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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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호 - 연중 제7주일 / 23-2-19
입력일 : 2023.02.17 17:07:0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2-04.jpg 조회 : 76
안면도성당 십자가의 길

2023년 2월 19일 일요일, 제925호 소식지입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2월의 중순

봄으로 접어들 때에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묶은 때를 씻어 낼 수 있는 기회로 삼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2월 19일 (일) 연중 제7주일

제1독서 레위 19,1-2.17-18 / 제2독서 1코린 3,16-23 / 복음 마태 5,38-48

원수를 사랑하라

죄의 현실 안에 서로 연결된 사람들
마음속 분노와 미움 떨쳐버리고
주님 말씀 따라 용서하고 화해하길

예수님 말씀 중에 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할 만큼 어려운 요구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갈등과 다툼을 가라앉히기 힘든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나친 요구요 성취할 수 없는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만히 따져 보면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먼저 첫 번째 독서를 볼까요. 레위기의 말씀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고 그 명령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하라는 지침을 줍니다. 거룩한 사람은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기 위해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고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어딜 가나 문제가 생기면 남의 잘못을 지적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등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사태가 악화될 때까지 가만있다가, 뒤늦게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지요. 입바른 소리는 하는데 정작 자기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까지 더 하면 문제를 해결하기는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죄로 물든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죄와 분노와 죽음은 결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서로 형제자매로 맺어진 모든 사람은 죄의 현실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가 있다면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만 비로소 해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혼자 속으로 앙심만 키울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안 변하면서 다른 사람은 변하라고 강요해도 곤란합니다. 죄와 죽음의 현실을 공동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동족의 잘못을 꾸짖으면서까지 죄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려고 대화하며 애쓰는 사람’은 앙갚음과 앙심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화답송이 노래하듯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가여워하시는’(화답송, 시편 103 참조) 하느님처럼 죄의 상황을 해결하려는 굳은 의지와, 죄지은 사람마저 가엽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어서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하느님 백성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일련의 발전 끝에 나온 것이죠. 먼저 민수기 35장에서는 가족 복수법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불리는 피의 보복자가 여기에 등장하는데, 한 가정의 일원이 부당하게 살해되었을 때, 그의 친족 안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나서서 살인자뿐만 아니라 그의 전 가족을 전멸시키는 복수를 했습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 그렇게 엄한 법이 없다면 안전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가 컸지요.

다음으로 딸리오 법이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이라 하는 이 법에 따르면 복수를 할 때는 받았던 죄의 크기를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신명 19,21) 이 법은 지금 보기에 잔인해 보이지만, 복수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던 당시의 다른 법보다는 개선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고,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하느님의 법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법으로 대치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법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하도록 명합니다. 야만 시대를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법을 실천할 만큼 인간 사회가 성숙했으니, 이제 좀 더 어려운 과제를 주시는 것 같지요. 받은 게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니까요. 그러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법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마음속 분노와 미움을 어떻게 해결하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요? 근본적인 해답을 한 마디로 내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복음에서 실마리는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예수께서 알려주셨지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상대가 나의 관심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말고, 어느 경우에도 내가 할 도리는 다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가야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행동을 하다보면 마음이 바뀌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밉든 곱든 내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하다보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해줄 일도 안 해주려 하거나, 뒤에서 오만 험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안 보는 시간이 갈수록 미움의 싹이 자라고 또 자라서 종국에는 도저히 감당 못 할 큰 나무가 되어버리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 속으로 천불이 나더라도 할 것은 해 주도록 합시다. 당장 용서와 화해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1요한 2,5 참조; 복음 환호송)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7; 제2독서)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2월 20일 (월) [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9,14-29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를 괴롭히던 악령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악령의 힘이 그들의 능력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악령 때문에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구는 아이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과도,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같아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귀 기울여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 대적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그에 맞설 두 가지 좋은 수단을 가르쳐 주십니다. 믿음과 기도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제자들이 기도하였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낼 수 없었던 충분한 답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는 오늘 복음의 아이 아버지는 제자들을 위한, 곧 우리를 위한 믿음과 기도의 본보기로 제시됩니다. 아이 아버지가 바친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우리도 주님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 안으로 좀 더 들어가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과정을 보면 우리의 기도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말씀하시자 악령이 떠나가며 아이가 “죽은 것처럼” 되었고, 그것을 지켜본 사람들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고 말하였음을 전합니다. 아이의 치유가 일종의 ‘죽음’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를 가두어 온 악령의 힘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죽음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의 ‘경련’을 낫게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고 단념하는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요? 올곧은 믿음과 열렬한 기도 없이는 결코 이루지 못할 이 은총을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2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9,30-37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오늘 제1독서는 아름다운 집회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우리 가운데 누가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오십 배 백 배로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삶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집회서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여기서 ‘시련’은 우리에게 좋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가장 값진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면서 집회서는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며, 금이 불로 단련되듯이 주님께 맞갖은 이들도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그때마다 “그분을 믿어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하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그리고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관련하여 좀 더 명확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시련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혼란이나 망설임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주님을 따르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반부 이후에는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이 당신 곁을 떠나 있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련 가운데서도 당신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길은 신앙의 참기쁨을 얻는 길이지만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올바로 걷고 있다는 분명한 표징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에도 언제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2월 22일 (수) [자] 재의 수요일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재의 수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복음묵상] 마태오 6,1-6.16-18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2). 사순 시기를 여는 첫 말씀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요엘 예언서의 말씀으로 이 시기를 시작합니다.

