; 마르 6,1-6 참조), 루카 복음서에서는 고향 방문이 그분 공생활의 시작에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서의 나자렛 이야기는 예수님 활동의 서막을 올리며 앞으로 전개될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여 미리 제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으로 주님의 영이 내리셨다는 말씀은 세례를 받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로 성령께서 오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3,21-22 참조). 그는 앞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전개되는 예수님의 활동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메시아의 앞길은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는 듯 보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전혀 다른 수난과 패배의 길을 걷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겪을 그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장엄한 시작을 알리는 단락임에도 그 시작부터 위기에 놓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는 모습은 뒤에 당신의 백성에게 배척당하실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의 시작(나자렛 설교)에서 마침(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여정이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천 년 전 사람들에게 구원의 실현을 알리시던 이 말씀은 같은 복음을 듣고 있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5일 (화) [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루카 4,31-37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서(어제 복음) 앞으로 펼치실 구원 사업의 성격을 미리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활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 나타나는 첫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적으로 구마(驅魔)를 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직무를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다시 말해 초자연적이고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그분의 활동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세상의 권세를 휘어잡던 사탄의 세력은 큰 위기에 부딪습니다. 더러운 마귀에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자신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당신’(예수님)과 ‘저희’(마귀들) 사이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거룩함’과 마귀의 ‘더러움’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됩니다. 이야기 속 마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특성을 공유하시는 분(‘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자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이심을 알고 극도로 경계하며 그분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보다 더러운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구마 행위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리라.’(4,18 참조)는 나자렛 설교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더러움의 세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어 거룩한 나라, 곧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거룩하신 예수님과 더러운 악령들 사이에 어떠한 접점도 찾을 수 없듯이,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도 악의 세계와 어떠한 것도 공유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2코린 7,1).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6일 (수) [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4,38-44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예수님의 일과는 어떠하셨을까요? 루카 복음서는 그분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하루를 소개합니다(4,31-44 참조).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때마침 회당에는 더러운 마귀에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분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집니다(어제 복음).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향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한 열에 시달리던 그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병을 앓던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고을 밖 외딴곳으로 향하시는데, 군중은 그곳까지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마시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명을 밝히시며 그곳을 떠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등,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하루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쁜 일정을 보내셨던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음식을 드실 겨를조차(마르 6,31 참조), 편안히 쉬실 겨를조차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당신의 처지를 두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사셨을까요?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고,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고, 치유되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안식일에도, 곧 유다인이 일하여서는 안 되는 그날에도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표현이 무척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일하고 계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하루는 어떠한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날마다 좀 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 특히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면 어떨까요?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7일 (목) [녹]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가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에 나타납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참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만난 어부들에게 당신을 따르라 하시니 그들이 순순히 그분을 따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그러한 어부들의 모습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는지,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를 카파르나움 활동 다음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 카파르나움에서 일어난 기적들, 특히 자신의 장모가 치유되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 됩니다(어제 복음). 그리고 오늘 복음이 전하는 고기잡이 기적도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순히 따를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어부가 듣기에 짐짓 불쾌하거나 황당한 명령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아니, 나자렛 출신 주제에 어업에 대하여 알면 얼마나 안다고 감히 그물을 내려라 마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밤새 노력하였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린다 한들 허탕을 칠 게 너무 뻔하지 않은가?’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으나 베드로는 어찌하였든 해 보려고 합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본 일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기적을 강렬하게 체험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사람을 낚으라.’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저합니다. 사실 요즘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신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시큰둥한 반응뿐이라며, 오히려 선교를 하면서 받는 상처만 크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였기에 그분께서 지니신 놀라운 능력을 고백합니다. 겉보기에는 척박한 땅이거나 텅 빈 바다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곳에서도 거두어들이시는 분의 권능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땅에 씨를 뿌리고, 바다에 그물을 내리는 일을 합시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8일 (금)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성경에 동정 마리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성모 신심이 초대 교회 때부터 계속 이어지면서 동방 교회에서 먼저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로마 교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9월 8일)을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로 정하고, 7세기부터 기념하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1,1-16.18-23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일찍이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부흥시킬 메시아의 탄생을 두고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제1독서).

