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비는 소리를 귀여겨 들으소서."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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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호 -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 22-5-8
입력일 : 2022.05.06 18:25:30
작성자 : 성물방 File : 2205-021.jpg 조회 : 3625
하남 소재 구산성지 성모자상


2022년 5월 8일 일요일, 제884호 소식지입니다.




한참 철쭉등이 피어 눈을 즐겁게 하더니만

요즘 주위에 아카시아 꽃 향기가 가득합니다.

성모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에서 소리로 옮겨 가야 할 때

묵주기도를 조용히 바쳐봅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2년 5월 8일 (일) [백]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제1독서 사도 13,14.43-52 / 제2독서 묵시 7,9.14ㄴ-17 / 복음 요한 10,27-30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주님의 깊은 사랑 체험한 이들은
자신의 변화된 삶을 기꺼이 봉헌
사랑 실천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며
올바른 길 걷도록 청하고 기도하길

■ 하느님께서 나를 아신다

나를 아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지 모릅니다. 저는 존재감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모임에 있어도 모르는 사람이 많고, 몇 년이 지나서도 제가 그 모임에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나를 아신다’는 말은 저에게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보통 눈에 띄는 사람들을 기억하기 마련인데, 하느님은 드러나지 않는 저를 안다고 하십니다. 그냥 아시는 것도 아니고 값지고 소중하게 보아 주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실 정도로 잘 아시고, 들풀까지 입히시는 마음으로 아십니다. 그 하느님의 마음이 저에게 기쁨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다른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는데 그 마음이 조금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독서는 다니엘이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 부서지고 깨진 마음을 받아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주님 제가 이렇습니다’ 하며 하느님께 시선을 둡니다.

하느님은 복음에 나오는 임금과 비슷합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해 주시는 모습, 그 모습과 더불어 저를 바라보시는 시선들, 곧 ‘보시니 좋았다. 네가 나의 눈에는 값지고 소중하며,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시고, 들풀까지 입히시거든’ 하는 말씀들이 마음 깊은 곳에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하는 기도가 충만해졌습니다.

■ 그들은 나를 따른다

하느님의 사랑은 봉헌을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헌신으로 나아가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자신의 삶을 봉헌한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는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자신의 재산을 절반이나 내놓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겠다고 약속합니다. 또 죄의 용서를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주님께 부어 드립니다. 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 주시는 예수님을 체험한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선포합니다.

저에게 그 봉헌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큰 사랑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끝까지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모습을 생각했을 때 마음에서 처음 올라온 반응은 ‘나는 할 수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끝까지 순종하는 것도 힘들겠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베드로와 「나를 이끄시는 분」을 쓰신 월터 취제크 신부님이 떠오르면서, 또 내 힘으로 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그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청하고 기도했습니다.

■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신학과 3학년으로 복학하기 전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말도 잘 못하고 능력도 없고, 사람들과 잘 지내지도 못하는데, 사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리더십 있는 신부님들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무력감을 느끼며, 신학교에 복학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새 신부님 첫 미사에 갔는데, 앞뒤 말씀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신부님의 강론에서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못 나고 능력이 없고 재주가 없어도 모두 신학교로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그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신부님의 그 말씀을 듣고 개인적으로 힘을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바란 것은 자신들의 능력을 계산하고 재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모습일 겁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화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신약에 보면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남자가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선교사로 삼으셨고, 자신의 몸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또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가 들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는 명예를 주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모습은 이것입니다. ‘네가 어떠한 모습이든지 간에 너를 하느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괜찮다. 다시 한번 힘을 내 일어서 보거라.’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2년 5월 9일 (월)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1-10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계시하십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문! 바로 이 문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양들이 이 안전하고 확실한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둑과 강도가 바로 그들입니다.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양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도둑과 강도, 이렇게 오늘 복음은 양들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부류의 등장인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또 다른 인물이 복음에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문지기입니다. 단 한 차례 언급되고 사라지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문지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착한 목자에게 양 우리의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이 목자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가 바로 문지기이기 때문입니다.