오늘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라는 말과 함께 사제는 우리 머리에 재를 얹습니다. 사순 시기에 우리는 희생과 절제, 포기와 단념이라는 말들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쁨’으로 부르셨습니다. 사순 시기는 이 기쁨을 되찾는 때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하느님의 자애와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쏟아져 내리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다시 보여 주시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먹을 ‘빵’을 얻으려고 오늘도 바삐 일하고 움직입니다. 그런데 배가 부르고 물질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사람마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자신 안에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열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젊음과 검은 머리카락이 마치 짧은 숨처럼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가 세상에서 풀어 낼 수 없는 더 깊고 근원적인 열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코헬 11,10 참조). ‘내’ 세상이, ‘내’ 날들이 끝나 간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깊은 내면의 ‘다른 음식’을 정말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인 ‘나’라는 존재를 진실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대화하며 점차 ‘나’라는 인간이 누구이고 ‘사람다운 것’이 어떤 것이며 인간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를 자신 안으로 초대합니다. 우리 삶의 밑바닥부터 들여다보고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시간 동안 우리 마음의 화두가 하느님 말씀을 다시 듣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에 맞서시며 하신 첫 번째 말씀, 곧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참조: 신명 8,3)라는 말씀을 되뇌며 그 의미를 찾는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요?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2월 23일 (목) [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9,22-25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며 교회는 우리에게 모세(제1독서)와 예수님(복음)의 공통된 말씀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 주셨고, 그것을 선택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선택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2015년 2월 19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강론 참조). 매일 매번 선택하는 것보다 습관과 타성에 따라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십 년의 광야 생활을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하라고 호소합니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벗고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새롭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세례로써 새로운 삶을 선택한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삶이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이 돌아서서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며’(신명 30,17 참조)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과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선택하기보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제목 ‘코지 판 투테’(‘모두가 그렇게 한다’)처럼, 다른 이들이 하는 대로 많은 이가 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기 인생이 어떠한지 스스로 두 가지 질문을 해 보라고 권고하십니다. 첫째, ‘나에게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그래서 ‘나는 오늘 주님을 선택하고 있는가?’ 둘째, ‘나와 내 부모, 내 형제,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느님과 가족들과의 관계는 소홀히 하면서 다른 것들에 몰두해 있다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는” 삶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던 생각을 멈추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봅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걷는 삶을 다시 선택합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2월 24일 (금)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9,14-15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식’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의 의미를 풀이해 줍니다. 겉보기에만 그럴 듯한 단식이 아니라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자신의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집 없이 떠도는 이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여 환대하고,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는’ 기쁨의 단식을 하라고 말합니다(58,6-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째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단식은 많은 종교에서 공통된 신앙 실천 방식입니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라마단 기간에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식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무려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마태 4,1-11; 마르 1,12-13; 루카 4,1-13 참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과 똑같이 단식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무적으로 단식해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손님들(예수님의 제자들)이 신랑(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은 단식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단식은 회개에 이르는 참회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할 수 있는 대로 단식하며,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하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먹지 않음으로써, 먹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식은 정신의 자유와 자신에 대한 통제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얻도록 해 줍니다. 더 나아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가난한 이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하게 만드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에 먹는 것을 단념하고(단식), 단념한 것을 내주며(자선), 우리에게 필요한 빵, 우리가 받아먹어야 할 더 좋은 것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기도). 무엇보다 우리는 단식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내주고 다시 완전히 충만하게 되돌려 받는 생명의 상급에 대하여 묵상하기에 사순 시기는 참 좋은 시간입니다.
(정용진 요셉 신부)


