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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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호 - 사순 제4주일 / 23-3-19
입력일 : 2023.03.17 21:49:57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3-03.jpg 조회 : 31
경기도소재 구산성지

2023년 3월 19일 일요일, 제929호 소식지입니다.



갑짝스러운 꽃샘추위가 몸을 움추리게 합니다.

봄인 듯 봄 아닌 듯 봄 같은 날입니다.

사순시기도 중반에 접어들어

다시한번 마음을 고쳐잡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 가졌던 다짐을

되새겨 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3월 19일 (일) [자] 사순 제4주일

제1독서 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제2독서 에페 5,8-14 / 복음 요한 9,1-41

구원의 조건

세속적인 잣대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스스로 만든 ‘조건’에 갇힌 사람들
차별과 편견 없이 이웃 사랑하고
구원의 손 내미시는 주님 따라가길

행복과 사랑과 구원, 가깝고도 먼 이름들

너무 추상적이고 뜻하는 바가 다양해서 사람마다 달리 해석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행복, 사랑 같은 개념 말씀입니다. 누구나 어렴풋하게 알고 있고 조금씩 경험한 바도 있지만, 막상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가까이 떠다니지만 손에 잡으려면 터지는 비누거품 같다고 할까요.

‘구원’도 신앙인들에게 익숙하면서 구체적으로 풀어내기 힘든 개념에 속합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성자를 보내주셨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면, 말뜻을 알아듣고 행복해하실 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것이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반응이겠지요.

행복과 구원의 조건

그래서 많은 이들은 행복과 사랑과 구원 그 자체를 추구하는 대신, 자기 생각에 이러면 행복과 사랑, 구원을 얻을 수 있겠다는 조건을 채우려고 애씁니다. 남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 구원의 조건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대체로 건강과 재력, 인맥과 학벌, 또 재능과 외모 같은 것들을 손꼽지요. 그리고 그 조건에 못 미치면 불행해 하고, 구원의 가능성도 낮춰 봅니다.

자기만 그리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문제는 남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대는 데 있습니다.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남들이 나서서 “그런 식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돈은 없어도 행복한 삶을 살겠다면 “당신이 세상을 몰라서 그러는데…”라며 비웃습니다. 자기만큼 행복의 조건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보다 행복해 보이면, 시기와 질투가 끓어오릅니다. 구원하시는 하느님, 구원을 받는 당사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조건을 달고 가능성을 막아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눈먼 사람, 그리고 주위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랬습니다.

조건을 다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만나는 데서 출발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저 사람은 신체의 장애를 지녔으니 불행할 테고, 또 그의 불행은 죄를 지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탓이라는 편견이 비칩니다. 제자들은 눈먼 사람을 위해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를 건강과 거룩한 삶이라는 행복과 구원의 조건을 못 채운 사람으로 낮춰 보며 값싼 동정을 보내는 데 그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요한 9,4)며 제자들의 편견을 일축하시고 눈먼 사람에게 다가가십니다. 힘들고 팍팍한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말하자면 “잠자는 사람, 죽은 이들”(제2독서; 에페 5,14) 같던 눈먼 사람에게, 예수님은 직접 진흙을 개어 발라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힘을 내서 스스로 실로암 못을 찾아 씻게 하십니다. 전형적인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다가가셔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구원을 받는 이가 신앙의 응답으로 일어서게 만드는 과정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그러자 이 구원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눈을 뜨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가 생생하게 증언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에 하느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실 수 없고, 소경은 자기들 기준에 행복과 구원의 조건도 채우지 못했으니까요. 유다인들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불경한 짓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요한 9,24)라고 단정합니다.

인간의 조건, 하느님의 뜻

제1독서도 인간이 생각하는 조건과 하느님의 뜻이 갈리는 모습을 전합니다. 예언자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이끌 임금을 뽑는 자리에서 엘리압에게 마음이 기웁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고 하시며 소년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인간이 설정한 조건은 인간의 조건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이 내건 조건은 타인의 가능성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종종 차별의 빌미로 작용합니다. “어떻게 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일 수 있는가”라며 타인의 행복과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자기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을 동등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구원을 만나다

반면 태어나면서부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눈먼 사람은 눈을 감고 살았던 덕에 오히려 편견 없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다른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 9,25) 그렇게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 빛의 세계를 걸어가게 됩니다.

어느덧 사순 제4주일, ‘즐거워하라’ 주일입니다. 엄격한 절제와 극기로 지칠 법한 시점에 부활의 기쁨을 생각하며 힘을 내는 주일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또 이웃에게 편견을 품지 않았는지 성찰해 봅시다. 하느님은 그 편견과 전제들을 무너뜨리시면서 먼저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알아 뵙고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3월 20일 (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마태 13,55; 1,19 참조).
그는 같은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약혼하였는데,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로써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다.

