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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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2호 - 연중 제21주일 / 23-8-27
입력일 : 2023.08.25 18:01:10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8-04.jpg 조회 : 67
경기도 안성소재 미리내성지


2023년 8월 27일 일요일, 제952호 소식지입니다.




9월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듯이

한낮의 고온도

저녁나절이면 점차 선선한 느낌을 들게 합니다.

무더위를 견뎌온 우리 모두에게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한 9월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8월 27일 (일) [녹] 연중 제21주일

제1독서 이사 22,19-23 / 제2독서 로마 11,33-36 / 복음 마태 16,13-20

베드로라는 낮은 문턱을 만들어 주신 주님

믿음이 온전치 않았던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하신 예수님
현실적이며 인간적인 기준 세우고
하느님 은총과 사랑 세상에 전하길

신학생들은 학부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는데, 저는 군대 대신 방위산업체에 갔습니다. 한마디로 방위였죠. 공장을 30개월 정도 다녔는데, 공장이 가까워서 매일 7시에 일어났습니다. 자연히 7시에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어 습관이 됐는데요. 그 습관이 방위산업체를 마치고 본당 생활을 하면서 조금 문제가 됐습니다. 월요일 새벽미사를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새벽에 못 일어나겠더라고요.

그래서 월요일 새벽미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이 됐는데, 또 못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가 됐는데,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밤을 새워 보려고 하다가 새벽에 잠이 들어서 또 못 나갔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월요일이 됐습니다. 새벽미사에 나갔을까요? 예, 나갔습니다. 그런데 늦게 나갔습니다. 미사가 끝날 때쯤 성당에 도착해 보니,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신학생이 새벽미사를 네 번이나 연속으로 빠지고, 대단하죠?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이후로 본당 새벽미사나 신학교 새벽미사에 늦거나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에게는 새벽미사를 네 번이나 빠진 ‘전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와 함께 사는 신학생이 새벽미사에 빠지거나 늦어도 혼내거나 화를 내지 않습니다. 새벽미사에 빠지는 신학생을 보면, ‘새벽에 일어나기 힘든 이유가 있겠지. 언젠가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에 적응이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아무 실수나 잘못 없이 신학생 시절을 보내고, 신부가 됐다면 어땠을까요? 새벽에 못 나오는 그 신학생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당장 혼을 내고 화를 내며 그 신학생의 잘못된 모습을 뜯어고치려 했겠죠.

비슷한 상황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학생 시절에 무슨 시험이든 1등만 한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 선생님이 공부 못하고 놀기만 하는 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회사를 밑바닥부터 키운 사장이 아니라, 돈으로 회사를 산 사장이 있습니다. 그 사장이 사원들을 가족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가 쉬울까요? 이익을 내지 못하고 경쟁에 뒤처지는 사원의 마음을 헤아려 줄 여유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또 운전도 해보지 않고 운전에 관한 법규들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운전자들의 실수와 잘못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 맞는 법규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겠죠.

그렇게 시행착오의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던 사람들, 높은 지위와 자리에만 앉아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현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권한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아마 그 사람들은 높은 기준과 이기적인 잣대, 그리고 현실성 없는 기준과 냉정하고 차가운 결정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을 힘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통해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위로를 막아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그러한 권한을 받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 교회의 구심점으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잘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믿음이 온전치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외면하고 모른다고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전과가 있는 베드로가 우리를 너무 팍팍하게 몰아붙이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상처와 넘어짐을 이해할 겁니다. 우리가 성경 내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고, 고해성사 순서를 잘 모르고, 미사가 어떤 구조로 이뤄졌는지 잘 몰라도 심하게 나무라지 않을 겁니다. 이상적이고 냉정한 기준만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을 적용해서,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더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으로 쓰십니다. 더 엄격하고 까다로워지라고 일을 맡기셨을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얻어 누릴 수 있도록, 나처럼 부족한 사람을 도구로 선택하셨을 겁니다.

오늘 하루,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받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님의 종이 됩시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8월 28일 (월) [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며 참회의 자서전인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복음묵상] 마태오 23,13-22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라는 낱말은 단죄나 위협보다는 안타까움과 아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랑으로 훈육하는 탄식입니다. 이 표현이 오늘 복음과 이틀 뒤 복음에 잇달아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오늘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와 우리 가정, 교회와 사회를 비추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13절 참조). 그들이 소개하는 하느님께서는 무섭고 엄한 심판관으로 좀처럼 자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성경 본문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이들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14절 각주 참조). 예수님께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이들은 더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살면서 일정한 수고의 대가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루카 10,7; 1코린 9,13-14 참조).

