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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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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호 - 부활 제5주일 / 22-5-15
입력일 : 2022.05.13 17:25:48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5-022.jpg 조회 : 1928
서울 청담동성당 성모의 밤 성모상

2022년 5월 15일 일요일, 제885호 소식지입니다.



요즘 각 본당마다 성모의 밤 전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동안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성모님을 모시고 많은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고 맑고 고왔습니다.

성모님의 계절에

마음을 담아 묵주기도를 합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15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 14,21ㄴ-27 / 제2독서 묵시 21,1-5ㄴ / 복음 13,31-33ㄱ.34-35

새로운 현실, 새로운 계명

죽음의 현실 이겨내신 예수님 부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주시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함께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진면목 보여주신 것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얻는 지식이나 법칙을 경험칙(經驗則)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순수한 논리와 당위의 세계에 살지 않기 때문에, 경험칙을 통해서 이론과 논리의 허점들을 채워 갑니다. 예를 들어 어느 식당에 유명한 요리학교 출신 주방장이 일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주방장이 있는 식당이라면 ‘맛집’일 거라고 짐작하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겠지요. 하지만 막상 식당을 다녀온 사람들마다 음식 간이 안 맞고 상한 냄새가 나더라고 불평한다면, 그 또한 쉽게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개 논리뿐만 아니라 경험칙을 고려해서 판단하지요. 주방장의 경력을 믿고 식당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직접 음식을 먹어본 이들의 경험을 믿고 다른 식당으로 가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경험한 바가 다른 까닭에, 경험칙도 모두에게 다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상처받고 배신당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마땅히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마저도 의심하고 곱게 보지 못합니다. 이해와 신뢰의 경험이 컸던 사람은 그 반대겠지요.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형성한 경험칙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뭇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들이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그 자체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것이니까요. 경험을 고려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이 시신을 빼돌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것보다, 그 추종자들이 음모를 꾸며 조작했을 거라는 추측이 그들의 경험칙에 더 부합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체험하고 배운 제자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부활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먼저 제자들이 체험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계신 분이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가득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이었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답게, 그분이 행하시는 기적으로 포도주가 넘쳐나고 병자가 치유되며, 죽은 아이가 되살아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고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라고 탄복할 만큼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5000명을 먹이시고, 타볼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모습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분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고 묻히십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십자가형을 당한다는 것은 지독하게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처형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종교적 저주 아래 죽는다는 것을 뜻하고(갈라 3,13), 하느님 계약의 백성의 ‘장막 밖에서’ 죽게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십자가형은 하느님을 모르는 범죄자의 죽음,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추방되어 죽는 죽음을 뜻했습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걸림돌이요 어리석음일 뿐이었지요.(1코린 1,23) 스승 예수가 하느님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분인 줄 알았는데, 철저히 버림받은 모습으로 생을 마치다니…. 제자들은 좌절 속에 쓸쓸히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겁에 질려 다락방에 칩거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열고 눈을 밝혀 하느님 사랑의 참뜻을 깨닫게 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모습으로 만나면서 제자들은 이전에 체험했던 사랑의 진면목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파스카 이전에도 제자들은 병고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아들을 죽음에 넘겨주고 울부짖는 과부에게 응답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고통과 슬픔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알았지요. 하지만 그 사랑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이해하게 한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명하신’ 예수님의 사랑, 가장 처참한 죽음을 통해 성자를 부활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면서 제자들은 고통스런 환난의 시간에도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생명을 부활에 부르시는 아버지의 사랑도 드러납니다. 부활은 고통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순간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순간이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새롭게 깨닫습니다. 사랑은 대가를 얻기 위해 행하는 의무가 아니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는 장밋빛 약속도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함께하는 것이고, 어떤 환난도 함께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통받는 이와 함께 하면서 “눈물을 닦아 주실”(묵시 21,4)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합니다.(사도 14,22) 환난의 시간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고, 그 고통이 오히려 하느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계기라는 점을 확신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환난의 순간마저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또한 서로 고통의 시간에 함께함으로써 사랑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구약에도, 또 다른 종교에도 흔히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로 알려주시는 그 참사랑을 서로에게 보여주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깨닫는 탁월한 자리인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5월 16일 (월) [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1-26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오늘 독서를 읽다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어느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바오로 사도가 만난 앉은뱅이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그에게 치유와 구원의 기적을 베풀 수 없었을까?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 편에서의 선행과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은총 안에서 허락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와 정반대인 듯 보이는 또 하나의 논리를 곁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만, 그 구원을 받고자 인간 편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신학을 동시에 병행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긴장 관계 안에 놓아두고, 그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구원과 행실을 통한 구원,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쌓으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사랑하는 것, 아니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믿음과 행실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주위의 형제들을 마음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7일 (화)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7-31ㄱ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4-35).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평화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평화는 아마도 전쟁이나 갈등, 분쟁과 싸움이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가식적이고 꾸며진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넘쳐 나는데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어떻게든 포장되고 가려진 문제 위에 세워진 평화는 우리를 기만합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평화라는 가식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는 아픔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얻은 평화가 아니라면 그 또한 거짓 평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평화를 바라시나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인가요? 아니면 세상이 주는 평화인가요? 권정생 작가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 속의 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평화는 고요히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괴로운 세상이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8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제 방에는 화분이 많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식물 키우는 것이 즐거워지더니, 하나씩 구입한 화분과 또 분갈이를 하면서 늘어난 화분이 모여 지금은 50개가 넘게 있습니다. 그렇게 저와 함께 있는 제 반려 식물들은 거실에서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화분이 많다 보니 물을 주는 데만도 꽤 시간이 걸리고, 오랜 시간 집을 비워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동안 녀석들이 말라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생각하지 못한 때 새롭게 돋아나는 잎들을 보는 기쁨과, 때로는 작고 앙증맞게 피어나는 꽃들을 보는 신기함으로 어느 화분 하나 허투루 대하지 못하고 애지중지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식물 키우기에 관한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하였습니다. “식물을 사랑한다면 가위를 드세요. 식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톱을 드셔야 합니다.” 처음엔 이 말의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파리 하나만 시들어도 마음이 아프고 신경이 쓰이는데, 어떻게 가위를 들라는 말인지.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제대로 식물을 성장시키고 또 예쁜 모양을 지닌 건강한 식물로 키워 내려면 과감히 가위와 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필요 없는 가지들을 쳐 내는 일이, 가지들 사이에 숨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일이 식물의 건강한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여기에서 ‘가지를 깨끗이 손질하다.’라는 말은 다름 아닌 ‘가지치기를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열매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과감히 가위와 톱을 들고 계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9일 (목) [백]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마지막 기도를 올리시려고 올리브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함께 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태 26,38) 하고 말씀하신 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루카 22,41)에 혼자 가시어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기도하십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그렇게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다는 곳에는 ‘겟세마니 대성당’이 자리해 있고, 예수님의 당부에도 눈이 무겁게 감겨 제자들이 잠들어 버렸다는 곳은 ‘사도들의 동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를 때, 사도들의 동굴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성지 순례객이 아니어서 여유 있게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 나름대로 그렇게나마 실천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히 앉아 기도하던 제 눈에 한쪽 벽에 새겨진 작은 글씨가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리스 말로 “내 안에 머물러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객 가운데 누군가가 동굴 한편에 새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잠들어 버린 제자들의 마음에, 아니 제자들처럼 여전히 잠들어 있는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새기고자 하였던 그이의 마음에 제 마음도 가 닿았습니다.