문지기에 대하여 묵상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가 바로 문지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신자들이 올바른 방향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끄는 문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세상은 교회와 그리스도께 호감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며, 마침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찬미하며, 오늘 하루 주위의 이웃들을 그 문으로 이끄는 하느님 나라의 충실한 문지기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0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절망해 본 적이 있나요? 깊은 좌절에 신음해 본 적이 있나요? 살다 보면 죽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따뜻하게 건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와 축 처진 어깨를 감싸 주는 누군가의 손길은, 우리가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갈 용기와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바르나바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시 사울은 그동안 굳건하게 믿어 온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선포하는 이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변절자인 사울을 찾아 죽이려 하였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조차 박해자였던 사울을 두려워하여 그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고향 타르수스에 칩거하며 어둠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를 바르나바가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빛과 희망의 세상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바르나바가 사울과 함께 일군 안티오키아 공동체 구성원들은 인류 역사에서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하는 일들이 우리의 신원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사울에게 위로와 용기의 손길을 건네 준 바르나바를 기억하며, 오늘 하루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1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제대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 혼동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만납니다. 교회가 성화 상 공경과 관련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 저 뒤편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성화 상 공경은 성모상이나 성인의 이콘을 공경하고 신성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형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 곧 성모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 다시 말해 그들의 신앙이 보여 준 모범적인 삶에 대한 공경의 행위입니다. 이는 교회가 거행하는 성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질료와 형상인 빵과 포도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선물을 안겨 주시는 분을 마음으로 보고 굳게 믿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2일 (목) [백]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3,16-20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사람들 가운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몸소 체험하고 또 그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호칭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본디 ‘파견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어떤 사명을 받고 그것을 수행하도록 파견된 사람은 모두 사도가 됩니다. 이런 의미의 단어가 특별히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파견된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4장 14절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사도’로 불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사도로 파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사의 마지막에 선포되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자, 이제 파견입니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를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주님의 몸과 피를 함께 받아 모셨으니, 이제 세상에 나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증인으로 파견되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한편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증언할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다시 하느님의 사도로 파견되는 오늘, 우리의 사명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분의 말씀을 전하는 일임을 기억합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3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어지럽고 어수선한 상태를 ‘산란하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저마다 걱정과 근심을 안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산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예수님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그의 동생들과 지인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또다시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도 다시 한번 산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 산란한 마음을 다잡으시고 다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근심과 걱정을 아버지 하느님께 내어 맡기신 채,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십니다. 그렇게 하시어 그분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되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가 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 곧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하느님을 믿고, 또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며, 흩어지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오늘 하루도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하여 나아갑시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2022년 5월 14일 (토)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로,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유다의 자리를 넘겨받는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한다.

[복음묵상] 요한 15,9-17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은 유다의 자리를 마티아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마티아의 선출 이야기 외에 성경 어디에서도 마티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복음서 밖에서도 그에 관한 전승은 매우 빈약하여 그가 어떻게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배반자였던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뽑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마티아 사도가 거론될 때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연치 않게 다른 사람의 자리를 떠맡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임자가 훌륭할 경우 그의 위업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마티아 사도처럼 전임자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의 흔적과 어두움을 지워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간다면 어느새 과거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지 않을까요?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봅시다.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설령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이며 턱없이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 자리에서 늘 충실하려고 노력할 때 그 자리는 어느새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 있고 또 앞으로 서게 될 모든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 나아가 세상의 빛이요 희망으로서 참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사랑 그 미묘한 것

자기 자신 미워하거나 홀대하면
마음도 삭막해지고 황량해져
하느님과 타인에 대한 사랑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것 또한 중요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누누이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심리치료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랑의 심리적 치유효과에 대해 강조합니다. 마음의 건강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대해 우리 교우분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알겠는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이해가 안 간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냐”하는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사랑은 세 가지가 균형이 잡혀야 합니다. 나와 하느님의 사랑, 나와 너와의 사랑, 그리고 나와 나와의 사랑의 관계가 균형 잡혀야 합니다. 이중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받는 것이 나와 나와의 사랑입니다. 심지어 교우분들 중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미워하거나 홀대하면 마음 안이 사막처럼 황량해지고 사랑의 물이 메말라 버리기에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 소홀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사랑을 꼭 마음 안에 진솔한 감정을 가득 채워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운사람을 사랑해야 하는데 마음을 다하지 못했다는 웃지 못 할 고백을 듣곤 합니다.

미운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도 힘든데 감정까지 다하란 것은 죽으란 말과 같습니다. 미운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그 이상으로 하게 되면 나중에 짜증이 나서 더 미워할 수도 있으니 감정이 실리지 않더라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꼰대 유머를 하나 나눠봅니다. 비신자인 할머니가 신자 할머니에게 은근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란 양반 여자를 그리 좋아했다며?”, “언놈이 그딴 소리 한다요?”, “내가 성경을 쪼까 읽어보니 그렇더만?”, “성경 어디?”
“그 양반 뻑하면 마리아인가 마르타인가 하는 다 큰 처녀들 집에 갔다누만.”, “헐.”
“글구 죽었다 살아나서도 어미보다 마리아 막달레나인가 뭔가 하는 지집부터 먼저 만났다지?”, “허어얼.”
제대로 말도 못하고 부아가 치민 신자 할머니는 바로 성당에 가서 주님께 “주님 그때 처신을 잘하셨어야지. 왜 고땀시로 하셔서 저런 무식쟁이 할멈에게 내가 개망신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까”하며 따졌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머리를 긁적이시며 “미안타. 내가 그때 서른 살 총각이었던지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님은 하느님이시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데 인성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단다. 나도 사람인데 어쩔 수 없더구나. 용서해주라.”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 소장) , 가톨릭신문



[성물방 소식]

사무실이 미사공원과 바로 붙어 있어 서울에 있을 때 보다 훨씬 좋은 환경입니다. 게다가 넓은 공간이 여유있게 일처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고객님께서도 기회가 되면 한번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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