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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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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호 - 성령 강림 대축일 / 22-6-5
입력일 : 2022.06.03 18:22:37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6-01.jpg 조회 : 1565
경기 남양주소재 마재성지

제888호 소식지입니다.


요즘 무더위가 시작되어

한 낮에는 기온이 30도를 넘고 있습니다.

더위에는 만사가 귀찮아 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예수 성심 성월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6월 5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사도 2,1-11 / 제2독서 1코린 12,3ㄷ-7.12-13 / 복음 요한 20,19-23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각자 다르지만 서로 사랑 나누며
상대방을 섬기고 진심 다한다면
공동체에 성령 임하시게 될 것

저마다 자기 언어로

오늘 독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모인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습니다. 예전에 프랑스에서 2주일간 연수할 때가 떠오릅니다. 30여 개국 사람들이 모였었는데요. 그때 모인 사람들도 회의하는 내용을 각자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회의 내용을 각자의 언어로 알아듣고 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와 같지 않은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 아닌가!”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예상하시겠지만 여러 통역사가 있었습니다. 전문적으로 통역하는 분들은 아니고, 여러 언어를 하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셨습니다. 두세 가지 언어를 하는 사람이 한 가지 언어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 옆에서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하시는 선교사 신부님이 계셨고요. 세 가지 언어를 하는 레바논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아랍어로 통역을 해 주었고, 네 가지 언어를 한다는 자매님이 브라질 사람에게 회의 내용을 통역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공동체 안에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했을 때, 오순절에 보았던 놀라운 일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은사를 나눈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각자의 은사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신학교에서 설교학 시간에 실습을 했답니다. 한 신학생이 처음 자기 순서가 돼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긴장이 돼서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얼떨결에 입을 연 그는 “여러분,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학생은 “여러분이 모르는 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내려왔습니다.

속상한 교수는 다음 날도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학생은 또 할 말을 잃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 그때 학생들이 웃으면서 “다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학생은 “여러분이 다 아는 것을 제가 말할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하고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화가 난 교수가 그 다음 날에도 다시 그를 강단에 세웠습니다.

다음날 이 학생은 또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아십니까?” 이때 학생들은 웅성웅성 하면서 안다는 학생도 있었고 모른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때 이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답니다.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라는 말이 공동체에 필요합니다. 공동체에는 먼저 들어온 분들도 있고 나중에 들어온 분들도 있을 텐데요. 먼저 들어온 분들이 나중에 들어온 분들에게 아는 것을 나눈다면, 새로 들어온 이들이 공동체에 적응하고, 하나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내가 신앙 안에서 체험한 좋은 것들을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전하고 알려 준다면, 많은 이들이 올바른 길로 들어설 겁니다.

내 눈에 보이는 일

예전에 「행복의 수레바퀴」 저자 송길원 교수가 쓴 글을 보다가, 은사가 무엇인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늘상 궁금해 하는 게 있다. 하느님이 주신 나의 은사는 무얼까? 하지만 뜻밖에도 너무 간단하게 은사를 알 수 있다. ‘내 속에서 생겨나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불만,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은사인 것이다.’ 일테면, 내 아내는 물건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종이 나부랭이가 나뒹구는데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불편한 게 없다. 오히려 밟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나는 금방 불편해진다.

이 말은 내가 아내보다 정리정돈에 탁월한 은사가 있다는 증거다. 하느님은 이 은사를 주신 목적이 상대방의 마음을 박박 긁어 놓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 사용하라는 데 있지 않다. 은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바로 그때,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내 아내한테는, 화장품 뚜껑 여는 은사가 있고, 나에게는 그 뚜껑 닫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아내를 대하는 내 태도가 바뀌었다. 아내가 화장한다고 앉아 있으면, 내가 다가가 물었다. ‘여보, 이거 다 썼어? 그러면 뚜껑 닫아도 되지. 이거는? 그래, 그럼 이것도 닫는다.’ 이제는 내가, 뚜껑을 다 닫아 준다.”

