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찬미받으소서. "

성물방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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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6호 -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 23-5-7
입력일 : 2023.05.05 10:56:26
작성자 : 성물방 File : 23-05-01.jpg 조회 : 135
충남 보령소재 갈뫼못 성지

2023년 5월 7일 일요일, 제936호 소식지입니다.



5월의 첫주간

어린이 날, 어버이 날 등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나들이가 잦은 요즘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서로에게 격려와 기쁨

사랑이 가득한 한주간 되시길 빕니다.





[금주의 말씀묵상]


2023년 5월 7일 (일) [백]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제1독서 사도 6,1-7 / 제2독서 1베드 2,4-9 / 복음 요한 14,1-12

빛으로 이끄시는 주님, 그분을 평생 섬기는 삶

제자들 변화시킨 예수님의 섬김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길

“주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 내 주십니다.”

시골 본당에 있을 때 평일미사에 나오는 신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제가 강론하는 것보다 나눔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복음을 읽고 나서 신자들에게 “복음 묵상을 나누셔도 되고, 힘드신 분들은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읽어만 주셔도 좋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은 편하게 생각을 나눠주셨는데요. 두 분은 죽어도 안 하시려고 했습니다. 나눔이 어려우면 와 닿는 말씀을 반복해도 될 텐데 그것도 안 하시겠다고 버티셨습니다. 그래서 나눔을 마무리하고 미사를 계속 봉헌했는데요.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배우기도 하고, 다시 선포된 말씀을 마음에 새겨 보면 유익할 텐데, 따라 주지 않으시는 모습에 마음이 살짝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 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신자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었는데요. 신자들이 함께해 주지 않아서 서운하기도 하고, 일의 무게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만해야겠다는 핑계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을 다 보내고 난 뒤에 수단을 입고 시골길을 한참 걸었습니다. 그렇게 걸으니까 신학교에서 마침 기도 끝나고 고민하며 산책하던 생각도 나고, 그 몇 주 전에 수녀님들이 오셔서 ‘여기 관상 수도회가 들어오면 참 좋겠네’ 하셨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엄청 조용하거든요.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신자들이 별로 호응이 없는데 나도 놀 수 있다는 걸 보여 줄까, 다른 일들 신경 안 쓰고 편히 살아 볼까’ 하는 건데요. 바로 ‘그건 아니지. 아직도 마음을 다 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또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혼자 독백하고, 지나가는 생각들과 대화하면서 산책을 계속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왜 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이 올라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걷는데 예전에 ‘섬김’이라는 단어를 묵상했던 것이 떠오르더라고요. ‘섬김’이 줄임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두 가지입니다.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섬에 사는 김 신부’이고요. 다른 하나는 ‘섬기는 삶을 살아라, 김 신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전 생애가 섬기는 삶이었다는 내용들이 죽 지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편하고자 하셨다면 늘 찬미와 순종이 있는 천사들을 택하셨겠지만 그렇지 않으셨죠. 예수님께서는 불편한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말도 잘 안 듣고, 이해도 못 하고, 배신하고, 도망가 버리는 그런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이 변화될 때까지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부르시고,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해 주시고, 발을 씻겨주시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런 평생의 섬김이 제자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데요.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서 ‘섬기는 삶, 평생 섬기는 삶, 예수님도 평생 섬기는 삶을 사셨는데’ 하는 말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당시에 노래 듣는 취미가 생겨서 인터넷을 켜고 노래를 검색했습니다. 그날은 성가가 듣고 싶어서 가톨릭 부분에 들어가서 한 번씩 들어 보고 다운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제 마음에 울림을 주는 성가가 있었습니다. 이용현 신부님의 ‘늘 그렇게’라는 성가인데요. 가사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늘 그렇게 맑은 눈빛으로
늘 그렇게 밝은 웃음으로
늘 그렇게 넓은 가슴으로
늘 그렇게 사랑하길 나는 기도하네

사랑하는 친구여
늘 그렇게 그분의 눈빛이
늘 그렇게 그분의 숨결이
늘 그렇게 그분의 사랑이
늘 그렇게 내게 머물길 나는 기도하네
지나간 시간들의 아쉬움과
다가올 시간들의 설레임 모두


우리가 늘 그렇게
그분과 함께 살아간다면
세상엔 그 모든 것들은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 거라네
늘 그렇게 늘 그렇게 늘 그렇게

마치 누군가 의기소침해 있는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인 듯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듣고 또 반복해서 들으며, ‘그래, 늘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겠지’ 하는 마음과 열의가 생겼습니다.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1베드 2,9)

이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의기소침함이라는 어둠에 있던 저를 밝은 빛으로 이끌어내 주시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선포하게 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할 힘을 주십니다.

