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젊은이들이 희망과 책임감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도록 기도합시다.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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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호 - 부활 제6주일 / 22-5-22
입력일 : 2022.05.20 16:44:15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5-04.jpg 조회 : 1927
양평 두물머리

2022년 5월 22일 일요일, 제886호 소식지입니다.



나뭇잎들이 점차 진한 녹색을 이루고

장미꽃들이 여기저기에서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하는 5월

여름으로 가기 전에 성모상앞에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22일 (일) [백]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사도 15,1-2.22-29 /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 복음 요한 14,23ㄴ-29

작은 들꽃 한 송이에도, 성령은 깃들어 계시네

인간의 일상 속에 항상 함께하며
우리에게 사랑과 평화 주시는 성령
근심 걱정 버리고 모든 것 맡기길

우리네 인생사 그 한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시는 성령

예수님의 유언(遺言)에 따르면, 지금 우리 시대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떠나가신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가득 찬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협력자이자 우리들의 보호자, 당신과 일심동체이자 분신(分身), 당신의 대체자이자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성령을 선물로 남겨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을 파고 드십니다. 때로 구차하고, 때로 옹색한 우리네 인생사, 그 한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때로 자연 안에, 때로 한 인간 존재 안에, 때로 매일 발생하는 사건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고맙게도 너무도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수분을 섭취한 초목들의 얼굴이 어제와는 달리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만난 꽃과 나무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제게 인사를 건넵니다. 천천히 바라보니 성령께서는 자연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셨습니다. 성령의 흔적과 그분의 손길, 성령의 움직임과 역사하심을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좀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좀 더 마음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육으로만, 세상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영으로, 불변의 진리로 되돌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성령은 조금은 알쏭달쏭한 분이십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분, 아니 계시는 듯, 그러나 분명코 계시는 분, 안개 속에 계시는 분, 마치도 구름 같고 바람 같으신 분입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쌩’, ‘쓱’ 하고 신속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감지하고, 그분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온몸으로 느끼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 한 송이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안에 하느님 아버지 사랑의 손길이 담겨있으니, 성령께서 그 안에 현존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이웃들의 작은 음성이나 작은 몸짓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 속에,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자극과 예언자적 목소리 속에 성령께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계십니다. 우리 내면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 측은지심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픈 마음, 다시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 이웃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 불의 앞에 정의로움이 용솟음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언젠가 형제들과 함께 큰 축제를 성공리에 마치고 회식을 할 때였습니다. 삼겹살을 원 없이 구워 먹었습니다. 어디 삼겹살만 먹었겠습니까? 기분도 좋겠다, ‘소맥’을 제조해서 셀 수도 없는 잔을 비웠습니다. 거기다 철판 비빔밥까지 비벼서, 몇 공기나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술기운에 정신도 몽롱하고, 그저 드러누울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기도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움직임도 뒷전이었습니다. 영적인 생각들도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분의 인도 아래 살고 싶다면 어느 정도의 결핍이 필요합니다. 춥고 배고픔, 긴장과 자극이 필요합니다.

평화를 주시는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돌아보니 저도 참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울적했고,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는 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대대적인 ‘마음 비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심호흡에 심호흡을 거듭했습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날숨을 내쉴 때마다, 의식적으로 제 안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들숨을 들이쉴 때마다 대기 중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죽기 살기로 비움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기적이 제 내면 안에서 시작되더군요. 끔찍했던 상처들, 미처 치유되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 수시로 떠올라 삶을 옥죄이던 트라우마로부터 아주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는데, 정말이지 쓸데없는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괜히 오지도 않을 쓸데없는 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 하나 띄워 보내듯, 흘려보내도 될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꼭 붙들고,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동반자이신 성령께 모든 것 내어 맡긴 사람들, 보호자이신 성령께 두 손, 두 발 다 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 가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내면의 평화요 은은한 기쁨이요 자유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근심 걱정,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역시 근본적으로 결핍된 인간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5월 23일 (월) [백]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5,26─16,4ㄱ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라고들 말합니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고, 사람들은 참 다양한 신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세상은 늘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데, 실제 모습은 그렇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의 책장을 조금만 뒤적여 보아도 신의 이름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과 살인을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저마다 또한 종교마다 믿고 따르는 신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은 곧바로 적이 됩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의 종교는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이단이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서로 죽여 왔고, 지금도 죽이고 있습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오늘 복음의 한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며 누군가는 예수님을 죽였고, 누군가는 그분의 제자들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며, 또 누군가는 그리스도를 살해한 사람들이라는 죄명으로 유다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와 신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는 신의 적대자가 됩니다.”

