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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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호 - 사순 제1주일 / 23-2-26
입력일 : 2023.02.24 17:52:59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2-05.jpg 조회 : 69
서울 성모병원1층 성당입구

2023년 2월 26일 일요일, 제926호 소식지입니다.




3월입니다.

사순시기와 함께 시작된 3월

봄의 기운이 점차 강해질 때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사순시기동안

십자가의 길을 걸어 보려 노력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2월 26일 (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창세 2,7-9; 3,1-7 / 제2독서 로마 5,12-19 / 복음 마태 4,1-11

다시 한번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갑시다

고통으로 가득찬 광야 걷는 우리
진심으로 회개하며 주님께 향해야
성령의 도움으로 시련 극복하고
세상 유혹 물리치신 예수님 따르길

또다시 사순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사순 시기만 돌아오면 이런 생각하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나도 제대로 회개 한번 해보고 싶은데 왜 이렇게 잘 안되지?’ ‘생각으로야 수천 번도 더 회개하고 싶지, 그러나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떡해?’

회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회개란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마땅합니다. 성경에 사용된 회개란 용어는 히브리어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입니다. ‘악한 생각과 행동에 대항하다’, ‘자신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목표를 설정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니 회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군요. 단순한 반성의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슴 몇 번 치는 일이 아닙니다. 성당에 앉아 눈물 몇 방울 흘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꽤 복합적인 여정입니다. 제대로 된 회개를 위해서는 성경적 의미대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한없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누가 계십니까? 거기에는 사랑이신 우리 하느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온전히 결속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항상 머물러계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제대로 된 회개를 위해서는 ‘나’란 존재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파악도 필요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원래 무(無)였습니다.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황공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이런 내게 당신 사랑의 숨결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부여해주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분의 품성과 영혼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먼지요 티끌이었던 내가 놀랍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분이 보내셔서 이 세상에 왔으며,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오늘도 두 발로 서있습니다. 그분 자비 덕분에 이렇게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시 한번 그분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쁜 마음으로 우리 삶의 기초이자, 우리 인생의 시초인 그분께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도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갑시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가득 차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거칠고 황량한 유다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사순 시기를 시작한 우리도, 스승 예수님을 따라 깊고 황량한 광야, 조금은 외롭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 광야로 들어갈 때는 다른 해처럼 준비 없이 들어가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에 이끌려, 성령과 함께 광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우리들 생애 안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온 사순 시기가 많은 경우 실패로 끝난 이유는, 주님 없이, 성령 없이, 내 힘만 믿고, 나 홀로 광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광야 생활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한낮에는 피할 곳도 변변치 않은데, 엄청난 더위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합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또 얼마나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100퍼센트 인간 조건을 그대로 지니셨던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허기와 갈증은 또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어쩌면 그분께서는 언젠가 겪게 될 골고타 언덕에서의 극심한 십자가 죽음의 고통을 광야에서 미리 맛보셨던 것입니다.

올해도 우리의 광야인 이번 사순 시기, 여느 해처럼 갖은 고통과 시련, 세찬 모래바람과 극한 체험으로 가득하겠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큰 문제없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여행길에 밀착 동반하신다면, 광야 생활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맞이한 사순 시기 우리 앞에 펼쳐질 광야는 어디일까요? 나와 너무나도 다른 그, 정말이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용납이 안 되는 그가 득실거리는 우리의 공동체가 광야입니다. 평생토록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벗어나 보려고 그토록 발버둥쳐 봤지만, 그 지독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반복되는 내 악습과 결함이 광야입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갖은 유혹 거리로 가득 찬 내 부끄럽고 참혹한 매일의 일상이 광야입니다. 바로 그 광야에서 주님과 함께, 성령과 함께 새 출발을 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유혹 극복의 비결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로부터의 유혹도 많겠지만,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맙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2월 27일 (월) [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5,31-46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의 구조는 무척 단순합니다. 서론(25,31-33)에 이어 완벽한 병렬 구조로 이루어진 두 번의 대화(25,34-40; 41-46)가 이어집니다.

예수님 시대의 라삐들은 가르칠 때 대개 두 번 반복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긍정의 형식으로 다음에는 부정의 형식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가르침)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 있습니다(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루카 6,20-26 참조]; 슬기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의 집 짓는 방식[마태 7,24-27 참조]). 또한 당대의 라삐들은 심판의 어조를 잘 사용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경우가 오늘 복음 말고도 때때로 나옵니다(다니엘서 7장 참조). 라삐들과 성경의 몇몇 대목이 이런 문학 유형을 사용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을 말하기보다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은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오고 이에 대하여 임금이 대답하는 형식입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소중한 우리 삶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어떤 가치들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두 번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여섯 가지 행위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땅에서 자기의 이야기(역사)를 마칠 때 자기 자신과 하느님만 남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비유 속의 여섯 가지 고통과 가난의 상황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에 따라 성공과 실패 여부를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그 상황은 바로 배고픔, 목마름, 유배, 헐벗음, 병듦, 감옥입니다. 지옥은 존재합니다. 지옥이란 적어도 죄가 만들어 놓은 불행과 절망의 시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 불행한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그 말씀을,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2월 28일 (화) [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6,7-15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사순 시기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이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통하여, 특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와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창조주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를 바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신뢰하며 바치는 자녀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드리는 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자기만의 비법으로 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의 기도와는 매우 거리가 멉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떠한 걱정이나 두려움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원문의 순서를 따라가면 주님의 기도의 첫 번째 말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말입니다. 두 번째 말은 “우리(의)”입니다. 아버지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다음에 “우리(의)”라는 말을 주셨습니다(Pater noster).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자녀의 기도이며 형제들의 기도입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모두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그토록 용서를 강조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는 그분의 자녀도 서로의 형제도 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이 신뢰를 바탕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빵을 달라고 청합니다. 이 빵은 나만의 빵이 아니라 ‘우리’의 빵이고 ‘일용할’ 빵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아버지와 형제들 앞에서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호화로움과 부유함을 요청하지도, 인생의 모든 부분을 걱정 없이 살만큼 채워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빵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위하여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유일 것입니다.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서, 말씀과 성체로 언제나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3월 1일 (수) [자]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11,29-32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오늘 복음은 조금은 불편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미 루카 복음사가는 ‘세대’라는 표현으로 예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7,31; 9,41 참조). 특별히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기적만을 찾는 당시 사람들을 꾸짖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에게 요나가 본보기가 됩니다.