이렇게 은사를 나누는 일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구역 내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독거노인이나 결손가정 아이들, 그리고 병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주일학교 아이들이 간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거나 장비가 없어서 교육을 못 받는 걸 볼 수도 있겠죠. 내 눈에 보이는 일을 시작하고 섬길 수 있다면, 우리 공동체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6월 6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헌장’을 반포하며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복음묵상] 요한 19,25-34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목마르다.” 십자가 위에서 목말라 신음하시며 죽어 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하여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세상 모든 죄악과 고통을 지시고 홀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주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으로 죽음은 극복되었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 곁에는 성모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십자가 위 예수님께서 성모님께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아래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님을 차마 마주 바라보지 못하시며 그 어떤 말도 못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라고 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시어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아 기르셨으며,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시며,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도 동행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전적으로 협력하신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서 이제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주 예수님을 모시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하는 우리의 자리는 ‘십자가 아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을 말입니다. 이 길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걷는 사랑과 봉사, 희생과 죽음의 길입니다. 이 길은 힘겹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은총과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 곁에는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녀인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전구해 주십니다. “어머니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7일 (화) [녹] 연중 제10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부패를 막고 음식의 맛을 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타락과 멸망을 막고 더 나은 세상, 더 맛깔나는 세상을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기에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9,50) 하고 이르십니다. 또한 콜로새서의 저자는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또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아야 합니다.”(4,6)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빛일 수 있는 이유는 먼저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빛은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둡고 차디찬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양초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녹일 때, 세상은 더욱 따뜻해지고 환하게 빛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빛나고 있습니까? 그 빛으로 세상 사람들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까? 혹시 내 앞길만, 내 가정만, 우리 교회만 비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든 이를 환히 비추는 ‘세상의 빛’이어야 합니다.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추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이가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8일 (수) [녹]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17-19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산에서 하느님과 바알 신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홀로 남은 주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대결합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주 하느님의 권능을 청합니다. 마침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함께 있던 모든 것을 태워 버리며, 하느님의 위엄이 만천하에 드러납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이미 주 하느님의 권능과 위엄을 체험하여 알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주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참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시편 16[15],1)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깁니다.

구약의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구약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정신을 십자가의 신비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참스승이시며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완성된 율법과 계명, 십자가의 삶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며 하늘 나라를 위한 보화를 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의탁합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2일 (목) [녹]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0ㄴ-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일차적으로는 하느님 율법에 대한 충실을 뜻하며,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뜻에 대한 충실을 뜻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의로움’은 매우 중요한 낱말로, 예수님께서는 특히 산상 설교(마태 5─7장 참조)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시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의로움’을 강조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절에서 48절까지 이어지는 구절은 ‘여섯 가지 대당 명제’라고 하는 구절의 첫 번째 단락으로서 “너희는 ……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구약 성경의 내용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이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을 심화하시며 형제에게 성내고 욕하는 것까지도 엄격하게 경고하십니다. 또한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껄끄러운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들을 마치 훤히 다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과,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주님의 이 같은 요구에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의로움은 결국 ‘사랑’이라는 한 낱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사랑이신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며 형제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늘 나라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 줄 것입니다.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0일 (금) [녹]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5,27-32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강한 바람에도, 사나운 지진에도, 뜨거운 불 속에도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는 불이 지나간 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에 주님을 위해서 열정을 다하여 험한 길을 걸어왔고, 이제는 홀로 남아 적들에게 목숨마저 빼앗길 위험에 놓인 엘리야의 고백과 한탄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또 다른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언자는 늘 하느님과 대화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을 위해서 죽기까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역할은 오늘날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도록 선택된 우리를(필리 2,15 참조) 통해서 계속됩니다.