그러나 기도를 비롯한 종교적 의례와 행위를 자신을 부유하게 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은 위선으로 가득 찬 행동입니다. 그것은 종교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전락시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상인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1,15-19 참조).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돈으로 매수하려 한 시몬이라는 자가 베드로 사도에게 엄중한 질책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8,18-24 참조).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식들에 대하여 하나씩 묵상하며 우리가 끊어 내고 걷어 내야 할 것들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8월 29일 (화) [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질책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마르 6,17-29 참조).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 그의 유해가 있던 사마리아의 지하 경당에서 비롯되었다.

[복음묵상] 마르코 6,17-29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는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네 사람이 나옵니다. 이들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첫 번째는 헤로데 임금으로, 한마디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부정과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불륜을 저지르는 부도덕함 말고도 많은 부정을 저지르며 권력을 지키고 키우려는 열망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헤로데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앙심(증오)은 암흑의 힘으로, 마귀의 호흡(숨)과도 같습니다. 마귀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집요하게 질투하며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헤로디아는 증오의 영에 사로잡혔습니다.

세 번째는 헤로디아의 딸(소녀)입니다. 그는 허영심에 가득 찬 춤꾼입니다. 술에 취한 헤로데는 그의 춤을 보고 ‘무엇이든 모든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데, 이는 악마가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습니다(마태 4,9 참조). 이렇듯 이들의 뒤에는 언제나 악마가 있습니다. 여인에게 증오를, 소녀에게 허영심을, 남자에게 부정과 부패의 씨를 뿌려 키워 갑니다.

그리고 네 번째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이 나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자리를 내드리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없어진 위대한 순교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과 진리와 다른 이들 안에 온전히 자기 인생을 내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갑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가두려 하는 사람들, 곧 부패한 임금, 증오에 갇힌 부인, 허영심에 사로잡힌 소녀는 결국 허무 속에 자기 인생을 말라 버리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위대한 증언 앞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봅시다(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 2019년 2월 8일 자 참조).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8월 30일 (수) [녹]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3,27-32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대개 바위를 깎아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돌문으로 무덤 입구를 막아서 외부인의 침입과 약탈을 막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무덤이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면 어디가 무덤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것이 오히려 이스라엘의 정결법을 어기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무덤의 뼈나 시신에 몸이 닿으면 일주일 동안 다른 사람과 접촉하거나 만나는 것이 일체 금지되었기에, 사람들은 해마다 3월 초에 무덤에 회칠을 하거나 석회 가루를 뿌려 하얗게 만들고, 무덤을 주변 환경과 구별하는 표식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사람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지닌 바리사이의 성향을 성찰하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떠받들려 만족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남들 앞에서 신심 깊고 열심인 신앙인처럼 굴며 사람들의 칭송을 얻고 거기에 즐거워하면서, 복음의 요청을 따르는 것에 무관심한 속마음과 태도는 없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주님께서 우리 내면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를 살펴보시고 잘 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얼굴(모습)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8월 31일 (목) [녹] 연중 제2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4,42-51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많은 성당 제의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드리는 이 미사가 저의 첫 미사이고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봉헌하게 하여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의 집안 식솔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는 종입니다(45-46절 참조). 오늘 복음이 말하는 충실한 그 종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여 돌보고 섬길 주님의 “집안 식솔”(45절)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본분을 망각하고 우리에게 그들을 맡겨 주신 하느님마저 잊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우리에게 맡기신 식솔들을 돌보는 대신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얻으려고 세상의 우상들을 좇아 살고 싶은 유혹을 겪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으로 ‘깨어 있음’을 꼽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게을러져 일상의 평범함 속에 우리 자신의 영성이 매몰되고 사라지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프란치스코, 성녀 마르타의 집 아침 미사 강론, 2022년 8월 25일 자)입니다. 기도는 깨어 있으려고 우리 마음의 등불을 켜 두는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웃과 형제들을 돌보려는 마음이 식어 갈 때마다 기도는 차가워진 그 열정을 다시 데워 줍니다. 이처럼 기도는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다시 데려가 줍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고자, 그리고 언제나 깨어 있고자 오늘도 기도합시다. 사랑으로 형제들을 돌보며 기쁨으로 만나 뵐 주님을 기다립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9월 1일 (금) [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1-13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 처녀를 슬기롭거나 어리석은 인물로 구분 짓는 기준은 바로 준비성입니다. 날이 어두워질 때를 대비하여 등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는 열 처녀가 모두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관건은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고 있는가입니다. 그 시대 유다인들의 혼인 풍습을 고려하여 볼 때, 여분의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혼인 잔치를 앞둔 신랑은 아마도 신부 아버지가 될 사람과 혼인 계약서를 쓰러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데, 장인과 세부 사항들을 하나하나 조율하다 보면 예상 시간보다 오래 걸려서 늦게 돌아올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고려한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동안 밝힐 등기름을 넉넉하게 마련하였지만, 나머지 다섯은 그러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기름을 따로 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나름대로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비유에서처럼 등을 마련하고도 그 등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신앙을 가지게 되었으나 그 믿음을 유지할 연료, 곧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기름 없는 등과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닫혀 버린 문 앞에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는 처녀들의 절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종말을 슬기롭고 철저하게 준비하기를 바라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7,21).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3년 9월 2일 (토) [녹]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14-3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지난 이틀 동안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관한 두 비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을 떠나며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긴 주인에게 충실하였던 종의 모습(그제 복음), 그리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신랑을 맞이하려고 등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던 다섯 처녀의 모습(어제 복음)은 ‘깨어 있는’ 신앙인의 표상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같은 주제를 심화하는 세 번째 비유 이야기를 듣습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주인의 재산을 맡게 된 종들은 재산을 늘리도록 임무를 우리는 셋째 종의 태도, 곧 자신이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이유를 주인에게 돌리는 모습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주인이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에서 모으는 모진 사람이기에 두려워서 그러하였다는 그의 항변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주인이 그런 사람인 줄 알아서 정말 두려웠다면, 오히려 어떤 노력이든 더 받는데, 그 실행 과정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탈렌트를 잘 활용하여 좋은 성과를 거둔 종들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주인에게서 ‘착하고 성실한 종’으로 인정받으며 더 많은 일을 맡게 됩니다. 반면에 땅에 그대로 묻어 둔 셋째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비난받고 ‘쓸모없는 종’으로 여겨져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됩니다.