유다의 보잘것없는 고을이었으나, 가장 위대한 임금 다윗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베들레헴, 바로 그곳에서 다윗의 뒤를 잇는 임금, 곧 이스라엘의 메시아께서 탄생하시리라는 예언입니다.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이 구절을 직접 인용하면서 메시아에 관한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루어졌음을 명확하게 밝힙니다(마태 2,6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심을 증명하는 족보와 더불어 그분께서 태어나시게 된 경위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장구한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 한 인물이 결정적으로 공헌하였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그녀를 ‘해산하는 여인’이라 부르며 그 해산의 순간부터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 예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전하며,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하느님 뜻에 순종한 이 위대한 여인을 통하여 감사하게도 온 인류는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을 지냅니다. 성모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준비하신 계획이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구원 여정에 꼭 필요한 분이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선물로 다가오신 분의 탄생을 기뻐하며 오늘을 경축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9일 (토) [녹] 연중 제22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6,1-5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오늘 독서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그분과 원수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원수들과 화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길을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과 우리가 온전한 관계를 되찾도록 그 사이에서 중개자로서 사명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겪으신 수난과 죽음이 이 화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분의 육체로 여러분과 화해하시어, 여러분이 거룩하고 흠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해의 중개자로 뽑히신 이유는 바로 그분께서 지니신 충만함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 가까운 “그리스도 찬가”(콜로 1,15-20)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15절 참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창조된 만물은(16절 참조) 온갖 충만함이 머무는 그분 안에서(19절 참조),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20절 참조).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에 하느님과 원수로 지내던 시절을 청산하고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화해는 충만함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고귀한 피의 대가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악행에 마음이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면, 이는 화해 이전에 하느님의 원수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고 이미 화해를 이룬 우리는 언제나 그분 안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나서며, 우리의 걸음은 계속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기도의 길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663~2672항)

예수님 ‘이름으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은 한 하느님이시지만, 구별되는 각기 다른 분들이십니다. 그래서 어떤 분에게 기도하는지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되어야만, 성부께 다다르게 된다”(2664)라는 순서를 가르칩니다. 파견된 자를 거치지 않고 파견한 자에게 가면 파견된 자를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교회를 파견하시며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십니다. 교회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아버지를 향하지만, 그 기도 안에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기도를 포함합니다.(2665 참조)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 ‘기도의 길’이라고 한다면 ‘성령’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시는 것일까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나를 하나로 이어주는 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2670) 교회는 성령으로 행해지는 칠성사가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왔다고 가르치는데(766, 1225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영국 축구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멕시코에서 이적해 온 하비에르 에르난데스란 공격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등 뒤에는 에르난데스가 아닌 ‘치차리토’란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사실 치차리토는 14살 때부터 친구였던 미구엘 치차리토의 이름이었습니다. 둘은 열심히 노력해서 빅클럽에서 함께 뛰자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르난데스가 치차리토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고 맨유라는 빅클럽에 들어왔지만,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던 치차리토는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에르난데스가 팀 동료들과 파티를 하고 있는데 치차리토가 에르난데스에게 술 한잔을 하자고 전화했습니다. 약간은 치차리토를 무시하게 된 에르난데스가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하자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3일 뒤 에르난데스는 치차리토의 사고 소식을 듣습니다. 혼자 술을 마시러 술집에 들어갔던 치차리토가 다리에 총을 맞은 것입니다. 에르난데스는 병실로 들어가 다리가 잘린 치차리토를 보게 됩니다. 둘은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이후 에르난데스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대신 친구 이름인 치차리토를 새기고 경기를 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치차리토에게 로봇 다리를 선물하였고 지금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에르난데스가 치차리토의 이름으로 경기를 뛰는 것은, 치차리토 덕분에 자신이 그 정도까지 올라올 수 있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받는다는 말은 상대가 나를 위해 해 준 모든 피 흘림을 인정하고 감사한다는 뜻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한다면 그리스도의 피 흘림인 성령 덕분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기에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며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라고 하십니다.(2671 참조)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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