제1독서에서 전하는 것처럼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에서 하였던 일은 아주 간단합니다. 니네베 사람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이 선포에 임금을 비롯하여 모든 이가 자신의 행실을 뉘우치면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은 하느님 말씀과 선포에 있습니다. 그는 어떤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선포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요나 예언자와 비교됩니다. 사람의 아들에게도 중요한 것은, 요나처럼 먼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 어느 기적이나 표징보다 중요하며, 그 바탕에는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자리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놀라워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진정한 변화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2일 (목)[자]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7,7-12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세 구절로 표현되는 예수님 말씀은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 청하기는 기도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찾는 것과 문을 두드리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특히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유다교 라삐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비유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기도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빵과 생선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는 기본 음식입니다. 그리고 돌과 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유혹에서도 언급되듯이, 빵과 생선에 견주어 보면 먹을 수 없는 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비교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고 유익한 것을 많이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믿음은 기도의 바탕입니다.

마지막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서 전하는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는 이 가르침으로 정리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 가장 큰 계명의 구체적인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3일 (금) [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신약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들로 유다교 안에서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율법 학자는 율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해석하며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율법은 성전에서 바치는 제사와 함께 종교 생활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보다 더 폭넓습니다. 실제로 생명을 빼앗는 행위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그들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도 처벌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도 중요하지만, 원망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은 계명과 율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외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계명이 가리키는 것들도 따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으로 가진 원망이나 미움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하느님 말씀의 속뜻도 깨달아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 외적인 것에 치중하였다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까지 따르는 자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3년 3월 4일 (토) [자]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5,27ㄴ-32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미 레위기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9,18)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이웃”은 ‘동포’의 뜻이 강합니다. 같은 민족 사람들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표현이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새로운 차원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에 밝힌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라는 말씀이 구약 성경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다른 민족들에 대한 언급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신명 23,3-6 참조).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도록 가르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새로운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동포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 사람들도 이웃에 포함됩니다. 그토록 강한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도 이웃에 포함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태도를 넘어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는 분명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저 착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 되는 데에 그치지 말고 그것을 넘어 하느님을 닮도록, 그분의 완전하심을 닮도록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완전함은 세상이 말하는 완전함과는 다릅니다. 그 기준은 하느님이시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다섯째 계명①(「가톨릭교회 교리서」 2258~2262항)

카인이 될 것인가, 아벨이 될 것인가?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법입니다. 단순히 “나는 살인 안 하는데?”라며 끝낼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는 자와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를 같은 죄인으로 여기십니다.(마태 5,21-22 참조) 사실 살인은 우발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외적으로 살인을 저질러야만 살인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면 언제든 살인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2258)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태초부터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2260)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첫 살인자는 카인입니다. “형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에서,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원죄의 결과인 분노와 욕망이 인간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2259) 원죄의 결과로 우리가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드는 욕망을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삼구’(三仇)로 불러왔습니다. 이는 소유욕-성욕-지배욕으로 대표됩니다.(377 참조) 교회는 이 욕망과 싸워 이기도록 자선-단식-기도를 권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하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카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자격이 필요합니다. 카인이 아닌 아벨의 자격을 얻어야 합니다. 카인은 누군가를 칼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는 욕망을 따르는 존재이고 아벨은 칼에 찔려서라도 그 찌른 사람이 자신이 한 짓을 바라보게 만들어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부모와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라는 성경 구절대로 우리가 찌른 당신을 바라보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히브 12,24 참조)

영화 ‘공공의 적’(2002)에서 아들은 보험금을 노리고 어머니를 찔렀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들이 잡히지 않게 하려고 아들의 부러진 손톱을 죽어가면서도 집어삼킵니다. 이제 그런 어머니를 보며 계속 누군가를 찌르며 생존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도 누군가가 자신을 찌르게 하여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어머니처럼 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아기는 부모의 생명을 먹고 자라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부모처럼 남을 살리는 존재로 새로 태어나지 못하면 세상에 속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카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창세 4,10-11)

나이가 들어도 아기처럼 어머니를 찌르며 자기 생존을 유지하려는 자는 그 어머니의 피가 뿌려진 땅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찔러 새로 태어난 새 아벨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새로 태어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아벨들에게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는 일까지 금지하시며 더 나아가 다른 뺨을 내밀 것과 원수를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시고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다시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닌 이웃을 위한 나의 피 흘림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의 아벨이 되는 길입니다.(2262 참조)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하남 미사지역으로 이전해 온지 어느새 1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건물내에 소수의 업체가 입주하였지만 지금은 많은 직원들이 보입니다 .(저희 건물은 지식산업센터 입니다.)
서서히 인지도가 올라가서 매장을 찾는 분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객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성물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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