김기현 요한 세례자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영성지도 담당 , 가톨릭신문



[한주간 전례]

2023년 5월 8일 [백] 부활 제5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1-2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설교하면서 앉은뱅이 하나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태어나 걸어 본 적이 없던 그가 복음을 들으려고 집을 나서서 복잡한 군중 틈에 끼어들기까지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았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는 이’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현존과 기적이 따르지만, 기적이 꼭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본 군중은 사도들을 이교 신들로 오해할 뿐, 복음을 전하여 듣고도 정작 바오로가 돌팔매질을 당할 때 그를 내버려 둡니다(14,19 참조).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많은 이가 이 시대에 믿음을 가지기가 어렵고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만,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첫걸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계명과 규정’이 ‘의무와 속박’으로 괴롭게만 느껴지거나 자신이 지킬 계명이 무엇인지 의식 없이 사는 사람은 아직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중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태 22,36-40 참조])과 ‘새 계명’(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을 주셨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아버지와 함께 가시어 그와 더불어 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앉은뱅이 같은 내가 하느님의 현존과 기적에 가닿는 길은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삶에 있습니다. 지혜가 간절한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을 일깨워 주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협조자 성령께 의탁합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2023년 5월 9일 (화) [백]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14,27-31ㄱ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제국이 자부한 ‘Pax Romana’(로마의 평화)는 전쟁이 없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뜻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바쁜 나날이지만 경제적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날 때 평화롭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벗어남으로써 얻는 소극적인 평화는 쉽게 깨집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참혹한 수난을 눈앞에 두신 분께서 주신다는 그 평화는 대체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서에서 “평화”라는 단어(그리스 말 ‘에이레네’)는 여섯 번 나옵니다. 세 번은 주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제자들의 고난을 예고하실 때(14,27; 16,33 참조), 또 세 번은 부활하신 뒤 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실 때 나옵니다(20,19.21.26 참조). 이처럼 주님의 ‘평화’는 언제나 그분의 ‘현존’과 함께 그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은 시시각각 우리 영혼을 파고듭니다. 그러나 ‘세상의 우두머리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일상의 그 어떤 억압과 불안도, 내 속을 집요하게 헤집어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어둠도, ‘주님과 함께 있는 나’를 절대로 어찌하지 못한다는 그 믿음과 당당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초주검이 되었다가 겨우 살아나고도, 두려움에 무릎 꿇지 않고 용기와 확신으로 주님의 일을 계속한 바오로 사도처럼 말입니다(제1독서 참조).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확신으로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주님을 닮아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도, 내가 획득하는 무엇도 아닙니다. 평화는 누구도 나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2023년 5월 10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께서는 “광야의 포도송이”(호세 9,10)처럼 보잘것없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오시어 약속의 땅에 심어 주셨지만(시편 80[79],9-12 참조), 이들은 들포도만 맺을 뿐(이사 5,2 참조) 거룩함과 정의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참포도나무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을 맺는 나무입니다.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께 접붙이셨고, 우리는 삶의 결실을 오직 그분과 함께 얻을 뿐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 혼자서는 결국 볼품없는 들포도를 맺기가 일쑤입니다.

제1독서에서 유다계 신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며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에게 맞섭니다. 그들은 할례를 계약의 표징으로 명시한 율법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겪지만,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 같이 충실히 머물렀기에, 구약의 그루터기에서 잘라 내어 ‘접붙이기’ 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잘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열매 맺는 가지일수록 더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농부이십니다. 잘못된 열망과 나만의 고집에 접붙은 나를 ‘가지치기’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때로 매섭게 느껴질지라도, 늘 새롭게 주님의 말씀과 뜻에 나를 접붙이는 용기를 냅시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참포도 열매가 되어, 쓰러진 이웃의 상처에 붓는 ‘치료 약’이요(루카 10,34 참조) 가족과 이웃의 기쁨과 사랑을 북돋는 잔치의 ‘음료’로(요한 2,10 참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2023년 5월 11일 (목) [백]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요한 15,9-11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열세 살이 되면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신명 6,4-9 참조])이라는 말씀에 따라, 일정 본문이 적힌 양피지가 든 작은 성구갑(테필린)을 가죽끈으로 묶어 머리와 손목에 찹니다. 또 대문과 문설주에도 성구를 넣은 ‘메주자’를 붙여 그것을 만지고 입을 맞추며 하느님의 계명을 되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와 손목에 차고 집에 드나들 때마다 만지며 늘 기억하고 삶에서 실천하려는 그 열정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귀감이 됩니다.