어제부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저 그분 앞에 앉아 있는 것만이 그분 안에,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우선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많은 일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흘러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그분 앞에 멈추는 것! 그렇게 멈추어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으로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 주시는 기쁨이 솟아나지 않을까요?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0일 (금)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복음서를 읽다 보면, 가끔 동의하기 어렵거나 동의하고 싶지 않은 예수님 말씀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말씀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성소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리고 특별히 서품식에서 듣는 말씀이어서 익숙하기도 하고 또 익숙한 만큼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어쩐지 제게는 이 말씀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와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씀의 기본 의미, 곧 우리 삶의 모든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의 손길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제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는 그렇게 하느님께 직접 선택 받은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뽑기 전에 적어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미리 말씀해 주시거나, 그렇게 해도 되는지 먼저 동의를 구하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제 자유 의지를 이렇게 무시하셔도 됩니까?” 하고 묻고 싶은 것이지요. 조금은 엉뚱하지만, 어쨌든 저는 이 생각의 연장선에서 “성소란 100퍼센트 하느님의 부르심이자, 100퍼센트 본인의 선택이다.”라는 말을 때때로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주도권과 제 자유 의지가 좀 균형이 잡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다음의 말씀에 제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가 맺게 될 열매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상으로 주어진 인생이라는 선물, 그 안에서 주어진 신앙이라는 은총,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어떤 열매를 맺어 가고 있는지요? 우리를 끊임없이 선택해 주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오늘 하루도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21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아홉 달만에 태어난 아기가 의사의 부주의로 뇌성 마비가 되었습니다. 의사가 아기 머리를 잘못 건드려 뇌가 손상되었고, 그 때문에 뇌성 마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자신의 인생이 시작부터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아기는 열 살이 넘어서야 겨우 숟가락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난한 집안에, 아버지는 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아이는 하느님을, 부모님을 죽도록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우연히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만남에서 얻은 새로운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의 글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많은 이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라는 시로 유명한 송명희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그 이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이 시에서, ‘예수’라는 이름에 엄청난 비밀과 사랑이 숨어 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 이름이야말로 진정한 기쁨이자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 이름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수많은 이들이 그 이름 때문에 고통당하고 모진 고문과 박해 속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숨져 간 이들 대부분이 자신의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이 이들을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을 초월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이 노래하였듯, ‘예수’라는 그 이름이 우리의 삶에도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자 기쁨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그 이름의 의미와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세상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도덕적 양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783~1802항)