[복음묵상] 마태오 1,16.18-21.24ㄱ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요셉 성인은 독특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만 언급되는 요셉 성인은 침묵하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성인은 약혼녀인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았을 때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합니다. 당시 문화에서 혼인 전에 임신한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큰 죄였습니다. 성경은 요셉 성인의 성격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러기로 마음을 정하였을 때 요셉 성인은 꿈에서 천사의 말씀을 듣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 꿈은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요셉 성인은 꿈에서 깨어나자 그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이때에도 요셉 성인은 여전히 침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육적인 아버지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인을 예수님의 양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요셉 성인은 구원의 봉사자이자 보호자라는 사실입니다. 성인은 침묵으로 천사의 명령을 따랐고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 안에서 성장하셨습니다. 묵묵히 말씀을 따르는 요셉 성인의 믿음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21일 (화) [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이 표현은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던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치유는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율법은 안식일에 생명이 위급한 사람을 살리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날에도 고칠 수 있는 병자를 치유하는 것은 금합니다. 병자의 행동은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도 안식일 규정을 어기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치유된 사람은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라고 묻는 유다인들에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에야 그는 자신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이 나은 이는 처음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그분을 알게 됩니다.

요한 복음에서 안다는 것은 믿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수많은 질문이 등장합니다. 복음은,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뿐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도 ‘그분이 누구이신지’ 묻습니다. 그 답은 이미 이야기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건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당시의 의미에서는 완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육체의 병만이 아니라 내적인 상태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분이시며, 육체의 병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완전하게 되도록 길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22일 (수) [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치유하신 이야기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합니다. 이미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먹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죽이려고 합니다. 복음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실 때 공개적으로 제시되었던 죄목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눈먼 사람을 보게 하신 표징도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일부 유다인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은 신을 모독하고, 자신을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만든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의 표징이지만 그 사건의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이들에게 그분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분의 업적이 하느님에 대한 불경처럼 보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렇게 상반된 시각을 제시하면서 독자들에게 결단하게 합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은 어떤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받아들일지 선택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23일 (목) [자]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5,31-47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과 논쟁을 벌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율법에서 어떤 증언이 유효하려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적용한 죄는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적합하게 논쟁을 이어가십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증인의 수입니다.

먼저, 요한은 복음서의 시작에서 예수님을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증언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한 첫째 증인입니다. 두 번째는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그 자체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예수님의 표징은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증거입니다.

마지막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볼 수 없는 분이시므로,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위한 마지막 증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견주어도 당신께서 하신 일들이 정당하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런데도 복음은 여전히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유다인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 나오는 “목이 뻣뻣한 백성”과 비슷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24일 (금) [자]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여전히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실에 의구심을 가지지만 그래도 태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의인을 대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에서 봅니다. 그들은 다짐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이 말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갈등을 연상시킵니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서의 말씀은 마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시편은 의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 1,2)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마치 악인들이 놓은 덫과도 같고 그들의 생각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에 대한 악인의 태도는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부 유다인들의 모습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십니다. 어쩌면 지금도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25일 (토) [백]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태중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으므로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거슬러 가 계산한 것이다.

[복음묵상] 루카 1,26-38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한창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면서 성경에서 여자 이름으로 많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구약 성경의 미리암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미리암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이름을 ‘미르’와 ‘얌’의 결합으로 생각합니다. 얌은 히브리 말로 호수나 바다를 뜻합니다. 미르는 쓴맛 또는 (향기가 좋지만 쓴맛을 내는) 몰약이나 물방울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바다라는 말과 합쳐져서 바닷물(방울)이나 바닷물의 쓴맛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가 흔히 성모님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하는 ‘바다의 별’도 마리아라는 이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복음서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자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예수님의 활동에 함께하신 동반자이시면서 구원의 중개자이시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시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십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불가능해 보이는 동정녀의 잉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모든 것을 의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마리아께서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다섯째 계명④
(「가톨릭교회 교리서」 2305~2306항)

지상 모든 평화의 원천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채종기씨는 자신의 토지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숭례문에 불을 질러 국보 1호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에서 “내 말 한마디만 들어줬어도 이런 일 없었어요”라며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런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분노의 감정’이었습니다. 솟구친 화(火)가 화(禍)를 자초한 것입니다.

감정은 나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행위는 감정에 지배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마태 5,21)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계명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는 감정에 관련된 계명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시어 동향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신 적이 있으신데 그들이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했었습니다.(루카 4,23-30 참조) 행위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항상 감정에 치우쳐 후회하는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저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까요? 교리서는 감정이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분노는 복수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2302)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욕망을 버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유일한 심판관이신 주님께 떠넘기면 됩니다. 주님께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의 악에 대해 (인간이) 복수하고자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2302) 바오로 사도도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라고 말합니다.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모든 감정이 ‘두려움’ 하나에서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내 생존을 위협받게 되면 그 불안함에 몸이 반응하고, 그 신체 반응을 해석해 내어 생겨나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불만이나 우울함, 무기력감이나 질투, 혹은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살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몸의 변화를 긍정하게 만드는 방어기제들입니다.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아이들에게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생존에 대한 ‘불안’(不安)을 부모에게 맡기며 ‘평안’(平安)을 얻습니다. 아이들은 부모 품 안에서는 안전하다 믿고 그렇게 안전할 때는 다른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평화를 이룩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자기를 온통 그분 품에 맡겨 불안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꾸준히 해 온 사랑을 보고 부모에게 자신을 맡겨도 됨을 알게 됩니다. 부모가 자신에게 젖을 주고 입혀주고 보호해주는 것을 보고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주셔서 먹이시고 입혀주고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평화는 메시아이시며 ‘평화의 군왕’(이사 9,5)이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 열매입니다.”(2305)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적개심을 없애셨고’(에페 2,16),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으며 … 인간과 인간이 하나”(2305)되는 평화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불안함과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이태리 수입품이 서서히 업데이트 되고 있습니다.
순서에 밀려서 오픈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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