하느님의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지인 우리가 당신께 붙어 있어야 한다시며(요한 15,1-9 참조), 그분 안에 머무는 확실한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이중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십계명은 물론이고, 신자들의 영적 선익을 위하여 교회가 정한 규정들도 소중히 여깁니다. 이를테면 모든 주일과 의무 축일에 미사 참례, 적극적인 성사 생활, 잦은 영성체와 규칙적인 고해성사, 혼인법 준수, 자녀들의 신앙 교육, 교회 유지와 지원, 선교와 사도직 참여 등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 계명은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거룩함과 사랑 안에 머무르도록 지켜 주는 ‘울타리’입니다. 계명을 의식하며 사는 이라야 그것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고, 끊임없이 의로움을 되찾으며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2023년 5월 12일 (금) [백]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2-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이사 41,8)과 모세(탈출 33,11)는 ‘하느님의 벗’으로 불립니다. 신앙의 정수를 살아간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알려 주시고(창세 18,17 참조), 모세와는 얼굴을 마주하여 사귀셨습니다(탈출 33,11; 신명 34,10 참조). 사실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오직 하느님께서 호의로 베푸신 매우 예외적인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당부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종과 달리, 벗의 뜻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동의하여 그를 따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과 맺는 친밀한 관계와 사랑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운 순종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할례를 비롯한 지난날의 복잡한 규정들을 이방계 신자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우상 숭배)과 피째 고기를 먹는 일(‘생명[피]은 오직 하느님의 것’)과 불륜을 금하는(가정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계명만을 요구함으로써, 개종한 형제들도 ‘주님의 벗’이 되어 자유롭게 순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친구로 삼아 주셨는데, 내가 어찌 누구를 미워하고 내 벗이 될 자격이 없다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을 닮아 목숨을 다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나를 뽑아 세우신 주님 앞에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사랑과 구원의 열매를 맺는 그분의 사랑받는 포도나무로 영글어 가는 우리가 됩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2023년 5월 13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요한 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요한 복음서에서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나 구원의 대상인 ‘인류’를 뜻하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오늘 복음에서 ‘세상’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특정합니다.

세상과 교회의 대립은 지난날 더 두드러졌습니다. 잘못된 행태를 고수하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은, 복음의 진리와 질서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을 박해와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나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때문에 겪는 시련과 박해는 내가 온전히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신앙과 세상 사이에 가치관의 충돌은 오늘도 계속되지만,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관행을 따를 수 없거나 신앙 때문에 불편함을 겪을 때조차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스승이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나도 따라 걷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순교’라는 낱말(그리스 말 ‘마르티리온’)의 본뜻대로 ‘증거, 증언’하는 사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한 형제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으려고 줄곧 싸웠지만, 제자요 동료인 티모테오에게는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다계 형제들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제1독서 참조).

생각과 기준이 다르다고 하여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었던 바오로 사도를 떠올립니다. 우리도 세상과 연대하며 이웃과 동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강수원 베드로 신부)



[생활과 함께하는 교리]

일곱째 계명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419~2463항)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법을 실천하려면?

일본에 유학 중이었던 이수현씨는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15분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기숙사에 돌아가기 위해 신오쿠보역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취객이 선로로 떨어졌고 때마침 열차가 역 구내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망설이는 이때 이수현씨는 과감하게 뛰어내려 취객을 끌어올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취객과 함께 열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만약 이수현씨가 뛰어내려 취객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범법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꼭 남을 도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어떨까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부자는 왜 지옥에 갔을까요?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이 쓰며 살았는데 무슨 잘못일까요?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돈이 많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도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제인데 물에 빠진 아이를 그냥 구경만 하다가 성당에 온 신자가 있다면 그를 진정한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떤 사회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당연히 요구하는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 사랑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를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가난한 이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배척하십니다.”(2443)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더욱 강력하게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2446)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고 이수현씨는 종교와 상관없이 천국의 법칙으로 살았기 때문에 분명 천국에 갈 자격을 얻었을 것입니다. 사회교리란 이렇듯 하늘나라의 법칙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만 하는지를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는 일을 의미합니다.

빚을 탕감해 주는 희년 제정, 고리대금업과 생존권이 걸린 것들에 대한 담보 금지, 교회와 이웃을 위한 십일조 봉헌, 하루 벌이 일꾼의 품삯을 미루지 않고 매일 지급하는 것, 추수하고 남은 포도와 이삭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남겨 놓는 일 등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하늘나라의 정의와 사랑에 부응하는 일입니다.(2449 참조) 하지만 이러한 일은 현세에서 생존을 걱정해야만 하는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지켜지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이 실현될 수 있도록 “당신께서 당신의 형제들인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아보라고 우리에게 촉구하십니다.”(2449)

참다운 인간애가 있을 때 인간 사이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부합할 때 하느님 자녀의 자격을 얻게 되고 그 자녀 공동체에 머물 수 있습니다. 교리서는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는 말씀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비록 이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 “먹을 것 없고, 집 없고, 정착할 곳 없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비유에 나온 굶주린 거지 라자로를 어떻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2463)라고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법을 실천하는 하느님 백성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사회교리도 사라질 수 없습니다.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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