기울여야 하지 않았을까요? 만일 그에게 다섯 탈렌트를 맡겼다면 결과가 달랐을까요? 어떤 이는 그에게 맡긴 금액이 너무 적어서 성과가 없었을 것이라고 그를 두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한 탈렌트도 노동자 하루 품삯(데나리온)의 육천 배나 되는 굉장히 큰 화폐 단위입니다. 주인은 셋째 종의 태도를 정확히 ‘게으름’으로 지적합니다. 그는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자녀에게 ‘탈렌트’를 주셨습니다. 탈렌트는 우리 분수에 넘치는 큰 능력과 은사들로, 주님께서 활용하라고 맡겨 주시고, 결실을 거두는 도구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게으른 종이 아닌 성실한 종으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다른 이들보다 너무 적게 받았다는 실망감 때문에 지금 가진 것을 하찮게 여기거나,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기도의 원천
(「가톨릭교회 교리서」 2650~2662항)

하느님 자녀 되려는 노력이 기도의 원천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기도의 원천’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로마 6,4)”(537)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흘러내리는 성령의 물을 마시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당신께 붙어 있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당신 ‘진리와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771 참조) 기도하는 이는 이 진리와 은총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기도는 자발적인 내적 충동으로 저절로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하고 싶은 원의와 의지를 요구합니다.(2650 참조) 이 때문에 기도 행위가 진정한 기도가 되기 위해 ‘향주덕’(희망-믿음-사랑)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오노다 히로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 정보장교로 1944년 겨울, 필리핀 마닐라 근처의 작은 루방섬에 파견됩니다. 22살의 장교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부하 250명에게 무리한 작전을 요구하여 첫 전투에서 207명을 잃게 됩니다. 나머지 43명은 산속으로 흩어졌고 그중 20명은 미군이 살포한 전단지를 보고 일본이 항복한 사실을 받아들여 투항합니다. 그들 중 몇몇은 종전 다음 해인 1946년 봄, 오노다 일행을 구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가서 섬 전체를 돌아다니며 전쟁이 끝났다고 외쳤습니다. 오노다는 그들의 외침을 분명하게 거듭 들었지만, 이를 간사한 미국군의 계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까지 와서 전쟁이 끝났다고 외쳤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1974년 루방섬을 방문한 스즈키 노리오 교수에 의해 설득됩니다. 22세에 조국을 떠났던 청년은 52세가 되어서 일본에 돌아왔고, 일본 국민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았습니다.

오노다가 종전되었다는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전쟁 종식 후 들통나면 벌을 받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전쟁 종식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에 ‘믿기’를 원치 않았고 그래서 ‘사랑’이 아닌 파괴를 일삼았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내리시는 말씀이 있고 전례를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은총이 있습니다. 매일 어린이처럼 더 완전한 하느님 자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미사를 드려도 성체를 감정 없이 모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은 진정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에게 도로의 표지판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하느님께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희망과 믿음을 통하여 완전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철부지 어린이들”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에겐 진리와 은총을 받아들이는 “모든 형태의 기도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비유하시는 그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2660) 희망은 사다리의 두 기둥과 같고 믿음은 가로대와 같으며 사랑은 그 높이와 같습니다. 사랑으로 오르기를 희망하는 이는 기도로 받는 말씀과 은총으로 믿음의 가로대를 만들어 더 높은 사랑으로 오릅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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