오늘 복음은 간음과 이혼에 관한 예수님의 단호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는 여섯 개의 대당 명제(마태 5,21-48 참조) 가운데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드러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탐욕을 경계하십니다. 죄의 충동을 단호히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서, 눈과 손은 마음먹은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기관인데, 예수님께서는 온몸이 죄를 짓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육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다는 혼인의 불가 해소성의 바탕 위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충실한 신의로 혼인 유대를 계속 이어 가기를 바라십니다.

육의 탐욕이 넘쳐 나고, 거룩해야 할 가정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는 어지러운 이때에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을 떠올리며 용기를 냅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3.8).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2022년 6월 11일 (토) [홍]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의 레위 지파 출신이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는 바르나바 사도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뒤 자신의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복음묵상] 마태오 10,7-13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1독서는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다른 곳으로 흩어진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이가 주님을 믿게 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르나바는 제자들이 맨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어 사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는데,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내린 것에 기뻐하며 그들이 주님께 충실하도록 격려합니다. 더욱이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요한 다섯 설교 가운데 하나로 ‘파견 설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그들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도록 명하십니다. 사실 이는 모두 예수님께서 몸소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한과 사명을 열두 사도들이 계속 이어 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맡겨진 몫이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서 거저 받은 것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얼른 떠오르지 않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이룬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힘만으로 이룬 것은 얼마나 될까요? 곰곰이 따져 보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 시간, 가족이 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알게 된 믿음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을 알게 됨으로써 얻게 된 사랑과 기쁨, 희망, 구원, 곧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선물에 먼저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께 받은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세상 모든 형제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 그리고 주위 형제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 위로와 나눔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주님의 축복과 평화를 빌어 주는 것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앙은 인격 통해 전수… 사제는 온 삶으로 복음 증거해야
열정과 역동성의 삶 잃어버리고
정주와 타성의 삶 살면 안 돼
자신의 신념·태도와 생활양식을
복음의 방식으로 새롭게 하길


■ 피정 풍경

어느 교구 사제 피정에 와 있다. 타 교구 신부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즐거움도 크다. 교구를 넘어 사제라는 동질성이 주는 편안함과 친밀성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더욱이, 이해관계와 인정 욕망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할 조건도 성립되지 않으니 조금은 스스럼없이 정직하게 강의하고 대화할 수 있다. 같은 교구 사제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교구의 경계를 넘어 다른 동료 사제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지내는 일은 중요하다. 몸이 거하는 공간이 좁으면 마음도 좁아진다. 몸과 마음의 반경을 확장할 필요가 항상 있다.

피정 중에는 사제들이 번갈아 가며 미사 주례를 하고 강론을 한다. 동료 신부의 강론을 듣는 일은 즐겁다. 다양한 관점과 스타일의 강론을 접할 수 있다. 피정 시간 중에 하는 강론은 신자들을 향한 강론이 아니다. 사제로서 묵상과 성찰을 동료와 나누는 일이다. 사제로서의 경험이 녹아 있는, 또 정직한 자기 고백의 강론은 그 자체로서 동료 사제에게 일종의 힐링이 된다. 오늘 미사 때 들은 어느 사제의 강론이 특히 그랬다. 30년이 넘는 사제 생활을 하며 느꼈던 고민과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내어놓는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실, 모든 정직한 자기 고백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울림이 있다. 그것은 자기 고백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과 또 외적 성취와 업적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저 자기 삶에 대한 정직한 성찰과 고백만으로도 충분하다. 정직한 성찰과 자기 고백의 행위 그 자체가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직한 자기 고백은 듣는 사람들에게 당신들도 자기 삶을 정직하게 성찰해보라는 겸손한 권유이며 대화다.