우리 또한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느님의 모습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이 만들어 낸 하느님과 신앙을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참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하루는 내 하느님을, 내 신앙을, 내 교회를 유연한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4일 (화) [백]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6,5-11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지난 주일부터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일까요? 특별히 ‘죄’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 번역 성서는 이를 좀 더 뜻을 살려 번역하였습니다. 곧 “그분(성령)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이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한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 하느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만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제 죄는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그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실수와 잘못이라는 수렁 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는 구원받을 자격조차 없다.”라고 자책하며,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죄라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굳게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구원의 시작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5일 (수)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6,12-15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아테네. 그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돌기둥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며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길에 그 아크로폴리스 정상을 향하여 가다가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작은 푯말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하다.” 바오로는 그렇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다신론 사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선포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 앞에서 담대하고도 용기 있게 외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신전 중에 신전이요, 인간이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느님,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섬김과 예배에 결코 종속되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조차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6일 (목) [백]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도 가졌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필립보 네리는 서른여섯 살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1595년 선종하였고, 1622년 시성되었다.

[복음묵상] 요한 16,16-20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제게는 유학 시절에 만난 폴란드인 친구 신부가 있습니다. 방학이 되면 가끔 그 친구 신부의 고향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주일이 되면 그곳 본당에 가서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신부가 미사를 주례하기만 하면 신기하게도 미사가 생기가 넘치고 즐거운 잔치가 되었습니다. 비결은 간단하였습니다. 미사 시작 때 한 번, 강론에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견에서 다시 한번 신자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폴란드 말이어서 무슨 이야기로 신자들을 그렇게 웃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미사에 참석한 모든 신자가 그 신부의 이야기에 큰 소리로 웃는 장면은 낯설면서도 참 보기 좋았습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필립보 네리 사제는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과 고해 사제로 명성이 대단하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유머 감각의 소유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쾌활한 성격과 유머로 사람들을 웃게 하고, 그 웃음을 통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한 분이었습니다.

가끔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신앙생활을 경건하고 엄숙한 것으로만 여기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특별히 미사 때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고, 실수한 사람은 신부님과 수녀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하며 고개를 숙이기까지 합니다. 정성을 다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이미 일어난 실수라면 너그럽게 웃고 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실수를 엄한 얼굴이 아니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계시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던 필립보 네리 사제를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생활도 아주 작은 일 하나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웃음이 가득하도록, 밝게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7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0-23ㄱ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 근처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의 말[馬]이 까닭 없이 도망을 쳐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끼던 말을 잃은 그 노인을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駿馬)를 데리고 다시 노인에게 돌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두고 노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자, 그는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화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말타기를 좋아하던 노인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인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많은 오랑캐가 한꺼번에 침입해 오자 마을의 장정들이 이에 맞서 싸우다 열의 아홉은 전사합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부러진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할 수 없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처럼 우리 삶의 길흉화복은 늘 변화가 많아 예측할 수도 예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한 여인이 해산의 진통을 이겨 낸 뒤에야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할 수 있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며,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내맡겨 봅시다. 주님께서 분명 그 모든 근심을 새로운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8일 (토) [백]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6,23ㄴ-28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형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 조카 녀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 살 동생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여섯 살 오빠가 빼앗으려다가 싸움이 난 것입니다. 집안 여기저기에 수많은 장난감이 쌓여 있는데도 동생의 장난감이 탐난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도 만만치 않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가 장난감을 끌어안은 채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오빠가 흠칫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납니다. 그러고는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나 저 장난감 가지고 놀고 싶어요.”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두 아이 사이에서 형수는 엄마로서 먼저 오빠에게 충고합니다. 동생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다른 장난감도 많으니 그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고는 네 살 동생에게도 오빠랑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다독입니다. 여섯 살 조카 녀석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다시 평화로워집니다.