2023년 2월 25일 (토) [자]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묵상] 루카 5,27ㄴ-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오늘 복음은 레위(마태오)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황으로 선출되시고 나서 하신 어느 인터뷰에서 오늘 복음과 관련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로마의 주교가 되기 전) 로마에 올 때마다 저는 스크로파(로마의 길 이름)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자주 성 루도비코(San Luigi dei Francesi)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 가면 늘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성 마태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을 바라보며 묵상하였습니다.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손가락은 마태오를 가리킵니다. 그것은(세리 마태오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는 마태오와 같습니다. 그림 한가운데 탁자 위에 놓인 돈을 움켜쥐고 있는 마태오의 손이 제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이 돈은 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의) 눈길로 돌아보신 죄인입니다’”(안토니오 스파다로, ‘프란치스코 교황과 인터뷰’, 2013년 8월 19일).

이 그림은 매우 유명한 작품으로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한번 이 작품을 찾아 감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길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봅시다.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는 움켜쥔 손, 탁자 위의 동전들, 탁자에 돈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과 앉아 있는 자세에서 오는 안락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비추는 환한 빛, 그리고 빛과 함께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의 눈과 나를 가리키는 그분의 손, 그리고 그분께서 나에게 건네시는 말씀, “나를 따라라.”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순 시기 여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그분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손을 펴고 바라보며 일어섭시다. .

(정용진 요셉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넷째 계명⑥(「가톨릭교회 교리서」 2232~2257항)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평소엔 공권력 따라야 하지만
복음의 가르침에 어긋날 때는
거부하고 저항할 의무도 지녀

만약 지금 우리가 노예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살고, 나에게 주인의 폭력이 싫어서 탈출한 노예가 숨어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도 이와 똑같은 상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필레몬이라는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스를 감옥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스는 바오로를 통해 참 하느님을 알고 바오로의 충실한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바오로는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필레 1,13-14)라고 말합니다.

노예 제도는 분명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어긋납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로마 13,1-2)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교리도 “공권력 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윗사람들을 하느님 은혜의 관리자로 그리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아야 한다”(2238)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정권에 저항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민주화 운동 당시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잡아가려면 우리를 넘고 가십시오”라며 저항하였습니다. 이는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이나 기본 인권이나 복음의 가르침 등에 어긋날 때, 시민들은 양심적으로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2242)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사회 권위에 순종하고 언제 저항해야 할까요? 교리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넷째 계명은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과 그 공권력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의무도 밝혀준다”(2234)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는 부모와 자녀 사이처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하느님 뜻이 명확하게 부모의 뜻과 어긋날 때 우리는 하느님 뜻을 따르기 위해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을 의무가 생깁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를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고 존중하여야 합니다.”(2233)

법도 민법이나 형법이 헌법을 바꿀 수 없듯, 하느님의 법이 내리면 다른 권위는 힘을 잃습니다. 결국 모든 권력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 권위의 차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는 우선 “세금 납부와 투표권 행사, 국토방위 등의 의무”(2240)를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21)라는 말처럼 마치 별개의 권위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 임무와 권한으로 보아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2245)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라고 하셨던 것처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소명을 수행할 때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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