■ 사제의 자기 질문과 점검

사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점검해야 한다. 교리와 신학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해서 신앙이 깊은 것은 아니다. 종교적인 업무를 수행한다고 해서 신앙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사와 전례를 매일 거행한다고 해서 개별적 신앙과 인격이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성사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은총이 충만해짐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사제의 개별적인 신앙과 인격의 성숙은 성사의 인효성 영역에 더 많이 좌우된다. 즉, 성사의 목적과 지향을 기억하면서 성사 거행에 쏟는 사제 자신의 집중과 정성에 달려있다는 의미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며 재현하는 일이다. 사제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재현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생각(시선과 관점)과 행동과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가 무엇을 선포하고 실현하려고 했는지, 그가 어떤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는지, 그가 어떤 행위들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현실의 사제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 대해 성찰하고 점검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그저 종교적 직무수행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참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제 생활 역시 부부 생활과 비슷하다. 초기에는 하느님이라는 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만 들어도 설렜다. 하지만 진실한 말과 속내 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고 그저 몸만 함께 살아가는, 권태기의 부부처럼 사제도 자칫 종교적 관행으로만 살아갈 위험이 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몸과 마음으로 관계하고 대화하고 있는지 늘 성찰할 일이다.

사제, 신부, 성직자, 사목자, 저마다의 역할적 특성을 드러내는 호칭이다. 성사와 전례를 집전하는 제사장, 영적 지도자, 종교적 직무의 수행자, 신자들을 돌보는 사람. 신학적, 영성적, 종교적, 수행적 관점에서 정체성을 표현하는 명칭이다. 이 넷 가운데 신자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가장 강조해야 할 역할은 사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사목의 행위는 통치와 지배와 관리의 행위라기보다는 봉사와 헌신과 섬김의 행위다. 근원적 의미에서 사목자로서 사제는 지도자의 모습보다는 종의 모습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하느님 백성의 근본적 모습은 서로 섬기는 사람, 즉 종의 모습이다. 교황에 대한 명칭 역시 ‘모든 종들의 종’이다. 사제가 자신의 사목자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실천하며 살아갈 때, ‘자신을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는 존재’라는 그리스도교 사제직의 본래적 의미를 더 잘 실현하게 될 것이다.

■ 교계 제도와 성직자 문화

사제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제들이 선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사제직을 지향할 때 가졌던 그 선의와 원의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한다. 다양한 삶의 사정과 사연 속에서 사제들이 가졌던 그 첫 마음과 지향들이 참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처음의 선의와 원의와 지향들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점점 타성 속에서 관성화되어가는 모습을 또한 발견한다. 무엇이 우리들의 그 선의와 지향들을 퇴색시켜버린 것일까.

교계 제도는 복음 선포라는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가 택한 가시적 존재 방식이다. 모든 제도는 목적론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제도가 갖는 원래의 목적을 끊임없이 상기하고 쇄신시켜 나가지 않으면 모든 제도는 퇴색하고 변질될 위험이 있다.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한 제도라는 원래의 목적과 지향이 퇴색되고 위계적 서열 구조로 오해되고 변질되기도 한다. 위계적 서열 구조와 문화 속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사제들은 형제적 평등성과 창의력을 상실하고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방식으로 살아갈 위험이 있다. 사랑과 섬김이라는 신앙과 복음의 방식으로 살기보다는 권력과 힘의 논리를 추종하며 살아갈 위험이 있다. 열정과 역동성의 삶보다 정주와 타성의 삶을 살아갈 위험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수직과 명령의 문화는 형제적 협력의 문화를 낯설게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의 존재 방식과 생활방식으로 시노달리타스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 “새로운 신념, 자세, 생활양식”(「찬미받으소서」 202항)

피정 중 한 사제가 고백했다. 사제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과 교회와 세상의 복음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지만, 교회 제도의 구조적 한계와 거대한 세상의 물결이 자신을 무기력하게 하고 좌절케 한다고 말이다. 사실, 하늘 아래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도 사제는 직무가 주는 힘 덕분에 적은 노력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조금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고맙고 미안한 일이다. 사제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사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신의 신념과 태도와 생활양식을 복음과 신앙의 방식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신앙은 무엇보다 인격을 통해 전수된다. 사제는 말과 행동과 태도로, 즉 온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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