입시 철이 다가오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는 부모들의 기도가 줄을 잇습니다. 미사와 기도의 지향에 대 놓고 ‘합격하게 해 달라.’는 말은 못 하지만, 결국 그런 의향으로 미사도 봉헌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기도를 들으셔야만 하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난처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합격하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합격하면 누군가는 불합격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가 합격하게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하느님, 내 가족만을 위한 하느님이 되어 주십사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가지고 놀고 싶으니, 엄마에게 동생의 장난감을 빼앗아 달라는 여섯 살 아이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먼저 우리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만을 위하여 하느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요구를 계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복음과 사회교리 (「간추린 사회교리」334항)

교회는 양적 성장 뒤에 숨어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

재화 축적이 공동선 위한다 해도
참 행복 위한 충분한 조건 안 돼
가장 낮은 곳으로 찾아 오시는
하느님 가르침 다시 새겨야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하는 소리에 바오로 서간을 집어서 읽어 보니,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욕망을 채우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이 자신을 초대하고 있었다. 그 순간 모든 의혹의 어두움은 스러지고, 확실성의 빛에 휩싸였다. (줄리아노 비지니 「성 아우구스티누스」 중)

■ 명당과 재물복

창문을 열면 뒷산에서 맑은 햇빛과 상쾌한 바람이 들어오고, 널찍한 마당과 그 앞에 시원한 냇가가 흐르는 집, 누구나 살고 싶은 집입니다. 여기에 살면 일이나 기도도 잘되고 더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집이 풍수리지 명당이고 복이 넝쿨째 들어온다 해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이 벌어지고 집값이 천정부지로 뛴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은근히 풍수지리 영향이 꽤 많습니다. “집 사면 어디가 좋을까? 풍수지리 전문가에게 묻는다”, “현대의 풍수지리는 강보다 지하철 라인이 더 중요”, “풍수전문가가 본 용산, 재물이 모이는 명당”이라 하고 주방·욕실·실내 인테리어 풍수지리도 있습니다. “설거지한 그릇은 엎어 두지 않는 게 좋다. 그릇은 음식도 담지만 주방으로 들어온 좋은 기운도 담기 때문이다”, “재물운이 쌓이도록 침실 공간은 최대한 비워두기” 공통점은 결국 명당 혹은 인위적으로 조작한 환경을 통해 재물을 많이 얻는다는 것입니다.

■ 풍수지리와 극단적 물신주의

가톨릭 신앙은 풍수지리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풍수지리는 동양의 오랜 생활경험이 반영된 자연관이며 소박한 지리결정론적 사고방식이라고 이해하거나, 과학적 근거가 결여된 기복적 경향이 강하기에 자칫 십계명의 1계명을 거스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분명 풍수학은 동양의 지혜와 경험이 축적된 사상이며 환경과 인간을 유기적으로 바라보고 도덕윤리를 포함해서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는 이로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과 해석의 차이도 큰 데다, 역사를 보면 건국과 도읍 선정 시 권력다툼을 위해 정략적으로 이용된 사례도 많았습니다. 또한 동서양의 풍수지리 명소가 꼭 일치하지도 않고 인생의 길흉화복이 단순히 자연환경에 달렸다는 운명론에 빠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 물신숭배를 위한 미신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간혹 가난한 사글세방, 창문도 없이 볕도 들지 않고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반지하에 계시는 교우들을 뵐 때가 있습니다. 밥솥의 오래된 밥과 식은 찬으로 식사를 하시고 찾아오는 분들도 없이 외롭게 계시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계시는 곳은 명당일까요? 하지만 “신부님, 하느님이 계셔서 행복해요”라는 그 말씀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가난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는 저 자신에 대한 반성과 하느님만을 의탁하며 살아가는 그분들의 삶이 마음을 울립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부족하고 아픈 곳으로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우리 신앙의 가르침은 물질과 풍요만을 최고라 떠들어 대며 풍수지리를 재물 얻는 데만 해석하려는 세상에서 우리가 반드시 성찰해 봐야 할 대목입니다.

“축적 그 자체는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 해도 참된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사회 교도권은 양적인 것만 추구하는 발전 뒤에 숨어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34항)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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