교회 통해 갖추게 되는 하느님 나라 수준의 양심

각자의 내적 법정인 ‘양심’
고정되지 않고 성장하는 것
교회 공동체 안에서 훈련돼야

각 사회는 그 사회의 유지를 위해 그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법’을 제정합니다. ‘양심’은 배운 법을 지켜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각자의 ‘내적 법정’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양심이 고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형성되고 교육되고 성장한다’라고 가르칩니다.

양심은 존재합니다. 이를 믿는 우리는 이제 양심을 계발하고 형성하고 발전시켜갈 필요가 있습니다. 더 잘 형성된 양심이 한 사회에 더 잘 소속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지켜낸 법은 ‘사랑’의 율법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로마 13,10 참조)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의 율법이 양심에 새겨지는 것일까요?

아기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아야만 가족 공동체에 소속될 자격을 갖춥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는 이미 사랑의 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이는 양심의 법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따라 모세의 율법이나 그 리스도의 가르침을 몰랐다고 하느님 앞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삶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방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로마 2,14)할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같은 수준의 율법이 양심 안에 쓰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자신에게 준 ‘사랑의 수준’이 각기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적은 부모에게 적은 사랑만 받은 사람은 사회에서 적게 사랑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은 많은 사랑을 내어주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합니다. 만약 아기가 늑대에게 키워졌다면 늑대의 본성만큼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이의 양심은 늑대 무리와 함께 살 수 있는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양심의 수준으로 머물 곳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려면 어때야 할까요? 하느님 수준의 법이 양심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법은 단순히 사랑하라는 계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준이 되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사랑은 미사 때 말씀을 통한 가르침과 성체를 통한 희생으로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이 수준의 사랑을 체험한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 수준의 양심이 형성되고 교육되고 계발되는 공동체인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양심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체를 통해 법의 제정자가 우리 안에 함께 계심을 믿으려는 노력을 쉼 없이 계속하는 것입니다. 운전할 때 경찰이 내 옆에 함께 타고 있다면 신호등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법을 제정한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다 믿으면 양심이 올바로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마음으로 지을 수 있는 죄까지도 지을 수 없게 하심으로써 하느님 나라 백성 수준의 양심을 갖추게 하십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다음 주 부터 매장 인테리어 작업을 진행합니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성물을 진열할 수 있도록 단순하면서도 기품있는 전시장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완성되면 이미지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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